인산 김일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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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세상에 온 뭇성인들이 그러하듯 선생 또한 유년시절 남달리 총명할뿐더러 예지력을 발휘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선생은 네 살 무렵 이미 한글을 떼고,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창제되었음을 간파하였다고 한다. 한글을 터득한 데 이어 옥편을 떼고 한문본 삼국지, 당시, 두시, 강희자전 등을 차례로 독파하는 믿기지 않는 총명함을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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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때 비가 개인 하늘의 오색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작용을 활연대오한 선생은 공간 색소 중의 약분자 합성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병명도 모른채 숨져가는 이웃의 환자들을 구료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아홉 살 때 한반도에 전래되어온 약소금 제조법을 보완, 소금을 대통 속에 다져넣고 송진 관솔 등을 이용해 강한 화력으로 아홉 번을 구워야 제대로 법제된 약소금을 만들 수 있다는 견해를 조부께 피력하기도 한다.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왜 소금을 구워서 사용해야 하는지, 왜 대통이나 송진 등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왔을 따름이었다. 오늘날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통되는 죽염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열여섯 살 때인 1924년에는 의주에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청년들을 제압한 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선생은 항일운동의 영웅 변창호 선생이 이끌던 모화산 부대에 들어가 항일전투에 참여하였고,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묘향산 등지를 떠돌면서 병자를 구료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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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살 때인 1934년 봄철 어느 날, 철원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동자인 모화산 부대 대장 변창호 선생을 만나러 철원으로 가던 도중 일제의 앞잡이 형사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한다. 여러달 계속된 모진 고문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복역 1년 6개월째 되던 어느날, 형무소를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가 선생 자신이 창안한 인산쑥뜸법, 곧 영구법(靈灸法)으로 병을 치료해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때 함께 고문받았던 동지들 중 쑥뜸을 뜨지 않았던 이들은 고문 휴유증으로 대부분 생명을 잃는다. 묘향산에 들어간 선생은 당대의 걸출한 선지식이었던 송만공, 김수월, 하동산, 방한암 스님들과 교유한다. 서른 다섯 살 때인 1943년 장영옥 여사와 혼인한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당시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와 여운형, 방주혁,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선생들과 국사를 의론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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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다섯 살 때인 1961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주교동, 종로5가 등지에 머물면서 구료활동을 벌인다. 이 무렵 영구법으로 소경 어대사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데, 어대사는 그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주로 소경을 비롯 난치병 환자들을 보살펴 주었다. 이 무렵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 곱사, 간질, 폐암 등 당시의 불치병들을 다스려 장안에는 " 묘향산 활불이 나타났다 " 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후 72세 때인 1981년까지 서울 삼양동, 충무로5가, 수송동, 창신동, 장충동, 동자동, 수유리 등지를 전전하며 난치병환자들을 구제한다. 이 시절에 온몸에 극심한 화상을 입어 숨져가던 사람을 살려낸 것을 비롯, 암치료제인 오핵단을 개발하여 임상에 응용, 기적의 의술을 펼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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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으로 낙향하기 직전인 1980년에 선생 최초의 저술인 '우주와 신약'을 펴낸 데 이어, 1981년에는 '우주와 신약'을 한글화한 '구세신방'을 연이어 출간하여 자신의 의론을 세상에 공개하기 시작한다. 1981년 12월 31일 함양읍으로 낙향하여 운림초당에 거처하던 선생은 78세때인 1986년 우리나라 현대의학 사상 불멸의 대저술로 손꼽히는 '신약'을 드디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리고는 곧바로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공개강연회를 갖는다. 1987년 민속신약연구회를 발족시키고, 곧이어 인산의학 최초의 정기간행물인 '민의약'을 발간한다. '신약'의 출간으로 선생의 독창적 의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선생이 머물던 함양 읍내 상동마을과 이곳 함양읍의 삼남댁 신약당과 삼봉산 인산농장 일대에는 전국 각지의 난치병 환자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든다.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선생을 찾은 많은 환자들이 선생과의 단 한번 만남으로 생명을 구하게 되어, 어디든 선생이 계신 곳은 '난치병 환자들의 종착역'으로 불린다. 이른바 '지리산 도사' 할아버지가 베풀은 기적의 인술은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신문 방송 잡지 등을 통해 그 의론이 소개되기 시작하였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도 선생을 흠모하는 이들이 생겨난다. 78세 때인 1986년 6월 20일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시작, 83세 때인 1990년까지 도합 22차례의 공개강연회를 통해 공해독 시대의 난치병 치료법을 제시한다. 선생은 1992년 초부터 주위에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리며, 마지막 밝히고 가는 의학의 비밀을 공개할 것을 지시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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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세 때인 1992년 임신년 음력 3월 3일, 가족들을 모이게 한 뒤 '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토록 한다. " 인업을 중시함이 부국의 지름길 " 이라는 요지의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으며, 그 녹음한 전문이 시사춘추 92년 4월호에 수록되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이들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충정, 세상 사람들에 대한 효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선생은, 1989년부터 1992년초까지 삼남댁인 신약당에서 거처하며 사리장을 최후로 개발하고 밤낮 밀려드는 난치병 암 환자들을 구제하다가 과로로 인해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향년 84세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선계로 떠났다. 선생이 가신 뒤 생전에 환자들을 맞아주던 삼봉산 인산동천 산등성이에 법구를 안장하였으며, 7월 6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봉행된 사십구재 때는 평소 자신의 사후에 나오리라고 예언하였던 '神藥本草'를 영전에 바쳤고 1994년 이후로 신약당의 인산출판사에서 선생의 어록과 원고 등을 정리하여 '신의암처방집' '신의원초' '의사여래' '의약신성' '활인구세' '신약본초3'을 엮어냈다. 3남 김윤수가 1998년에 한국인산의학회(insan.or.kr)를, 2002년에 사단법인 인산학연구원(insan.org)을, 2005년에 인산의학센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3남자부 최은아가 인산한의원 대표이사를 맡고 월간 인산한방암센터를 발행하며 인산선생의 활인구세 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