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의지처(依持處)와 귀의처(歸依處)
의지처(依持處)와 귀의처(歸依處)
사람은 의지하고 싶은 마음(依持處)과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歸依處)을 같이 가지고 산다.
비처럼 쏟아져 내린 낙엽들,
솜처럼 부드럽고,
천사의 깃털처럼 풍요한 구름들,
그들이 대지와 하늘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계절이 가면 그들은 사라지고 대지만 남는다.
변치 않는 구름을 본적이 있는가,
흘러가지 않는 강물을 본적이 있는가,
한곳에 머문 바람을 본적이 있는가,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흘러가리라~
붓다는 모든 것은 성주이멸成住移滅,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모든 것이 무상無常(All is vanity)하다고 했다.
우주의 만물만상은 창조되고 유지하다가 변하고 파괴되고
멸하여 공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항상 고정 됨이 없이 변하는 것이 본성으로 그 무상의
사이클을 반복한다.
그리고 제행무상 諸行無常, 제법무아 諸法無我 (三法印)라고도 했다.
일체의 만물만상 만행은 언제나 흘러가고 변하며,
그들은 실체가 아닌 환상이이라는 얘기이다. 삼법인의 두 구절이다.
모든 것이, 자기마저도 흘러 변하는 것을 아니라고 하고,
부여잡고 놓지 못하니,
그나마 남는 것은 실망과 불안의 스트레스가 번민의 병고 되는 것이라,,,
그러나 무상無常한 것 속에 실체와 그 뜻이 있음을 알고
의식의 초점을 그에로 바꾸면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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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일체가 칼로 물배기,
지나놓고 보면 모든 것이 그러한 것을,,,
그대여 마음을 자신과 연관 짖지 말게나,
마음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흘러가는 구름일 분이다.
그를 앎이 깨달음,,,
세상이 객지요 죽음이 귀향이라,
객지는 잠시요 귀향은 영원하다.
삶의 모든 것,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은
결국사랑과 깨달음의 뜻을 안고 있다.
자신이 자기왕국의 주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니
자유 없는 노예로 산다.
그 귀결은 자신의 진실을 아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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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아도 하늘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눈은 눈을 보지 못해도 눈은 그곳에 있다.
자신을 잊고 있어도 무한의 자기실체의 자기는 언제나 그대로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한다,
큰 소라로 부인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리고 평생을 자기가 가진 것을 구하고 찾아 헤맨다.
만권의 책이 마음하나 깨달음만 같지 못하다.
나무뿌리는 필요한 영양분만을 흡수한다.
사람만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족함을 알지 못하고
부족과 결핍 속에서 산다.
사람은 원래 이새상과 자연의 주권자의 임무로 창조된 존재,
사람들의 잠재의식 세계에서는 그들과 한판으로 사는 생명들,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고 훈육 하라 했거늘,
그러나 사람이 오히려 자연과 나무의 그것만도 못한 의식의 상태라,,.
그것이 사람이 윤회로 가는 병이 된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다.
삶과 체험이 자신과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며
신과 자신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사람은 고통을 통하여 더 많은 교훈을 배우게 된다.
때문에 천상보다는 지구가
보다 엄청난 진화와 배움의 장소가 되는 곳이다.
이 지구는 육체를 가진 인간만이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곳이며
언젠가는 그것이 우주를 관통하는 큰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 날이 있음을 알아야 할 일,,,
사람은 자신의 무한이 많은 부분이 신비의 여백으로 이루어 져 있다.
그 여백이 빛과 사랑을 보내주고, 웃으며 얘기 한다.
나 여기 기다리고 있다고,,,너무나 감사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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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외부로 의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依持處)과
자신의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歸依處)의
양면성을 가진 존재이다.
햇빛이 있어 그늘이 있고,
뿌리가 있어 나무가 있음을 잊고 산다.
신과 영혼이 있어 사람이 있음이라!
절에 가면 불상에 절을 한다.
사실 알고 보면 자신의 내면불內面佛에 절을 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는 천여년간 불상이 없었다.
나중에 생긴 것 이다.
외부의 부처를 보고, 자아의 본성부처를 잊지 말라고,
불망자성본불不忘自性本佛 하라는 뜻이다.
불교에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귀의三寶歸依가 있다.
부처와 진리와 스님(스승)으로 돌아가겠나이다.
그들이 되겠나이다 라고,
부처나 예수는 예배와 숭배의 대상(의지처)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 속에서 발견해야 할 무상의 보석이 있음이라,
그것은 그들과의 동질성과 잠재 가능성 (귀의처)인 것이다.
이것이 하늘과 그분들이 참으로 원했든 뜻이기도 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놀다가도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울어 버린다.
아이가 크면 전혀 사정은 달라진다.
외부의 부모에 대해 의지하는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간섭하면 불편해 진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의지할 것이 없어지면 두려워하고 당황하게 된다.
자신의 신성을 부인하고 스스로 나약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엘 가고 사찰엘 간다.
그리고 큰 소리로 울부짖고 기도를 한다.
힘없고 나약한 자신 보다 훨씬 힘센 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의지처依持處를 마련해야 조금이나마 안심이 때문이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와 인간을 오도 된 삶으로 인도한
잘못된 종교의 맹점이기도하다.
그들은 죽음을 배우고/ 생명을 잊어버린 존재로,
외부만을 배우고/ 내부를 이어 버린 존재로,
공포와 증오와 슬픔만을 배우고/ 사랑과 평화를 기쁨을 잊어버린 존재로,
환상만을 배우고/ 진실을 잊어버린 존재,
의지처依持處 만을 배우고/ 귀의처歸依處를 잊은 존재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동쪽이 고향인데,
서쪽을 향해 달리고 서쪽을 향해 기도를 한다.
하늘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토록 자신 속에 잠재된
참자기의 힘과 능력을 믿으라고 했거늘,,,
모든 영원한 구원의 해답은 외부의 의지처가 아니라
자성의 귀의처라야 한다고,
남에 의지함은 자신의 생명력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들고 항상 불안을 잉태하게 된다.
진리의 깨달음은 밖에서 안으로 되돌아오는 길이다.
밖으로 아는 노력은 끝이 없는 길이요
허망한 길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에 쌓아 놓은 보석이 진짜 자기 보석이지,
남의 집에 아무리 많은 보석을 쌓여 있은들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외부의 의지처依持處는 영원히 자기가 아닌 남일 뿐이다.
자기가 향하는 곳이 외부의 의지처가 아니라,
내부의 의지처 곧 그곳이 영원한 자기인
자성의 귀의처歸依處가 되어야 한다.
그곳이 육체의 환상 저 넘어, 제한 없는 무한의 자기가 사는 곳,
심심묘묘(深深妙妙/) 소소영영(昭昭靈靈)
무한히 깊고 무한히 신묘하고, 무한히 밝고 무한히 신령하며
제한 없는 자유와 권능의 대 광명처이다.
에고만 빼고 나면, 모두가 하나로 한판위에 있음이라,
제천제불과 모든 하늘이 한판위에 하나로 연동함이라.
자신 밖에 마음 밖에 구함은 없음을 구함이라.
이왕 구하고 기도를 함에는 당연히 최고를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을 최고의 지위에 오려 놓는 것이다.
최고의 하늘과 깨달음과 붓다와 신,
그리고 제한 없는 만능의 마스터 키로,,,
밖으로 의지처를 구하는 자
그들의 처음은 편안할 것이다.
하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꿈속에 살기 때문에 점차 영혼을 상실해 가게 된다.
자주성과 자성 없어진 백치의 인간이 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구해서 만든 거짓 구세주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참된 구세주는 알지 못하고, 적으로 오인 하고 배척하게 된다.
자신 속에 귀의처를 찾는 자
그 처음은 외롭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거칠은 황야에서 그 어디에고 보이지 않는 황금의 금맥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점차 힘을 얻을 것이다.
하늘이 돕는 큰 길이고, 이미 자신 속에 금맥을 안고 있음을
자신의 영혼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 영혼은 하늘에서 큰 자,
하늘에서 자유자재하며 별들을 만든 자이거늘,,,
어이하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은 채,
본성과 고향을 잊고 망각의 꿈속을 헤매는 자 된 것인가,,,
그러나 누구든 그 꿈만 깨면 되는 일,,,
안에서 이루어 진 것이 결국 밖에서도 이루어진다.
근본은 안과 밖은 하나이며 밖은 안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밖으로 그렇게 소망하고 의지하고 싶었든 그 모든 것이
결국 자신의 내면의 투사였음을 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