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한국의 전통문화
[스크랩] korea
후쿠시아
2013. 7. 31. 11:55
이야기 한국 역사 1-1
< 역사의 여명 ~ 초기 국가 성장 >
= 지구의 탄생과 변화 =
1백억 ~ 2백억년 전 : Big Bang으로 은하계 생성
50억년 전 : 태양계 탄생, 지구의 탄생
* 지구의 변화 1.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암석층과 대기권으로 존재하던 지구의 표면에 산, 평야,
강, 호수, 바다 등이 생성
2. 지구의 표면은 비, 바람, 파도에 의해서도 변화
3. 끊임없는 화산 활동
20억년 전 :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하나 이것은 동물도, 식물도 아닌 형태
5억년 전 : 바닷속에 물고기 등장
3억년 전 : 파충류(공룡 포함)의 지구 지배 시기
2억년 전 : 지구 및 한반도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약간의 틀이 잡혀가던 시기
한반도는 서해, 남해가 모두 육지이고 일본과도 육지로 연결
1억년 전 : 포유류가 지배하던 시기로 지구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지고 한반도도 동해,
남해, 서해로 둘러싸이고 일본과도 분리된 모습
2백만년 전 : 빙하기의 시작.199년간 4번의 빙하기와 3번의 간빙기로 북반구는 빙하시대,
남반구는 홍수시대. 지금의 오대양, 육대주가 형성
= 인류의 변화 =
6천만년 전 : 영장류의 조상인 동물 출현
3백만년 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남쪽 사람 원숭이 )
2백만년 전 : 호모 하빌리스( 손쓴 사람 )
150만년 전 : 호모 에렉투스( 곧선 사람 : 자바원인, 하이델베르크원인, 베이징원인)
=>전기 구석기 시대
20만년 전 : 호모 사피엔스( 슬기 사람 : 네안데르탈인 )
1. 타제 석기 사용
2.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처음으로 입기 시작
3. 불 사용
4. 혈연 관계를 이루어 최초의 사회형태
5. 협동의 중요성 인식
6. 복잡해진 언어
=>중기 구석기
4만년 전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슬기슬기 사람 : 크로마뇽인 )
1. 지금의 인간과 거의 비슷한 모습
2. 피부색깔이 달라짐
3. 더욱 정교해진 도구 사용 - 석기, 짐승의 뼈, 힘줄을 이용
4. 남녀의 일 구별
5. 한반도에 3~4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
=>후기 구석기 시대
= 한민족의 역사 =
- 기원전 3천년경 아시아 중부 파미르 고원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고대 동부 아시아족으로 추정
- 인종학상 : 시베리아 족
- 언어학상 : 알타이어 족
- 역사의 첫 무대 : 백두산을 중심으로한 만주와 한반도
- 한반도에는 전기 구석기 시대( 약 70만년 전 )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으나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며 오늘날 한민족의 모체가 된 것은 신석기 시대인 부터이다.
신석기 시대( 기원전 6천년~1천년 경 )
1.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며 각각의 종족은 서로 동화되고 혈통을 융합시켜 오늘날 한민족의
모태가 됨
2. 빗살 무늬 토기사용
3. 농사 : 정착 생활
4. 목축
5. 씨족 공동 사회
6.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청동기 시대
7. 청동기 사용
8. 군장 국가 : 부와 권력을 가진 군장 등장으로 부족 사회 붕괴, 빈부의 차이, 지배,피지배의
관계 형성
9. 고인돌과 신돌 : 세력과 지위를 상징
10. 한반도의 고조선 시대
고조선의 생활
1. 농사와사냥( 대동강 유역 )으로 많은 농기구의 연구와 발전을 가져왔다.
2. 법금 8조 - 최초의 법률
3. 사유재산 인정
4. 화폐 사용
5. 씨족이나 부족의 족장이 지배자로 군림
철기 시대
이미 철기를 사용하던 중국의 연나라에 의해 고조선의 요동이 정벌되면서 고조선에도 철기
문화가 시작된다.
1. 더욱 정교하고 세련된 칼. 창. 농기구
2. 온돌
3. 나무로 기둥을 세운집
4. 중국식의 회색 토기
5. 무덤 : 토광묘, 옹관묘
= 고조선의 역사 =
- 기원전 2333년 고조선 건국 : 단군 신화( P46~P48 )
- 기원전 194년 위만 조선
한의 진개 요동 정벌 -> 춘추전국시대 -> 진나라에의해 통일(기원전 225~221년) -> 한에
의해 다시 통일(기원전 206년) -> 노관의 반역으로 요동땅 공격 -> 위만, 고조선으로 망명
(기원전 195년) -> 왕검성 공격으로 준왕을 몰아냄(기원전 194년)
- 여러 부족 국가 정벌
- 한무제에 의해 고조선 멸망 : 기원전 108년, 우거왕 고조선 땅에 한4군을 설치함.
= 부여 =
- 기원전 1C 송화강 상류 일대에 성립
- 부족 국가에서 초기 연맹 국가로 변화( 고조선에 이어 두번째로 형성된 국가의 형태 )
- 선비족과 고구려 사이에 위치,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왕권유지->중국인에게 온화한
성품으로 보인 원인
- 신분 제도, 형벌 제도 엄격
- 순장 제도
- 영고 : 추수 감사절 축제
- 동부여와 북부여로 나뉨
= 고구려 =
- 기원전 37년 주몽에 의해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에 세워진 나라
- 기백이 있고 전쟁을 즐기는 강한 성품
1. 지형적으로 산세가 험해 농사나 목축보다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
2. 고구려가 세워진 졸본에 이미 있었던 예맥과 손잡고 중국과 끊임없이 충돌
3. 동해안 지방의 동예와 옥저를 정복하며 세력을 키워감 -> 한나라에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
= 진국 -> 삼한 =
- 한강 이남의 땅
- 준왕과 대동강 변에 살던 부족이 모여 이룬 나라
- 북쪽의 유민들의 철기 문화와 진국의 세럭이 합쳐 마한 형성
- 마한 지역에서 밀려난 주민들이 동과 서로 흩어져 진한과 변한을 세움
- 진국에서 삼한으로 나뉘어 불리게 됨
- 삼한의 생활 1. 신지, 읍차가 나라를 다스림 : 정치
2. 천군 : 제사를 주관
3. 농경 사회
= 역사속에 나오는 신화와 인물 이야기 =
1.고조선의 건국 신화
단군 신화의 신화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천부인과 풍백, 우사, 운사등의 부하를 거느리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여자가
된 웅녀(곰)와 결혼하여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이 태어남.
1. 환웅 : 북방 민족인 환웅족
2. 곰과 호랑이 : 태백산 부근에서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종족
3. 곰 ->웅녀 :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던 종족이 멸망하고 곰을 토템으로하던 종족이 남게됨
4. 환웅과 웅녀의 결혼 : 환웅족과 곰 토템 신앙의 종족이 흡수, 통합
5. 단군 왕검에 의한 고조선 건국 : 종족의 통합으로 세력이 강대해진 환웅족이 고조선이라는
국가 형태로 발전
참고 : 단군왕검은 밝달임금과 같은 말로 밝달은 단골 중 가장 으뜸인 사람을 뜻하며 임금은 여러
우두머리 중 가장 으뜸이라는 뜻. 즉, 단군왕검은 고조선 시대 통치자의 명칭으로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절대군주의 의미라고 한다.고조선은 47대까지 이어지며, 3대 가륵 시대에 가림토
라는 문자를 사용, 22대 색불루 때 8금법이 만들어졌다(꼬마 단군 참고)
고조선 이전의 환인, 환웅도 그 시대의 왕의 호칭(한단고기 참고)
2. 부여 금와왕
고조선과 같은 시기에 있었던 부여의 해부루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어느날 곤연이라는 연못
근처의 돌밑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개구리를 닯은 사내아이를 점지 받고 그 아이를 태자로
삼고 이름을 금와라고 지었다. 그후 금와는 동부여의 왕이 되어 후일 고구려를 세우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를 왕비로 삼아 주몽을 키운다.
- 항상 주몽의 이야기와 함께 나오는 이야기
- 곤연 : 부여의 옛터전인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호수. 경박호라고도 부름. 해발 350미터의
높은 곳에 있다고함.
- [고구려 이야기]와[다시쓰는 이야기 한국사] : 유화가 해모수를 만난 얘기를 듣고 유화를
데려와 가두어 .
[연오랑 세오녀] : 유화를 데려와 궁녀로 삼음.
3. 고구려의 주몽
천제의 아들 해모수(북부여의 왕)와 하백의 딸 유화의 아들.부모의 허락없이 결혼한 유화가
쫒겨난 후 동부여의 왕인 금와에게 발견되어 금와왕의 궁전에서 알을 낳았는데 모든 동물이나
새들마저 귀하게 대접한 그 알에서 태어났다. 주몽은 원래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총명하며 무예에도 능해 자신들의 자리에 불안을 느껴 주몽을 해지려는 금와왕의 아들들을
피해 졸본이라는 땅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
4. 주몽의 아들들
- 유리 : 주몽이 동부여를 떠날 때 남겨 두고온 부인이 나은 아들로 어려서는 아비없는 자식
이라는 욕을 먹고 자라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일곱모가 난 돌위에 소나무 밑에 있는 유품을
찾아 주몽을 찾아간다. 동명성왕(주몽)에 이어 유리명왕이 된다.
- 비류와 온조 : 동명성왕이 졸본(솔골)에 와서 낳은 아들들로 그후 온조는 한강(아리수)
남쪽의 기름진 땅인 하남 위례성에 나라를 세우고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인천)에 나라를
세운다.그러나 비류가 죽은후 척박한 미추홀을 떠나 온조의 백성과 합쳐 백제가 탄생한다.
< 생각해 봅시다 >
1. 역사 속에 나오는 신화와 인물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할까?
2.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삼국유사와 같은 설화집에 나오는 건국신화로, 다만 하나의 이야기로만 치부하도록 할것인가?
아니면 숨겨진 역사를 찾는 노력을 보일 것인가?
< 참고 자료 >
- 꼬마 단군 1, 2 ( 산하, 정우상 )
- 고구려 이야기 (창비, 민영 )
- 다시쓰는 이야기 한국사 1 ( 소담, 우리누리 )
- 연오랑 세오녀 ( 산하, 조호상 )
- 어린이 역사 소설 고구려 ( 우리교육, 송언 )
- 만화 한국의 역사 1 ( 대산 )
- 쟁점으로 본 한국사 (푸른 나무, 김육훈 )
- 한단고기 ( 정신세계사, 이일봉 )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자하는
노력과 숨겨진 역사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접근해 보려는 의지와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을것이다. 손쉽게 접근할수 있다는 이유
만으로, 또는 지금까지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안이함으로 역사의 진실을 캐나가는
작업을 게을리 한다면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어른들에게 쉽게 외래 문화에 물드는 아이들을 나무랄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언제나
역사서를 대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 하나, 분명히 존재했었고, 우리 민족의 뿌리이며,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려는 노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점이다.
이야기 한국 역사 1-2
< 고대 삼국 시대의 성립 >
1. 건국 신화
1)고구려 :주몽신화(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 알이 태어났는데 그가 주몽이다.해모수의
아들 금와가 유화를 보호했고 그의 아들이 괴롭히자 친구와 함께 압록강에 이르러 졸본 부여
에서 새나라를 건설 고구려가 된다.)
#유리는 주몽과 예씨 사이에 태어나서 아버지 없이 자라다 18세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일곱 모난 돌위의 소나무 밑에 있는 칼을 갖고 주몽을 찾아간다.
#해명태자:황룡국 선물 활을 받아서 꺽어 버린 죄로 유리왕이 자결을 명한다.그는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지만 이웃과 원한을 맺게한 죄로 창에 몸을 던져 자결하는 비운의
태자가 되어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 낙랑의 최리가 호동을 사위로 삼고 싶어한다. 그를 궁에 초대해서
연회를 베풀고 자신의 딸 낙랑을 소개하고 둘은 서로 좋아하게 된다. 호동의 요청에 따라
자명고의 북을 찢게되고 그 틈을 타서 함락하지만 왕비의 모함으로 대무신왕의 마음이
변하자 자결을 한다.
2)백제 : 온조신화(주몽과 소서노 사이의 온조가 남하하여 한강 주변에 나라를 세우고 백제라
칭한다. 20년간 왕권을 잡고 2대 다루왕에게 왕권이 주어진다.
3)신라 : 박혁거세 신화(사로국 양산촌의 나정 우물에 횐말이 큰 알을 갖고 있었다. 큰 말은
하늘로 사라지고 알을 깨뜨리자 단정한 사내아이가 나왔다.불구내란 이름과 박씨 성을 주고
임금으로 삼게 된다.기원전 57년에 나라를 세우니 계림국이라 부르고 알영을 왕비로 맞아
들인다. 60년 재위 후 다섯도막이 난 몸대로 무덤을 만든다. 아들 남해가 차차웅이 된다.
석탈해에 대한 전설도 알을 낳아서 강에 띄워보내어 노파가 길러 남해의 딸 아니공주와
결혼을 한다. 4대 왕이 된다.
#김알지 : 탈해 이사금이 닭 울음소리를 듣고 가니까 궤짝에 아기가 있었다. 계림이라 하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알지라고 하였다. 신라는 천년간 박, 석, 김이 번갈아 왕이 되고 김씨
임금이 41명이 되었다. 신라는 17애 내물 마립간에 이르러 고대 왕국으로 탈바꿈
%신화를 통해서 고구려, 백제의 밀접한 관계, 국가 성립단계가 백제가 앞섰다.
2. 삼국 시대의 비교
고구려 백제 신라
------------------------------------------------------------------------------
특색 넓은 영토, 여러 민족 온조계,비류계, 박,석,김 번갈아 왕이 됨.
문화적 국제성, 신분이 명확히 구분
왕호 거서관->차차웅->이사금->마립간
관등 *상가,대로,패자,고추가 *6좌평16관등22관부 *화백회의
제도 주부,우태 *행정- 방,군,성지방관 *진평왕-위회부,선부,조부,승부,예부
* 성,촌 - 지방제 파견 *4~5주 설치. 촌,성을 두었다.
* 좌보,우보 - 정치,군사
전성기 5C광개토대왕,장수왕 4C초 근초고왕 법흥왕, 진흥왕
-평양성 고국원왕 살해. - 진흥왕 순수비
불교 372년 소수림왕, 전진 384년 침류왕, 미라난타 527년 법흥왕 이차돈 순교,
신종,원효화엄
미술 *고분 벽화 *금동미륵 반가상 *조화된 아름다움 , 세련, 화려함.
초기;초상,생활상 *연가 천년명금동여래입상 *금관
후기;수호신(사신도) *서울 풍납, 공주,부여, 익산 *기마인물형토기
*벽화고분;쌍영총,무용총 *무녕왕릉 벽돌 무덤(석수) *금동판 삼존청화상
각저총, 강서대묘 *부소산성,벽돌무덤 *금동판 삼존청화상
*무득사지 - 3탑3금당(무왕) *감은사지3층석탑
*군무리 석소여래좌상
3. 고대 삼국의 의의
자주성을 갖고 넓은 국토를 가졌던 고구려의 기상과 묻혀있는 고대사 연구에 더 많은 관심과
연구를 해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삼국이 서로 견제 하면서 다져온 국력이
신라로 인해 통일이 된다. 백제 660년, 고구려668년에 망하고 당의 힘을 빌어서 676년에 통일.
고구려가 통일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고구려, 백제의 발전 >
1) 신대왕때 명림답부, 고국천왕때 을파소의 진대법 실시 백성이 잘 살 수 있게 노력했다.
명재상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힘이 있었다.
2) 동천왕227년 산상왕이 죽고 즉위한다. 요동으로 세력을 넓히고 성왕으로 존경을 받는다.
3) 미천왕 313년 낙랑군 추출, 고국원왕 371년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전사 남하정책, 북진
정책이 실패
4) 광개토왕(391년) 담덕이 왕이 되어 웅대한 포부와 총명함으로 정사를 처리, 광개토왕비는
1880년경에 일본인 군인에게 발견되어 탁본이 있는데 위조되었다는 설이 있다. 충분히
가능하며 일본치하에 있으면서 식민지사관으로 역사를 배웠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 :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가야, 신라를 지배했다는 설.
#광개토대왕비도 위조 되었다면 141자가 없어졌으면 그 내용을 알아내어서 민족이 가졌던
웅대함을 되찾을 수 있다면….
#한사군에 대한 의문점은 낙랑군과 낙랑국의 차이점이 아리송하다
<느낀점>
방대한 고대사700년을 단숨에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왕들의 그 시대의 명확한 자료
들이 없기에 추측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일제 36년간 이루어진 식민지사관으로 작아진
민족의식을 빨리 깨워서 한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21세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도서>
1.역사속의 역사 읽기 : 고석규, 고영진 / 풀빛
2.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 이덕일, 이희근 / 김영사
3.한국 고대사 입문
4.21세기 백과 사전
6. 신라,고구려,백제 이야기/창비
7. 상상하는 한국사 : 김정환 / 푸른숲
이야기 한국 역사 2-1
< 신라의 발전과 화랑 >
- 402년 내물왕의 동생 실성왕이 왕위 계승
-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미해) -> 일본, 복호 -> 고구려로 화친을 명분으로 볼모로 보냄.
마지박 눌지까지 제거하려다 실패
- 417년 눌지왕이 됨(실성왕 제거)
- 눌지왕은 삼량주 태수 박제상에게 볼모로 가 있는 두 동생을 구해 오길 바람
- 박제상은 압록강 건너 국내성에 들어가 복호를 구해옴
- 바로 그 길로 일본으로 향함. 이 때 박제상 부인이 남편을 만나기 위해 바닷가로 달려가나
배는 이미 출발.
- 일본왕을 속이고 미해를 탈출 시킨 뒤 자신은 죽임을 당함
- 남편의 귀국만을 기다리던 박제상의 아내 -> 치술령에서 망부석이 됨
신라의 발전
- 지증왕 순장 금지 : 인간 존중
인간의 노동력 중시
소를 이용 -> 농업 생산력 증가. 경제력 향상
국호 : 신라. 임금 -> 왕
주. 군. 현 -> 지방관 파견 -> 왕이 직접 통치. 왕권강화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
- 법흥왕 불교 공인
- 진흥왕 영토 확장 : 한강유역 차지
진흥왕 순수비 :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고대의
가장 중요한 금석문 -> 신라의 정치, 불교를 연구하는 자료
이차돈의 순교
신라가 차츰 고대 국가로서의 틀을 갖추어가며 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체제가 확립되면서 왕에
대한 충성이 강조 되었다. 이 때 들어온 종교가 불교이며 불교의 교리에 왕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임금이 불교를 공인하려하나 토착 귀족 세력의 힘에
부딪치게 된다.이차돈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불법을 펴는 일에 목숨을 바침.이차돈은 죽기전에
불법에 영험이 있다면 신이 죽은 후 반드시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 한다.이윽고 목을 베자
흰피가 높이 솟아 올랐다. 이로써 신라에서는 법으로 불교를 공인하였고 불교 입장에서도 중국
에서 들여온 불교책에서는 이차돈을 신비화 시켰다.
신라의 가야 정벌
- 법흥왕(532)19년 -> 금관가야 정복.
- 진흥왕562년 -> 가야 정벌 (이사부)
- 가야는 낙동강 유역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국가들로서 삼국에 뒤지지않는 문화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연맹체의 형태로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채 신라에 의해 사라
지고 말았다.
화랑도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청소년들의 결사체 화랑도는 15~18세의
청소년들이 3년동안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무예, 지리를 익히고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길렀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고 도의를 닦았다. 원광의 세속오계도 충과 신을 강조한 도의로써 화랑은 무엇
보다 명예를 중시하여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한다.
고구려 = 경당
중국의 연표
- 기원전 1766~1122년 ;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의 통치기
- 기원전 1122~256년 : 주
- 기원전 770년 ; 춘추 전국 시대 시작
- 기원전 221~206년 ;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 “진” - 만리장성
- 기원전202~서기220 ; 한. 비단길로 유럽과 교역
- 서기 220~280년 ; 위. 촉. 오 3국 분열 -> 진 통일
- 서기 304~439년 ; 북중국 5호 16국
- 서기 317~589년 ; 남북조
- 서기 581~618년 ; 수
- 서기 618~907년 ; 당
수 ; 581년 양견은 지금의 화중.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중국 통일제국을 이룩
수의 고구려 침투
- 1차 590년 수문제가 중국을 통일 후 고구려 위협->고구려가 요서지방 선제공격->수문제의
자존심을 건드림.
결과 ; 육군 -> 홍수로 군량을 운반하지 못해 군사들이 전사
해군 -> 풍랑으로 이후 10년간 평화 유지
- 2차 612년 수양제는 고구려를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 -> 100만 대군으로 침입 ->을지
문덕의 거짓 항복과 유인 작전으로 수의 군대를 살수에서 크게 무찔러 이김 -> 우중문에게
보낸 오언시
- 3차 613년 수양제가 직접 최신 무기로 침입
후방에서 전쟁으로 인한 민심이 극도로 악화. 반란이 일어나 결국 후퇴
- 4차 614년 고구려의 강화요청과 수나라의 내분상태에서 양제 철수
결과
수 ; 4차례의 전쟁으로 인명과 물자의 손실. 민심이 흩어져 반란으로 당에 의해 멸망
고구려 ; 국위를 떨칠 수 있었으나 수와 마찬가지로 손실이 막대해짐.
신라와의 국경수비가 소홀한 틈을 타 신라의 영토 확장에 좋은 기회를 줌.
천리장성
당은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화해 분위기 였으나 628년 중국을 통일하고 주변 세력을 흡수
하면서 고구려에 대해서도 지난날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경관’을 헐어
버리라 압력을 가한다. 이에 고구려는 631년부터 16년간 부여성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아 당의 침입에 대비함.이 공사의 감독으로 연개소문이 임명되나 포악한 그를 비밀
리에 내치기 위한 계획이었으나 이에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며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
울보공주와 바보 온달
- 평원왕에게는 울보 공주가 있었는데 임금은 늘 농담으로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 함.
마침내 공주는 궁궐을 나와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서 글과 무예를 가르쳐 고구려의 용맹스런
장수가 됨.
- 설화 속에 담긴 고구려 사회의 모습
고구려는 북쪽의 중국과 신라. 백제의 공격으로 군인들의 신분이 강조되던 시기이므로 평민
들이 무예를 익혀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벼슬을 얻어 신분 상승의 계기가 되었다라고 추측.
이 설화에 나오는 온달 역시 그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으며 조상 대대로 권력을 누려온
귀족들은 그런 계층을 곱게 볼리 없으므로 바보 온달이라 빈정댔을 것이다.
신라의 3가지 보물
- 황룡사 장륙삼존금불상(불상 높이 5m) 인도의 아소카왕이 보낸 책과 황금
9층목탑 : 자장이 당에 유학하고 있을 때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어진다고 해서
세움 -> 호국불교
- 진평왕 옥대 : 하늘에서 하사받은 옥으로 만든 허리띠
왕권을 하늘에서 내린 것이란 뜻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냄.
슬기로운 여왕
선덕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여왕의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이는 그 당시 성골 신분의 남자가
없었기에 왕위에 오른 여왕이기에 여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바꾸려하는 의도에서 생긴
일이다. 그녀가 왕으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음을 보여 주려함이다.
2000년 3월 21일자 신문에 일본 교과서 왜곡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기사를 보았다.한일 교육부
장관 회담에서 한국의 입장을 일본 교과서의 한국사 왜곡 문제를 거론하려는 방침이었으나
일본측의 요구에 의해 공식 의제로 조차 채택하지도 못했다 한다.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한 나라의 역사는 그 민족의 기본 뿌리이고 정신인데 왜곡되고 한국을 경시하는 역사를
배운 그들이 과연 세계 무대에서 우리 한국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하루속히 교과서 왜곡
부분에 대해 수정을 촉구해야 한다. 이에 앞서 우리의 역사에서도 나타나는 모화사상과 식민지
사관으로 잘못 인식된 역사부터 바로 잡아 고조선 시대와 고구려 시대에서도 정확한 우리의
영토를 찾는 노력을 해 자라는 우리 자녀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의 문화가 없는 이 시대에 신라의 화랑이나 고구려의 경당과 같은 기능을 하는 제도가
부활 한다면 그들에게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참고 자료
- 백제 고구려 신라 이야기
-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 백과사전
이야기 한국 역사 2-2
1. 백제의 마지막 항전( P. 87 )
2. 방탕한 의자왕 ( P. 124 )
3. 백제의 5천 결사대 ( P. 129 )
4. 백제의 마지막 불꽃 ( P. 139 )
의자왕 : 백제의 마지막 임금. ‘해동증자’로 불리며, 초기에는 주와 군을 순찰하면서 살인자를
제외한 모든 죄수들을 석방한 어진 임금이었다.즉위 2년 만에 대야성(합천) 싸움에서 승리하며
싸움마다 연전연승한다. 또 부여성충과 부여윤충 같은 충신이 옆에 있었다.차차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사치와 부패에 물들기 시작한다. 태자궁을 호화롭게 짓고, 궁녀들과 술잔치를 벌이며
생활한다.
대야성 전투( 642년 )
백제와 신라를 잇는 교통요지로, 40여 성읍을 관할하는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큰 곳. 도독은
김품석(김춘추 사위), 백제 공격군 선봉은 부여윤충(성충의 동생).백제 승리(김품석 부부 살해)
부여성충과 연개소문과의 비밀동맹(역할 분담)
“백제가 신라와 싸우게 되면 고구려는 당을 쳐서 당이 신라를 구하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가
당과 싸우면 백제가 신라를 쳐서 신라가 당나라를 돕지 못하게 하자”
변수 : 1) 당이 고구려 공격에서 패하자 신라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백제 공격
2) 의자왕의 방탕
3) 김유신의 계략(백제의 좌평 ‘임자’와 내통하여 백제의 실상을 파악, 의자왕에게 무당
금화를 천거하게 함) -> 성충의 죽음, 윤충이 전쟁에서 활약하지만 화병으로 죽음
백제가 망한 이유는?
표면적인 이유는 의자왕의 타락과 신하들의 무능 때문이지만,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사상을 버리고 외래사상에 전적으로 의존하려 했던 일부 지배층의 지나친 욕망때문이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인간의 근본 이상과 일치하는 뛰어난 사상을 갖추고 있었지만, 왕족을
비롯한 소수층은 자신들의 권력독점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언가 다른 사상이 필요했다. 백제
불교는 미륵불로 현재의 왕과 동일시하고 많이 의존하였다.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두산동아/박현)
백제의 부흥운동
1) 부여복신(백제 무왕의 조카)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풍이 복신을
살해함 -> 백강전투 대패(분열과 사기 저하)
2) 임존성의 성주 지수진과 흑치상지(웅진도독부의 부여융에게 투항)
3)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과 대결하고 있어서 원병을 보낼 여유가 없었지만, 왜는 주류성 앞
바다에 왜선 1척을 보내었다.=>’신라’가 당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것은 - 독립적인
속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 백제 부흥군의 덕이었다.
1.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 P. 93 )
2. 철벽의 요새 안시성 ( P. 98 )
3. 새야 새야 무당새야 ( P. 101 )
4. 고구려의 집안 싸움 ( P. 150 )
5. 불타는 평양성 ( P. 153 )
당의 고구려 침략
1. ‘수’에 신라, 백제 모두 고구려 공격을 부탁하였지만, 고구려에 패함
2. ‘당’이 들어서자 신라는 621년 삼국 중 제일 먼저 조공하며, 4년 뒤에 조공하는 길을 고구려가
막고 있다고 당에 호소한다. ( 당나라가 한반도의 삼국 문제에 간섭하게 된 시초)(P.71)
3. ‘당’이 신라를 선택한 이유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백제 무왕이 원정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백제보다 약소국 신라를 지원하면 평정 후에 정세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안시성 전투 ( 645년, 보장왕 4 ) :
당나라 태종이 지휘하는 군대가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3개월 가량 안시성을 포위, 공격
했으나 끈질긴 항전으로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가 승리한 싸움.개모성,비사성,백암성이 차례로
함락되었지만 안시성은 끝까지 저항하였다. 당태종은 직접 평양을 공격하려 했지만,이세적과
손자 무기가 보급로 차단과 고구려군의 역공이 있을 수 있다고 건의해 안시성을 끝까지 공격
하였다. 당 군은 흙산을 쌓아 공격하려 했지만, 고구려군이 점령하였다.
고구려의 내분
영류왕 건무 -> 북수남진 주장
을지문덕 -> 북진 주장
연개소문 -> 북진 주장 => 영류왕과 군신의 눈 밖에 난다.
=> 영류왕의 아우 대양왕의 아들 장을
보장왕으로 삼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된다.
=> 보장왕 25년 연개소문 죽음
=> 집안 다툼으로 내분, 나.당 연합군의 공격
=> 고구려 멸망(시조 동명성왕부터 28대, 705년)
1. 김춘추의 꾀(p.89)
2. 삼국통일의 주역 두 사람(p.107)
3. 비단 옷감으로 산 꿈(p.111)
4. 신라의 꽃 비령자(p.115)
5. 김춘추의 목숨을 구한 온군해(p.120) 6. 김춘추의 친당외교(p.127)
7. 반굴과 관창의 용기(p.133)
8. 신라의 굴욕(p.144)
9. 당나라에 맞서는 신라(p.157)
10. 아들을 버린 아버지(p.180)
백제와 신라 사이가 멀어진 이유는?
1)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빼앗은 사건(나제동맹이 깨짐)으로 554년 백제 성왕이 전사한 사건이
발생; 동맴관계에 있다가 일방적으로 한쪽이 깨어 버렸고, 그 와중에 일국의 왕이 전사하는
비극(갈등양상=>보복양상)
2)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사건; 김춘추
(무열왕)의 개인적인 원한+문무왕의 왜곡된 백제관(누이가 죽은데 대한 복수)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
김유신(증조부 : 금관가야 구해왕, 부:대량주도독 서현, 모: 지증왕의 증손녀 숙흘종의 딸 만명,
처: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부인, 자: 원술)
김춘추(김유신의 누이동생과 결혼 -> 태종 무열왕)
=>김유신은 김춘추의 처남.매부이자, 사위. 장인의 관계
김춘추의 외교
대야성 전투에서 딸과 사위의 죽음에 대한 원한과 성골 출신왕의 계보가 무너지면서 극심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백제가 신라를 자주 침략하므로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가나 실패.
다시 당으로 건너가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당고종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므로 스스로
속국임을 인정)
신라의 입장
1. 만약 신라가 중국과 대등한 관계였다면 언제라도 잃은 땅을 되찾을 수 있는 일이었다.하지만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고구려의 거대한 영토 뿐아니라 대외관계 측면에서
신라는 중국의 속국(지방)에 불과했다.
2. 법흥왕(521년), 신라는 백제 사신을 따라 양에 조공을 바친다.<양서> 동이열전에는 ‘신라어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신라는 <양서>에 처음으로 중국 문헌에 등장)
3. 중국과의 교류를 절실히 원했지만 중국으로 가는 길을 백제가 가로막고 있었고, (바다길로?
백제수군은 동아시아 최정예) 485년부터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기에 있게 되므로 신라가
굳이 중국과 통교할 필요가 없었다.
4.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비극적인 삼국통일과 1500년
사대 관계가 싹 트게 된다.(다른 측면: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 동아시아를
통일하고 중국 중심의 고대국가질서를 확립한 사건이었다.)
(상식밖의 한국사/남경태 저/새길 출판사)
고구려가 망하여 발해가 되고, 백제가 망하여 신라에 합하였으니 삼국이 합하여 양국이 되었다.
그후 발해가 망하여 압록강 서쪽의 땅은 거란,몽고 등 다른 민족에게 넘겨 준 바 되었으니 900
년 간 이어온 고구려의 영토가 상실되고야 말았다. 슬프다! 고려 태조가 우리나라를 통일하고
조선의 개국으로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 통일은 반쪽의 통일이요,전체적인 통일
은 아니다. 만일 이러한 반쪽 통일을 말한다면 동명성왕도 역시 통일이요, 온조 혁거세도 역시
통일이니 하필 김춘추 이후에 통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체적인 통일은 단군이래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어찌 김춘추를 통일한 자라 일컬으리오. (신채호, <독사신론> )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 본다는 것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의미이며,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가 고구려를 통합하여 민족을 통일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쟁점으로 본 한국사/ 박현)
당나라의 야심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 신라에는 계림도독부 설치 -> 부여융과
유인궤, 문무왕의 화친의식=>백제도 속국화, 신라는 스스로 속국 인정-> 신라는 안으로 힘을
한데 뭉쳐 당을 몰아내려 하고, 당은 한반도를 독차지하려 했으므로 두 나라는 항상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 P. 159)
연도 7C 무렵의 한반도
===============================================
551년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589년 수에 의한 중국의 통일
612년 고구려와 수의 대결전, 살수대첩
641년 백제의 대공세(신라의 대야성 등 40여 성 점령)
645년 당의 고구려 침략, 안시성 승리
648년 김춘추가 당에 건너감, 나.당 간의 동맹 형성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멸망
676년 신라의 당군 축출, 삼국통일의 완성
698년 발해의 건국
이야기 한국 역사 3-1
< 삼국의 사회와 문화 >
= 삼국의 문화 =
1. 고구려
* 문화적 배경 - 영혼은 살아있다. - 무덤(궁궐, 가옥)
도읍지 - 졸본(압록~동가) - 국내성(압록강) -
평양성(대동강) - 기름지고 기후온화
선진대륙문화 - 중국과 대등한 위치
* 문화의 내용 - 호쾌, 웅대함 - 진취적기상 - 귀족적 - 불교적
* 근거 - 무덤과 벽화 - 4~5C - 안악3호 덕흥리 - 주인의 초상 - 신격화 삼각구도, 경직, 근엄
5~6C - 수렵도 - 북방민족의 기상
- 씨름 - 전통적 힘겨루기 - 이국인의 모습
- 춤추는 모습 - 진취적 기상
- 생활인의 모습 - 지배의식 변화 - 지배, 자신감
* 학문 - 태학 - 유학 경당
* 불교 - 소수림왕 - 광개토왕
2. 백제
* 문화적배경 - 도읍지 - 위례성 - 웅진 - 사비 - 조용,평화
주변국과의 관계 - 중국, 일본과 우호 - 일본문화의 밑거름
문화의 내용 - 온화, 우아 - 친근함 - 부드러움
불교장려 - 불교미술 - 건축물(목조, 균형미) - 미륵사지탑, 정림사지탑
불상(온화한 미소) - 마애삼존불, 금동보살입상
무덤 - 3~5C -고구려의 영향
5~6C - 돌무덤
무녕왕릉 - 돌방무덤(석실무덤). 남조의 영향
학문 - 오경박사, 의학박사, 천문학
* 외교관계 - 백제와 일본 - 정치적 친화 관계 - 아스카문화
3. 신라
* 문화의 내용 - 문화적배경 - 정월, 설, 대보름 - 토착신앙
도읍지 - 서라벌 - 경주 정교, 섬세
근거 - 무덤 - 돌무지무덤 - 도굴않됨, 벽화없음, 관파괴 덧널무덤 금관총, 서봉총
* 학문 - 이두문자 - 향가 - 국학 독서삼품과
* 불교 - 석가족화
고구려의 묵호자 - 호국불교
불교의 내용 - 온화한 미소 - 친근감 - 피정복인의 고통구원 - 마애불
귀족 + 왕권 - 미륵불교 - 귀족상징
원시불교, 전륭성왕사상 - 정법에 따른 정치 - 부처님은덕 - 왕권발전
1.삼국의 문화 - 중앙집권 - 문화의 발달
- 영토 싸움 - (기후, 풍습의 차이) - 문화의 차이
2.삼국의 불교 - 불교를 적극 후원 (부족국가 ->보편성, 객관적 관념체계
국가가 불교 공인 - 사회 질서를 유지 왕 중심의 지배 체제 귀족 수용
계급의 당연시 - 서민(백성) - 현세의 삶(전생의 업)
- 귀족, 왕 - 전생의 덕
= 삼국의 계급 =
1.관리제도
* 고구려 - 12등급 법률이 엄격
* 백제 - 16등급 22개의 담로 - 왕국이 다스림
* 신라 - 17관등 상대등 - 귀족대표
2. 계층구조
* 귀족 - 신라6부 백제 5부 고구려 5부 토지, 벼슬 권력
* 평민 - 장사, 세금, 부역
* 노예 - 잡역 - 상품성
% 고대사회
* <귀족의 독점> - 생산수단, 생산결실
민중의 노예화(전쟁->귀족의 부, 집권욕),
토지의 황폐화
(민중의 의식변화 : ‘려’ ‘우경’의 보급, 생산력 증가)
- 인신적 지배 -> 토지를 매개로한 인간지배, 생산물 수탈
=> 봉건제 성립
* 순장제도가 사라지고, 민중의 사회적 지위 상승
< 남북국시대 >
1. 신라
1) 왜구와의 관계
2) 피리
3) 고구려인의 강제 이주
* 외부적 상황
- 사라센세력의 확대
- 당나라 - 탈라스전투
안녹산의 난
4) 통일후의 귀족 <--> 백성 궁핍(세금, 부역) -- 사치(지방호족세력의 강화)
5) 통일신라후의 종교
(호국불교) - 양지. 원효대사. 보덕. 의상대사. 부궤화상. 혜공스님
극락이 현세에 있다. 곧, 신라땅이 극락이다.
(신라 - 불국토설 -> 귀족왕실을 위한 불교) (불국사)
석불 (조화로움, 이상미) 신분의 존엄성
석가탑 안정, 균형
(권위의 상징) - 특정귀족의 모습
@ 백성(업보로 신음)
사회 신분의 역할을 합리화.
- 귀족을 유지.
- 민중을 효율적으로 통치.
- 민중의 자각을 막음
@ 김대성 - 불국사
2. 발해 <- 고구려 땅의 새기운(고구려 부흥운동)
1) 당 - 고구려 도독부
2) 강제이주(669년 3만8천가구) ->몽골 -> 세금징수, 기아, 흉년
3) 배경 (당의 영주 반란) -> 말갈족 고구려 유민의 자극
4) 발해건국
->압록강 상류. 만주지방
->진나라 (왕조영 : 대조영)
위치 : 길림성 돈화현 부근(천연 요새. 철. 출중한 인물)
* 외교 : 돌궐과 화친
713 발해 ( 발해군왕 홀한주도독)
719 무왕 (무역활발)
-> 중국과 문제 (발해독 자연호)
문왕
732 신라 + 당 / 발해 + 일본 (이이제이 정책)
근거 : 신라고기. 구당서. 일본서기
한국사이야기4 (p 80)
발해사에 대한 여러가지 측면
한국사 새로보기 ( p 165 ~ 170 )
이야기 한국 역사 3-2
- 신라의 동요
- 후삼국 시대
신라
* 신라의 전성기 : 중대(태종 무열왕 ~ 혜공왕) 신문왕 ~ 경덕왕
* 학문 : 불교 유학
* 유학의 인물 : 강수, 설총, 김대문, 최치원 등
* 관리 제도 : 왕 상대등(화백회의의 의장) 시중
* 행정 구역 : 9주5소경과 9서당
- 9주 : 나라를 나눈 행정구획
- 5소경 : 5개의 도성으로 직할시와 비슷한 역할
경주로 통하는 요충지 - 서원경, 금관경, 남원경, 중원경, 북원경
- 9서당 : 국방, 치안 유지의 경찰 임무
* 불교 < 교종 > < 선종 >
* 전통적 불교 종파
* 화엄종
* 불경 연구가 목적 - 교학불교
*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
- 왕즉불의 사상, 윤회 사상
* 왕실 불교, 귀족 불교
- 귀족 신분 옹호
*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
* 어려운 이론에만 치중
* 교종의 폐단에 대한 반발
* 7C 한반도에 전래
* 자기 수양이 중심
- 문자에 구속되기를 거부
- 개인주의적 경향
* 호족들이 선호
- 중앙집권에 반대하던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 됨
* 호족들의 근거지인 지방에서 발전
* 신라 사회의 붕괴와 새로운 단계로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 녹읍, 식읍 제도
- 녹읍 : 국민의 세금중에서 일부를 녹봉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녹읍을 지닌 관리에게는 그 지방에 대한 행정권이 없다.
- 식읍 : 공로에 대한 보상
그 지방의 세금, 특산물을 직접 받는 것
1대로 끝나며 세습권이 주어지지 않음
- 녹읍, 식읍 제도 -> 연봉, 월봉 -> 녹읍 제도(경덕왕 16, 757년)
- 연봉, 월봉의 의미 : 1. 토지 독점의 폐해 방지
2. 지방 호족의 군림, 횡포 봉쇄
왕위 계승으로 본 신라
36대, 혜공왕 (765~780)
* 8세에 왕에 즉위, 어머니 만월 부인이 섭정.
* 왕, 만월부인, 김대공일파와 김양상, 김만종등의 귀족들이 대립
* 김대공 : 만월 부인의 일가, 벼슬 ; 일길찬
김춘추의 후손
* 김양상 : 내물왕의 10대손
김대공 일파 제거
김융(대아찬), 김은거(이찬), 김정문(시중) 반란 제거
김지정의 난 - 만월 부인과 내통하던 인물이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만월부인과 혜공왕을 살해.
김양상이 제거
37대, 선덕왕 (780~785)
* 김양상 - 김경신에 의해서 추대되어 왕위에 오름
* 김춘추 자손의 왕위 계승이 끝남
38대, 원성왕 (785~798)
* 김경신 - 내물왕의 12대손
* 북천제사 - 북천 개울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 비가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게 되어 신하들이 화백회의에서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
* 김주원 : 선덕왕의 조카, 태종 무열왕의 6대손,
선덕왕의 왕비 구족부인이 왕으로 추대하려던 인물.
* 제도 1. 무력 학문중심 (오랜 평화 시대)
2. 독서 삼품과 : 상품, 중품, 하품으로 나누어 관리 등용.
3. 철저한 귀족 중심의 사회 - 골품제도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남.
평민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
39대, 소성왕 (799~800)
* 원성왕의 큰 아들 인겸의 아들.
* 재위 2년 만에 사망
40대, 애장왕 (800~809)
* 소성왕의 원자로 13세에 즉위, 작은 아버지 상대등 김언승이 섭정.
* 802년(즉위 3년) 죽었다 살아난 사건 후 해인사 건축.
- 염라대왕이 불교를 소홀히함을 질책하여 살아난 후 불사를 일으킴.
- 왕비의 등창을 승려인 순응과 이정이 치료, 이의 보답으로 해인사를
짓는 불사를 일으켜 절에 보시.- 민중의 고통이 더욱 가중.
* 개혁 정치 예) 불교 보시, 녹읍 제도 실패
김언승에 의해 주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
41대, 헌덕왕 (809~826)
* 김언승 -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름.
* 애장왕대의 개혁 정치 계속.
* 김헌창의 난 (재위 14년) - 토별대 파견, 승리했으나 국력약화의 심화.
* 당나라 구원병 파견 -> 국력 약화
* 지방 호족 세력의 등장.
42대, 흥덕왕 (826~836)
* 헌덕왕의 동생
* 장보고에게 청해진을 설치하게 함.
* 왕위를 계승할 왕자 없이 사망.
43대, 희강왕 (836~838)
* 흥덕왕 당시 상대등인 김균정의 조카 - 김제융
* 김균정과 왕위 다툼 싸움 끝에 김균정이 죽고, 희강왕에 즉위
* 자신을 추대한 김명을 상대등으로 임명하나 그의 반란으로 자진.
44대, 민애왕 (838~839)
* 김제융을 추대해 희강왕이 되도록 도왔던 인물로 후일 반역 - 김명
* 김균정 계에게 도전을 받고 재위 1년만에 병사들에게 살해됨.
45대, 신무왕 (839)
* 839년 4월에 즉위, 7개월만에 사망.
* 김균정의 아들, 희강왕 때 아버지 김균정이 김제융에게 패하고
죽은 후 아내와 아들 경응을 데리고 도망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의탁.
* 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름.
46대, 문성왕 (839~857)
* 경응 - 신무왕(우징)의 아들.
* 장보고의 딸 난화와 정혼했던 사이, 신하들의 반대를 이유로 왕비로 맞지 않음.
* 장보고의 반란 - 염장에 의해 진압. - 장보고를 속여 죽임.
* 신의를 저버린 왕
47대, 헌안왕 (857~861)
* 신무왕의 이복 동생
* 슬하에 딸만 둘이 있어 사위에게 왕위 계승.
* 궁예의 아버지로 알려진 임금.
48대, 경문왕 (861~875)
* 할아버지가 희강왕
* 헌안왕의 두 딸을 모두 왕비로 삼음.
* 정치에 열의를 가졌으나 뿌리 깊은 진골 귀족간의 분쟁을 바로 잡지 못함.
* 866년, 김윤홍, 숙홍 형제의 반란 - 일족 몰살
* 868년, 김예, 김현의 반란
* 874년, 근종의 모반 - 거열형
49대, 헌강왕 (875~886)
* 처용가
* 879년 신흥의 반란
50대, 정강왕 (886~887)
* 887년, 이찬 김요의 난
51대, 진성여왕 (887~897)
* 헌강왕과 정강왕의 누이.
* 나라일을 돌보지 않고 젊은 화랑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
* 재위 2년(888년) 2월, 대구화상이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만듬
* 백성들의 생활 - 유랑민, 거지로 전락
* 재위 3년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 - 농민 전쟁의 시작
52대, 효공왕 (897~912)
* 헌강왕의 서자.
비 : 이찬 예겸의 딸
53대, 신덕왕 (912~917)
* 이찬 예겸의 아들
* 실제 다스리는 지역이 경주로 한정될 정도로 국력이 약화된 시기.
* 국토의 대부분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속함.
54대, 경명왕 (917~924)
* 신덕왕의 아들
* 918년, 현승의 난 - 신라의 몰락 재촉
* 궁예 피살되고 왕건이 추대된 시기.
55대, 경애왕 (924~927)
* 신덕왕의 둘째 아들
* 927년, 포석정에서 견훤의 공격을 받고 자살.
56대, 경순왕 (927~935)
* 문성왕의 6대손 - 김부
*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름
* 고려에 항복 - 스스로 왕건의 신하가 됨
* 마의 태자 -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
인물로 본 신라
장보고
* 본명 : 궁복
* 당나라의 행패와 방관하는 조정에 대한 불만, 미천한 신분의 한계->당으로 건너감->당의
군대에서 무녕군 소장 벼슬(중간 지휘자) -> 헌덕왕 때 귀족들의 반대로 신라의 장군이 될
수 없었음 -> 흥덕왕 때 신라로 돌아와 3개의 군진 중 청해진의 대사로 임명 -> 이름을
장보고로 고침 -> 우징과 아내,아들 경응 보호 -> 때를 기다리던 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제거하고 우징의 신무왕 즉위를 도움 (딸 난화가 왕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 신분 상승)
-> 감의 군사(공로에 대한 보상이었으나 신라의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우를
못받음) ->청해진으로 돌아옴 -> 난화를 태자비로 삼겠다는 신무왕이 약속을 못 지키고
일찍 죽음 -> 문성왕 (난화와 정혼했던 사이)이 귀족들의 반대로 다시 장보고와의 약속을
어김 -> 장보고의 귀족에 대한 분노, 반란 -> 염장에 의해서 살해됨
* 장보고의 의의
- 해양 활동과 무역 활동으로 국위 선양
- 평민의 지위를 향상시켜 낮은 신분층에 활력
* 장보고의 죽음
- 귀족과 평민의 세력 다툼에서 평민의 패배
처용랑
* 49대, 헌강왕대의 용왕의 아들.헌강왕이 개운포에서 용왕에게 절(망해사 or 신방사)을 지어
주기로 약속하자 용왕이 일곱 아들 중 하나인 처용을 데려 가도록 한다.왕은 처용에게 벼슬과
아내를 내려 주며,처용은 화랑들과 어울려 산천을 돌며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진다.
어느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다른 사내와 있었으나 이를 죽이지 않고 자신이 떠나기로
결심하고 노래와 춤을 추자 사내가 나와 용서를 빈다.그는 역신으로 앞으로 처용의 얼굴
그림만 보아도 비켜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라진다. 그 후 신라에는 병을 예방하기 위해
처용의 얼굴 그림을 집에다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 처용은 아랍인?
1. 신라 시대에 아리비아 상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
- <고려사>에 고려 초기 아라비아 상인의 활동 서술
헌강왕 재위와 고려 건국은 약 30년의 차이 밖에 없으므로 신라 시대에도 아라비아인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
- 신라국에 들어간 아라비아인은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대부분이 정착했다.
2. 경주 괘릉의 무인석
- 신라인과 다른 이방인의 모습.우람한 체격,높은 코,파마를 한듯한 텩수염, 곱슬 머리 등
3. 개운포(울산)는 신라 최대의 국제 무역항
* 처용랑은 지방 호족의 자제?
- 울산 출신 호족의 아들. 취약한 왕권 강화를 위해 지방 호족의 아들 포섭
최치원
* 헌강왕 1년(857년~?) 출생
* 한국 최초의 유학 사상가
* 문성왕 시절 경주 근처의 한 고을의 사또 부인이 멧돼지의 아이를 낳는다.남편이 그 아이를
강물에 띄워 버렸으나 빨래하던 할머니에 의해 구출되는데 그 아이가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이라고 전해진다.
* 12세에 당에 유학 -> 18세에 당의 과거(빈공과)에 급제
* 당에서 율수현위의 벼슬을 지낸 후 회남 땅에 머무르던 중 황소의 난을 글(토격황소문)로써
토벌
* 29세에 신라로 돌아와 시독겸 한림 학사수병부 시랑 지서 서감의 직책을 맡음
* 진성왕 때 <시무책>을 올려 개혁의 시급함을 알리나 외면 당함
* 귀족 사회의 신분 제도 반대
* 질서속의 개혁 주장 - 농민 봉기 부정
* 신라 조정에 회의를 느끼고 산천으로 떠돌다 말년에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감
* 저서 : <계원필경>20권, <중산복궤집>5권, <난랑비서문>, <화랑세기>
인물로 본 후삼국 통일
견훤(진훤)
* 신라 사벌주(경북 상주시) 가은현, 아자개의 다섯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남.
*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15세 때 성을 '진'으로 바꾸고 왕경에서 군에 입대 -> 비장
* 신라 조정의 부패를 보고 군사를 모으기 시작 - 도둑떼와 유랑민
* 진성여왕 6년(892년), 완산주(전북 전주시) 함락 -> 무진주(광주) 함락
* 효공왕 4년(900년) 완산주에서 왕위에 오름 -> 후백제 건국
의자왕의 묵은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백제 유민의 의식,반신라적 분위기를 이용
* 935년 3월 맏아들 신검이 왕위 찬탈
- 견훤이 첩에게서 나은 아들(금강)에게 왕위를 계승할 것을 경계
* 금산사에 유폐
1. 말년의 견훤 의지력 약화
2. 신라 제도와 의식을 그대로 사용, 독자적 연호도 만들지 않음
- 백제 유민의 정서와 상반된 모습
3. 고려에게 계속 밀리는 추세
4. 금강의 나이가 어림 - 강력한 왕권 행사가 어려우리라는 추측
5. 개혁 정책 시행으로 골품제에 따른 귀족 사회의 권력과 재부의 독점을 막기를 바라는
진보파와 달리 견훤쪽의 보수 세력은 개혁의 의지가 없었다.
* 금산사에서 탈출, 고려에 귀순
* 전쟁터인 황산에서 등창으로 사망
궁예
* 신라 헌안왕(or 경문왕)과 후궁 사이의 왕자, 5월 5일에 출생
* 나라에 해가 되는 인물이라는 일관의 말을 듣고 왕이 죽이도록 명하나 유모가 몰래 아기를
키운다. 신하가 아기를 다락 밑으로 던질 때 유모가 받으며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
눈이 되었다고 한다.
* 세달사의 승려(법명-선종) - 무술연마(신라 왕실에 대한 증오심)
* 진성여왕 5년(891년) 기훤에게 의탁
* 진성여왕 6년(892년) 양길에게 의탁
* 진성여왕 9년(895년) 첫 전투
* 신라 북부와 한강 유역의 땅 차지
* 송악의 유력한 세력인 왕륭과 아들 왕건이 귀순
* 효공왕 5년(901년) 후고구려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됨, 도읍 : 송악
* 효공왕 8년(904년) 국호 : 마진 연호 : 무태
* 효공왕 9년(905년) 도읍 : 송악 -> 철원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왕륭 등과 같은 호족세력을 받아 들여서 세워진 나라.
그러므로 지방자치를 원하는 호족들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하기 위해 천도.호족세력의 실세인
왕건과 반목
* 911년 국호 : 태봉 연호 : 수덕만세
* 초기에는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 하고 상벌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등 민중으로
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했으며 포악한 성격과 신라 왕들 못지 않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어감.
* 재위 18년(918년) 6월 왕건과 신하들 반란
- 궁예의 폭정. 궁예가 중앙 집권으로 그들을 누르려 하자 그들(호족세력)의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 도망 쳤으나 시골 농부에게 맞아 죽었다고 함.
왕건
* 877년 송악의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남.
* 918년 6월 15일 왕으로 즉위 국호 : 고려 연호 : 천수 도읍 : 송악
* 견훤이 고려를 치기 위해 먼저 신라를 공격, 신라는 이찬 김율을 고려에 보내 도움을 요청
-> 후백제 후퇴
* 924년 7월 견훤이 고려의 조물성(경북 김천시) 침공
-> 서로에게 볼모를 보내기로 하고 화친
* 926년 4월 - 14대 애왕 26년에 발해가 멸망하여 그 유민을 모두 받아들여 세력 강화
* 볼모인 견훤의 조카 진호가 병사 -> 조카의 죽음을 의심하여 볼모인 왕건의 6촌 동생을
살해 -> 다시 고려 침략 -> 후백제 패배
* 927년 11월(신라 경애왕 4년) 후백제가 신라 침공 -> 경애왕 자결
* 신라의 왕족 김부를 왕위에 세움(경순왕)
* 경순왕의 요청으로 고려는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와 전쟁을 하나 패배
* 고려 태조 13년(930년) 1월, 고창(경북 안동시) 전투에서 고려 승리
* 후백제 936년 9월 건국 45년만에 멸망
* 신라 경순왕 9년(935년) 11월 고려에 항복, 스스로 나라를 내어줌
* 다시 한번 한반도 통일 - 고려 건국 19년만에 통일
신라 멸망의 원인 - 골품 제도의 모순
1. 왕당파에로의 권력과 재부의 집중에 따른 귀족파의 불만
2. 끊임없는 왕위 쟁탈과 권력 투쟁 (어린 왕의 왕위 계승, 단명)
* 반역의 역사 - 정치개혁 의지에 의한 저항이 아닌 권력에 대한 사사로운 욕심
- 내부 붕괴로 통치력 약화, 국가 재정의 고갈, 미약한 왕권
3. 월봉에서 녹읍제도로 전환되면서 호족 세력 성장.
4. 오랜 세월의 평화와 안정에 의한 귀족(화랑 포함)들의 타락과 사치, 방탕한 생활.
5. 평민들의 유랑민, 도둑으로의 전락 -> 나라에 대한 반감, 무리의 힘 집결,
지배 세력에 대항하기 시작
6. 불교의 선종 - 민중 의식을 깨움
7. 도둑 집단과 몰락한 귀족 세력이 연합 예)김헌창의 난
8. 백제, 고구려 유민의 반감 유발
- 중앙 정계 진출 봉쇄, 지방의 성주, 장군의 길도 봉쇄
궁예의 실패
1. 지나친 개인적인 복수심과 폭정
2. 신라에 대한 불만 세력 흡수에 실패
3. 자체적인 세력 확립 실패 - 호족 세력과의 연합.중앙 집권제로의 전환으로 호족세력의
반감을 불러 일으킴
견훤의 실패
1. 신라의 제도 고수 - 진보파의 불만, 백제 유민의 불만
2. 경애왕을 죽여 정치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신라인의 반감만 유발
왕건의 성공
1. 정세의 정확한 파악
2. 내정 개혁 - 신라의 낮은 귀족, 지방호족, 유학세력, 풍수세력, 선종세력을 끌어들임
3. 10분의 1세 고수로 호족과 농민의 환심을 얻음
4. 겸손하고 온유한 이미지 부각에 성공
5. 여러 신분, 지역에 따른 겹혼인으로 세력 확장 - 호족세력 규합이 권력의 관건임을 간파
참고 자료
* 남국 신라와 북극 발해(한길사, 이이화)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 이덕일, 이희근)
* 진훤이라 불러다오(푸른 역사, 이도학)
이야기 한국 역사 4-1
1. 다져지는 고려의 기틀
1)태조 왕건
936년 후백제 멸망으로 통일 왕조를 세움. 후삼국뿐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 유민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통일.인자하고 백성을 사랑했다.개국공신들과 호족 세력을 중앙관리로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며 공로에 따라 ‘역분전’을 실시함.
* 왕권 강화 정책
ㄱ. 기인제도 : 지방호족의 자제들을 인질 삼아 서울에 머물게 함(회유, 통제의 수단)
ㄴ. 혼인정책 : 6명의 왕비와 23명의 후궁으로 호족 세력의 반란은 막았지만 호족들의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됨.
ㄷ. 훈요십조 : 후손들에게 전하는 훈요를 조석으로 읽어 귀감으로 삼으라. <고려사>에 전함
진위 여부(고려사 최제안전에 <신서>와 <훈요>를 병란에 분실되었다가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얻어 세상에 알려짐. 태조의 정치사상과 한계)
2)혜종(943-945)
장화 왕후의 맏아들 무. 도량이 넓고 지략이 뛰어나며 용맹. 외척, 호족 세력의 도전과 위협.
왕규와 요 왕자가 왕위를 노림. 2년만에 혜종이 죽고 박술희와 왕식렴의 추대로 요 왕자가 3대
임금 정종이 되었다. 정종은 박술희와 왕규를 갑곶으로 귀양을 보내고 왕규는 박술희를 살해함.
왕규의 가족과 친지 모두 몰살. 강한 두 귀족을 제거하고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려고 왕식렴에게
대궐 공사를 시키지만 2년만에 왕식렴과 정종이 죽음.
3)광종의 왕권강화책
ㄱ. 노비 안검법(956)-전쟁중의 포로,이재민들을 양민으로 풀어 주게함. 호족의 세력이 약화
되고 국가의 세수입이 늘어났다.
ㄴ. 과거제도 : 후주의 쌍기가 추천. 958년 9월에 첫 과거시험, 임금에게 충성할 관리층이 생김,
백관의 공복을 제정등급에 따라 자삼, 단삼, 비삼, 녹삼을 입도록 함.
ㄷ. 연호 사용 : 광덕, 준풍 황제 칭호를 사용함
4)경종
전시과 제도 실시(관리들에게 지위에 따라 토지를 배분, 일반 백성에게도 골고루 나누어줌.
조세를 거둘 수 있는 수조권만을 주었다.)
5)성종 : 호족 세력 힘은 약해졌지만 그들을 이용할 필요성
#최승로 : 시무28조 (고려 역대 왕들의 잘못을 가려내어 고칠 점을 건의)
내용 : 군사의 수효보다 훈련에 주력, 불교 숭상으로 낭비, 간신을 물리치고 충신에게 일을
맡기도록 함.
2. 거란의 침입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서 태조가 거란을 미워함. 만부교 사건, 송과의 친밀한 관계에
불만을 가진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1) 1차 침입
성종12년(993) 소손녕이 봉산군을 점령. 박양유, 최량이 봉산군에서 졌다. 대동강 이북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이 대두됨. 서희와 이지백이 반대. 안융진에서 10일 동안 공격하다 수만의
대군으로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담판을 보자고 요청을 한다. 서희가 거란 소손녕
과의 담판이 벌어졌다. 소손녕은 침략 이유를 고려가 옛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고려가 오랑캐라고 부르며 멸시하고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는 점을 들었다. 여기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이었고 송나라 문물을 배우고 여진이 통로를 막고 있어서 불가능 하다며
옛땅을 돌려 달라고 함(여진을 끌어들인 태도는 상국답지 못한 행위가 아닐까?)
#결과 : 압록강 동쪽에 여러 성을 쌓고 평안북도 일대에 군사, 교통상의 요지를 마련함. 6주
(홍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는 중요한 군사기지이며 조공로가 된다. 그후 압록강
남쪽의 여진족을 무찔렀고 6성을 쌓게 된다. 서희의 담판이 국토를 넓히는 결과. 목종1년에
서희는 죽었다.
2) 2차 침입
현종1년(1010) 거란의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홍화진에서
양규가 물리침. 통주에서 행영도통사인 강조가 30만 군사로 단숨에 무찔렀다. 아율분노와
야율적노가 다시 공격하지만 실패함. 10만을 무찔렀지만 20만이 남아있었고 자만심으로
허술한 사이에 고려의 작전을 깨달은 거란의 장수들은 3진을 하나씩 공격해옴. 참패하고
강조와 이현운등이 포로로 잡혀갔다. 거기서 꿋꿋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강조.하공진과
고영기가 국서를 들고 거란군에게 갔지만 현중을 요나라로 보내라는 억지를 부렸다. 개경은
잿더미로 변하고 왕은 나주로 피난을 갔다. 양규는 귀주에서 거란을 크게 물리쳤다. 양규
장군은 추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강조의 정변 : 경종의 셋째 왕후인 현애왕후의 아들이 목종이 되면서 김치양과 짜고 세자로
책봉중인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했다. 절에 피한 대량원군은 주지스님의 기지로 목숨을 구했다.
김치양이 목종을 죽이려고 대궐을 불태우는 일까지 생기고 목종은 강조에게 개경으로 오라고
했지만 망설이는 강조는 어지러운 개경에 닿아서 김치양 일당을 죽이고 충주까지 도망간
목종도 죽이고 대량 원군이 현종으로 왕이 된다. 현종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열게 된다. 하지만 강조의 정변은 2차 침입의
원인이 되었다.
3) 3차 침입
현종9년(1018) 거란은 현종이 거란의 수도로 찾아오기를 요구하며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했지만
1015년에 거란과의 외교를 끊었다.이를 구실로 소배압이 10만을 이끌고 침입을 했다.강감찬과
강민첨이 이끄는 20만대군이 안주,홍화진에서 쇠가죽을 이용해 거란의 군사들을 물리쳤지만
소배압은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했다. 병마판관 김종현은 개경을 지키고 있었다. 강감찬과
강민첨이 귀주에서 소배압 군사들을 격퇴했다. 귀주대첩
#결과 : 2천의 군사만 데리고 참패한 거란은 정식으로 외교를 맺고 사신이 오고가게 된다.
거란의 힘이 미약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종은 백성들의 안정을 위해서 의창수렴법을 실시
하고 군사들에게 구분전을 나누어 줌.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토성을 30만4천명을동원하여
현종 20년에 끝났다.
* 귀주대첩의 명장 강감찬
정종3년(948)금주 삼한 벽산공신 강궁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서삼경, 천문, 지리, 술서,병법
까지 10살에 통달하는 신동. 35세에 장원 급제. 한성판관, 예부사랑, 한림학사, 중추원사, 행영
도통사, 평화기엔 문하시중까지 올랐다. <낙도교거집> <구선집>등의 시가집도 남겼다.
3. 귀족 문화의 발전
1) 학문이 꽃피다.
* 벽란도 : 국제적 무역항으로 일본, 거란,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드는 곳으로 종이와 책등은
고려 문화를 발전시킴.
* 최항 : 고려 건국부터 목종까지 실록을 기록(19년) 아들 최유부가 하사품을 받지 않음.
* 교육제도
ㄱ. 국자감 : 국가기관으로 학비를 받고 공부 기간이 길고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적었다.
ㄴ. 사학 : 9재학당(문헌공도) 최충이 세움. 12개의 사학이 생기고 거기서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대부분. 정지상, 김부식 등 유학으로 연결됨.
2) 해동 공자 최충
대령군(해주)에서 성종3년(984) 최온의 아들로 태어나서 22세 목종 8년에 장원급제. 우습유가
되어서 왕의 잘잘못을 간언. 7대 실록을 편찬, 덕종때는 중추원 부책임자. 정종때는 지공거로
책임을 다함. 문종 원년엔 문하시중, 9년간 수상의 자리에 있음.‘여러 대의 유종이요. 삼한의
기덕’이란 평처럼 학식과 인격을 골고루 갖춤.사학을 열어 후진을 양성함.9재학당에선 9경3사,
시부 사장을 가르쳤다. 학문을 닦고 덕망을 쌓아서 출세해야 뒤가 좋은 법이라고 했다.
3) 불교의 융성
* 고려의 지배 사상 : 불교,풍수지리설, 유고
ㄱ. 승과 제도 : 덕이 높은 승려는 왕의 스승으로 모심
ㄴ. 개경에 70개의 절이 세워지고 문종때 세운 흥왕사는 12년만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절이 세워짐. 연등회가 닷새동안 계속 됨. 그후 불교가 사치스러워지고 귀족 불교로
흘러가게 된다.
ㄷ. 대각국사 의천 : 넷재 아들. 선종 고종으로 나누어진 고려 불교계에 실망하고 송나라로 건너가
계성사의 유성법사에게 가르침을 받음. 속장경(송, 거란, 일본등 여러나라에서 구한 불교
서적과 옛경전을 모아서 만듬) 진리는 하나.통합하여 선종과 교종을 합해 천태종을 펴고 그
시조가 되었다. 불경을 강론하고 폭넓은 견문과 해박한 지식으로 저술된 책이 300여권,
화엄경 번역이 300여권에 이른다. 47세의 나이에 입적함.
4) 화폐사용
ㄱ. 화폐사용의 이유 : 의천이 좋은 정치를 베풀고 세금을 적게 부과하며 돈을 만들어서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상업이 발달할 수 있게 하라고 의견을 내고 숙종이 받아들였다.
ㄴ. 주전도감 : 돈을 만드는 관청
ㄷ. 엽전 :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중통보, 활구(은 한근으로 한반도 지형을 본뜬 은병, 가치는
쌀10섬에서 최고 50섬, 상류사회에서 유통)
# 참고도서
<고려왕조실록> 박영규 / 들녁
<고려시대 이야기> 창비
<반란의 시대> 김정환 / 푸른숲
<고려시대 사람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역사연구회 / 청년사
# 토론
고려의 건국과 거란침입으로 겪은 수많은 민중들의 삶, 고려가 이룩한 통일이 지금 현싯점에서
주는 의미를 되돌아보며….자주적인 민족과 진정한 인간의 삶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 싶었다.
이야기 한국 역사 4-2
< 고려중기사회 >
숙종 : 1095 ~1105
예종 : 1105 ~1122
인종 : 1122 ~1146
의종 : 1146 ~1170
명종 : 1170 ~1197
1107년 : 윤관 여진 정벌
1115년 : 금 건국
1125년 : 요의 멸망
1126년 : 이자겸의 난
1127년 : 북송멸망 남송건국
1135년 : 묘청의 서경천도
1145년 :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47년 : 남송 금 강화조약
1170년 : 무신정변
1179년 : 경대승 도방정치
1196년 : 최충헌 집권
고려의 대외 관계
1. 여진과의 관계
여진족은 고구려 말갈족이라 불리던 족속으로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발해로 옮겨왔다. 이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 라 섬기며 안으로 스스로의 힘을 기르다 숙종8년 여진의 오야속이 기병
부대를 이끌고 고려에 침범, 고려군은 참패를 당한다. 이후 윤관은 별무반을 설치, 1107년
윤관을 행영 대원수, 오연총을 부원수로 여진을 정벌, 고려는 17만 대군으로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소탕, 135곳의 촌락을 함락, 영토를 개척하고 이곳에 9성을 쌓고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이로써 고려의 영토는 함경도까지 넓혀졌다.하지만 여진이 함경도의 남부지방을 찾기
위해 항전을 계속 하자, 고려조정에서는 9성을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9성의 반환으로 여진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윤관을 추궁, 관직과 공신칭호를 박탈했다.이후 9성을 돌려받은
여진은 그곳을 근거지로 차츰 세력을 키워 오야속의 뒤를 이은 아골타가 부족을 통합하여
1115년에 금을 세우고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고려조정에서는 문벌귀족세력 특히
이자겸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수락하게되는데, 이는 민족의 수치이며
고려의 북진정책의 포기라 할 수있다. 이후 금과 화해적인 관계를 유지하게된다
2. 고려와 요의 관계
송.금연합군 : 요 공격
송은 그동안 괴롭혀온 요나라를 없애고 연운 16주를 되찾으려 함.
요는 이때 고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구하나 김부식등이 반대.
고려는 금의 공격으로 쇠약해진 거란의 점령지 보수와 내원성을 찾을 수 있도록 금과 교섭 :
고려의 실리적인 외교정책.
금은 고려에게 이 지역을 넘겨 줌으로써 두나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리려는 목표.
3. 고려와 송의 관계
요를 멸망시킨 금은 다시 송을 공격하고 함께 요를 무찌른 금이 쳐들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송은 양자강 남쪽으로 쫒겨 가 남송을 건립. 이때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나 고려는 친송
정책을 취하면서도 군사적 개입을 피하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문화적인 교류는
계속 이어져 송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보다 높은 문화를 창조해 나갔다.
귀족 사회의 동요
문벌귀족
경원 이씨의 왕실 관계도
(8)현종-------------(a)원성태후
| (b)원혜태후
|
-----------------------
| | |
(9)덕종 (10)정종 (11)문종------------ (1)민예태후
| (2)인경현비
| (3)인절현비
|
---------------------------------------------
| | (5)정신현비 |
| | |
(12)순종=(4)장경궁주 (13)선종---(6)사숙태후 (15)숙종 -----(명의태후)
| |
| (7)원신궁주 |
|
(14)헌종
(16)예종----(문경왕후)
|
(17)인종=(9)폐비이씨
(10)폐비이씨
<고려 왕실과 경원 이씨의 결혼도>
이허겸
------------------------------------
| | |
이눌 이한 안효국대부인----------김은부
|
| |
---------------------- -------------------
| | | |
아자상 이자현 (a)원성태후 (b)원혜태후
| |
| ----------------------------------------------------
| | | | | | |
| |
| | (1)인예태후 (2)인경현비 (3)인절현비 이호 보현왕사
(5)정신 (6)사숙태후 |
현비 (7)원신궁주 ---------------------
| | |
(4)장경궁주 이자겸 ***
|
------------------------------------------------------
| | | | |
*** (8)문경왕후 (9)폐비이씨 (10)폐비이씨 의장
(현화사)
<경원 이씨 가계도>
*중앙 집권체제가 세워짐에 따라 문벌귀족위주의 신분질서가 확립되었다. 문벌 귀족들은
자신의 세력을 더욱 튼튼히 다지기 위해 최고 귀족가문인 왕실이 아니면, 다른 문벌 귀족과의
혼인 관계만을 맺으려 했다.
이자겸의 난
세딸을 현종의 비로 들여보낸 김은부는 이자연의 고모부이고, 역시 세딸을 문종의 비로 들여
보낸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은 자신도 또한 둘째딸은 예종의 왕비로 셋째와 넷째딸은 인종의
비로 들여보내고 자신의 거처를 의친궁,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며 권력을 독점. 왕의 자리까지
넘보게 된다. 이에 인종이 1126년에 김찬 안보린등에게 이자겸과 그의 수하이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척준경을 제거하려하나 실패, 이에 척준경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인종을
이자겸의 집에 감금하며 감시하고 인종을 위협하나 인종은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타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 일파를 제거한다. 이후 척준경 또한 이자겸을 제거한후 공을
내세워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다 그 이듬해 제거됨.
묘청의 난
1135년(인종13년)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서경 천도를 강력히 주장(정지상, 백수한등)왕을
설득하나 개경세력의 반대로(김부식등)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묘청, 유참, 조광등은 서경
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하며 난을 일으켰다. 하나 묘청의 난은 왕권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다. 이는 그들 스스로 군대를 일으킨 것을 임금에게 알렸으며 국왕도 옹립하지 않았다.
이들은 개경의 중앙 문벌귀족을 타도할 목적으로 일어 났으며, 또한 서경을 서울로 옮기고 금
나라를 정벌하여 왕을 황제라 불러 민족의 수치를 씻고 강력한 나라를 만들려 하였으나 우유
부단한 인종과 정수를 쓰지 않고 속임수를 쓴 묘청의 실수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은 공신칭호를 받고 최고 관직에 올랐으며 이때 김부식은 정지상의
문장과 재주를 시기하여, 그를 반란군과 내통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죽인다. 단재 신채호는
새로운 나라를 세워 북방으로 날개를 펴려 했던 묘청의 대위국이 김부식 일파의 수구세력에
의해 격파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무신정변의 변천과정
집권자 권력기구
성립기 1170 ~ 1196 이의방, 이고
정중부 중방
경대승 도방
이의민 중방
확립기 1196 ~ 1258 최충헌 교정도감
무신정변
1. 배경
고려시대의 무신은 문신과 함께 양반이었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문신만이 존중되고 무신은
천시당하였다.고려 중기에 들어와 거란침입,여진정벌,묘청의 난등 군사문제가 이어져 무신의
지위가 차츰 높아졌으나 문신들 또한 무신들을 여전히 차별하였다.의종 또한 문신들과 어울려
놀기만을 좋아하고 나랏일에는 안중에도 없었다.이때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고,젊은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나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
하였다.
2 경과
1170년 의종이 문신들과 더불어 보현원으로 잔치를 즐기기위해 행차하는 중에 정중부,이의방,
이고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모두 죽이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대궐을 향해 궐에 있는 모든
문신을 제거, 의종을 폐위 시키고 그의 동생인 익양군을 19대 명종으로 추대한다. 이후 무신
정권을 세워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집권했지만 안정되지는 않았다.
*무신정변은 문신중심의 귀족정권을 무너뜨리고 무신들이 정치 권력을 차지함으로써 국가
체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의민처럼 천한 신분 출신으로 권력을 잡은 무신이 많았으며
만적의 난 처럼 신분해방을 내세운 난이 발생하는등 신분제 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또한 농장의
발달로 고려의 토지 제도인 전시과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더욱
심해졌으며, 무거운 세금등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몰락하였고, 이들은 무력으로 정부에
대항하기에 이른다. (김사미, 효심의난, 만적의난등)
전시과 제도
문무 관리에게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이었다.
전 : 농사지을 논과 밭 시 : 땔감을 얻을수 있는 산
무신정변이후 지방관리들의 횡포로 수확량의 10분의1을 조세로 내는 것을 여러가지 명목을
거쳐 이중 삼중으로 조세를 부과 농민이 몰락하였으며, 권문세족들은 자손들에게 불법적으로
세습 권세가의 토지가 늘어났으며 또 이들은 세금을 내지않아 신진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마저
없어지고 나라 살림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야기 한국 역사 5-1
% 고려왕
왕건 - 혜종 - 정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정종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공양왕 - 우왕 - 창왕
1. 무신집권의 교체
1170 1179 1183 1196 1219 1249 1257 1268 1270(2) 1270(5)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인)준 임연 임유무
중방 도방 중방 교정도감 정방
<우리 역사 이야기 / 조성오 / 돌베개>
2. 농민, 천민의 항쟁이 고려 사회에 미친 영향
1) 농민들이 자신들을 짓누르는 사회 현실과 사회 구조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했다.
(탐관오리나 토호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공격을 가한 반면, 왕이나 중앙 정부는 직접적인
공격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2) 농민군의 투쟁이 고립 분산적 산발적->지배층으로 하여금 적지 않은 양보를 하게 하였다.
3) 항쟁이후 변화
ㄱ. 향.소 부곡 (천민거주 지역)이 줄어들었다. (노비와 같은 많은 천민들이 투쟁을 통해
양인의 신분을 획득)
ㄴ. 솔거노비에서 외거노비로 전환 (노예적 존재 ? 농노적 존재)
ㄷ. 민중의 사회적 각성 촉진 : 몽고 침략군 아래서 민족의 자주권 수호하는 힘의 원천
3. 우리 역사상 식민지 3번
1) 1910 ~ 1945 일본지배
2) 1945 ~ 1948 미군정 지배
3) 몽고(원나라) 침입 :
1231년 (고종18년)에서 1259년 (고종46년)에 걸침.
1차: 1231년 -> 몽고 사신 피살
2차: 강화도 천도(고려 개경 환도)
--대구 부인사 고려초조대장경 불탐. 살리타이 처인성에서 사살(승려 김윤후)
3차: 1235년 -- 경상도 지역침범
1236년 -- 전라도 지역침범
1237 ~ 1238년 경주 침입--황룡사 불탐
4차: 1247년--개경환도와 국왕 친조가 되지 않아서
5차: 1254년
6~7차: 1255 ~ 59년
ㄱ. 원종(고종 아들) ->-> 원에 구원요청 ->->1274 삼별초 진압
(다루가치 총독부)
‘진압하는 자’
강화도에서 개경천도
ㄴ. 충렬왕~공양왕: 고려가 원의 식민지가 되었으므로 왕의 시호에 붙이는 ‘종’ 자를 쓸 수
없었다. (원은 공민왕때 망하지만 친원파는 고려 말까지도 세력을 잡고 있음)
ㄷ.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 7왕은 원나라 황족 사위이다.
% 충선왕은 고려왕이면서 심양왕. 고려왕을 충숙왕에게 넘기면서 심양왕도 조카 왕고에게
넘김(갈등: 고려왕과 심양왕간에 알력은 고려 조정의 내부 분열을 일으켜 입성논의등이 제기
되는 등 나라의 독립성을 상실할 정도의 위기였는데 이는 원의 이이제이 정책에 말려든 결과
이다.
Cf) 신라가 당에게 병력을 요청하고, 자발적으로 당을 받든데 비해 고려는 40여 년간 항쟁
하다가 힘에서 밀려 무릎을 꿇었다.
% 만주관할권 : 역사적으로 보면 심양왕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라 할 만주를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영토화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원나라의 공식적인 위임을 받은터라 자연스럽게 만주는
한반도와 한 몸이 되었을 터인데 아쉽다(만주는 원. 명에게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고 이 지역에
사는 민족의 반란을 걱정했다.) 고려보다 원에 애정과 충성을 가졌던 몽골 지배 시대 고려왕과
심양왕은 의지도 없고 기개도 없었다. 청나라 황실의 고향인 만주는 이후 봉금령이 시행되면서
성역화되어 중국인, 조선인의 이주가 금지되어 우리 민족과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한국사 X파일 / 다림 / 남경태)
% 삼별초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친 이름인데 그 출발은 고려 무신정권기의 최우의
사병이었다. 당시는 최씨 집권기였으므로 단순한 사병의 성격을 넘어 전투와 경찰, 형옥의
임무를 지니는 사법기관의 임무도 수행했다. 고려의 정기 군대보다 용감해서 고려 권신들은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애썼다.삼별초가 봉기한 이유는 개경환도를 반대하면서부터이고,삼별초
의 명부를 압수 당하자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 노영희의 지도 아래 군사를 일으켜 저항한
것이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가 석축으로 용장성을 쌓고 실질적인 해상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나 고려에는 고립되었으나 일본은 진도정부와 손잡을 수 밖에 없었다. 원나라는 일본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전투집단
이라는 점 이외에 고려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 김영사>
*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국서
1) 국서 <대일본교섭문서>가 동경대학 사료편찬소에서 발견, 이우성 교수가 국내 소개.
2) 1271년 가마쿠라 막부를 거쳐 경도의 일본 조정에 전달한 12개조.
3) 1268년 고려 조정 사신 반부가 가져온 국서와 다른 내용
- ‘가죽이나 털옷을 입은 북방 미개족’이라고 비판
- 원의 연호를 쓰지 않음
- 문화자존의 의식 : 강화도에서 몽고의 야만적 습속에 동화되기 싫어 진도로 천도했으니
진도정부가 우월한 고려 문명과 문화를 지키려 함이다.
- 고려가 삼한을 통합한 대국임을 밝힘
4)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 : 일본의 표류민을 일본으로 보호 환송시킴
% 원나라의 일본 정벌
1. 원종 15년(1274) 6월에 완비했는데 원종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충렬왕 즉위년인 그 해 10월
---- 대마도, 이키 두 섬을 정복하고 본토 상륙했다가 태풍으로 치명타 입음.
2. 충렬왕 6년(1280) 2차 원정 ---- 태풍(신풍 : 카미카제)으로 실패
이야기 한국 역사 5-2 - 고려 후기사회의 동요 -
뜻 못 편 개혁정치 와 저무는 오백년
25대 충렬왕
* 원의 내정 간섭 강화
짐->고, 태자->세자, 선지(임금의 뜻을 널리 선포함)->왕지, 조.종 사용 금지->왕
중서문화성, 상서성->첨의부, 문화시중->첨의중찬, 추밀원->밀직사, 어사대->감찰사
상서(6부의 장관)->판서
* 몽고 공주(제국대장공주)와 결혼
* 공물, 공녀를 원나라에 바치고, 몽고 풍습이 널리 퍼지기 시작
26대 충선왕
* 충렬왕과 제국 공주의 아들
*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나 제국 공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자로 책봉
* 아버지와 불화
* 개혁 의지 1. 고려인의 긍지와 기상
2. 친원파 제거
3.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 축출
4. 인재 등용
5. 세도가에게 빼앗긴 토지를 원 주인에게 환원
* 개혁 반대 세력과 계국대장 공주의 음모로 왕위에서 물러남
* 다시 복귀하였으나 개혁 반대에 부딪혀 정치에 뜻을 잃는다.
* 의의 1. 개혁 시도는 고려의 자주 정신을 일깨우는 역할
2. 원에 만권당을 만들어 고려와 원의 문화 교류
3. 학문에 대한 열기를 높여 이제현, 이색, 정몽주, 이승인, 정도전 등의 학자 배출
27대 충숙왕
* 상왕의 월권으로 정치 의지 약화
* 심양왕 왕고의 왕위 찬탈 음모
31대 공민왕
* 원과 명의 교체 시기로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
1. 몽고의 풍습(변발, 호복) 금지
2. 정방 폐지
3. 신진사대부 등용
: 문벌을 바탕으로 벼슬길에 오른 권문 세족들의 횡포와 부패가 극에 달하자 서서히 순수한
실력으로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들이 등장. 이들은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기본 사상으로 한다.
4. 부원배 처단( 예: 기 황후의 아우 기철) - 부원배 : 친원파
몽고와의 전쟁 시작부터 몽고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권문 세족이라는 특권층을 형성.
고려가 원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을 등에 업고 개인적 이익을 취함
5. 정동행성(원나라의 고려 내정 간섭 기관) 폐쇄
6. 원나라식의 제도, 연호 사용 금지
7 친명 반원 정책
8. 영토 회복 운동 -쌍성 총관부 폐지 - 이성계 역사에 등장
-서북은 압록강 건너, 동북은 북청까지 영토 확장
9 노국 공주의 죽음으로 개혁의지를 상실했으며 뿌리 깊은 권문
세족들의 견제로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재위 23년 45세의 나이로
홍윤, 최만생에게 시해를 당한다.
32대 우왕
* 이성계 -고향 : 전주
- 고조 할아버지 때에 지방관과의 불화로 함경도 덕원으로 이주
- 동북 지방의 쌍성총관부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하던 이자춘의 둘째 아들
- 공민왕의 친명 반원 정책으로 동북의 쌍성총관부 공격 당시 협력 -> 역사에 등장
- 아버지의 뒤를 이어 23세에 동북면 병마사가 됨. (1357년 공민왕 9년)
- 요동의 도녕부 점령(1369년)
요동의 중심지 요양 점령(1370년, 11월)
강릉, 덕원 등지의 왜구 소탕(1372년, 6월)
뛰어난 정치력, 민생안정, 군사훈련, 반란군 진압, 홍건족 토벌, 원의 나하추 격퇴
- 고려 북방 수비의 중요인물로 자리잡음
- 임금이 될 꿈
* 위화도 회군
- 이성계는 친명파인 신진 사대부로 처음부터 요동 정벌을 반대.
- 반대의 이유 -> 4불가지론( p176)
-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서는 역사적 전환점
최영(1316년) 이성계(1335년)
순수한 무인관료 국가에서 동원시킨 군대를 지휘 자신의 통치지역과 사적 군사기반을
하는 관료적 지휘관 무인문벌 가지고 있음
힘의 근거 고려 왕조 충성을 맹세 독자적 세력기반,상황에 따른 선택 가능
신친원파 원과 전술적 제휴 후 명을 공격 친명파
북방진출을 꾀한다.
(친원파 : 원에대한 무조건적 굴종)
요동정벌 주장 요동정벌 반대
33대 창왕
* 조민수에 의해 추대
* 이성계의 뜻과는 달랐으므로 결국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몰아 ‘이씨’에 의한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주장
34대 공양왕
* 이성계 토지제도 개혁
: 공양왕 2년(1390) 9월, 나라의 땅보다 넓은 토지를 소유한 권문
세족의 토지대장 소각. 1391년 과전법 제정
* 권문세족이 몰락하고 신진사대부가 주도권을 장악
* 1392년 4월 4일 이방원이 선지교에서 정몽주 피살
* 이성계는 끝까지 정몽주를 죽이지 않고 설득하려 했으므로 아들 이방원을 질책
# 정몽주 :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이성계와 같은 노선을 걸었으나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어명을
어긴 이성계를 역적으로 규정. ‘단심가’로 자신의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킴
온건개혁파 신흥사대부 : 고려 왕실은 존속시키고 부분적 개혁 주장
(이성계 : 역성혁명파 신흥 사대부. 고려 왕실, 권문세족 모두 제거. 새 왕조 수립 주장)
* 공양왕은 신하인 이성계와 동맹을 맺어 스스로 지위를 낮추고 사실상 왕권을 포기
* 1392년 고려 멸망(34대 475년) ->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이성계 왕으로 즉위
토론
위화도 회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 민족의 자주성과 북진의 대업을 포기하고 우리나라를 영원한 소국으로 남겨 놓았는가?
- 시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현실적인 현명한 선택이었는가?
- 결과만을 중요시 하는 현 시대상은 ‘새 왕조 성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반역조차도 정당화
시킨 이성계의 조선왕조로부터 비롯되었는가?
고려의 문화와 생활
청자
* 신라말 선종의 도입과 함께 승려들이 참선할 때 졸지않기 위해 차를 애용, 찻잔으로 청자사용.
* 초기 : 맑은 비색의 순청자 사용, 주로 문벌귀족이 애용했으며 특권의식의 상징이었다.
* 무신난 이후 : 상감청자. 순청자의 아름다운 비색에 좀더 독창적이고 고려화된 문양과 기법
사용 - 나전 기법의 발달로 가능
무신 집권 세력이 애용
강화도 피신 시절이 전성기로 자신들의 안전만을 도모하며 강화도에서 여유있는 생활을 누렸던
최씨 무신 집권세력의 생활도구
*고려 말기 : 분청사기
왜구의 침입으로 청자의 가마가 문을 닫게 되자 신진 사대부들이 도공들을 지원하여 새로운
그릇을 굽게한다.신진 사대부의 기상을 대변하듯 힘이 넘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표현
공예 : 나전칠기 , 장신구 발달
글씨 : 유신, 탄연, 최우
그림 : 왕실과 귀족의 취미 생활
이녕<예성강도>, 공민왕<천산대렵도>,
불화 :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미술
섬세함과 화려함의 극치
대부분 친원 세력인 권문 세족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그들의 개인용 사찰에 걸기
위한 것으로 현세의 부귀와 내세의 극락왕생 기원
금속활자의 발명
* 최윤의 <상정고금예문> : 최초의 금속활자 책(고종 21년 1234년)
현재는 전하지 않으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기록, 예의에 관한 책으로 왕실용 책
* <직지심경> :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우왕3년 1377년)
프랑스에서 발견, 승려들을 위한 책
* <청량답순종심요법문> : 충렬왕 23년 또는 24년에 인쇄, 국내에서 발견
문학
* 패관 문학 : 최씨 정권 이후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문학으로 한문으로 전설, 설화로 이루어져
있다.이인로<파한집>, 이규보<백운소설>, 최자<보한집>, 이제현<역옹패설>
* 국문학 향가 -> 장가체가요(정과정곡, 가시리, 청산별곡) -> 경기체가(한림별곡)
* 역사서 : 일연<삼국유사>, 이규보<동명왕편>, 이승휴<제왕운기>, 각훈<해동고승전>
문익점
* 공민왕 12년(1363년)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며 그 때 반출금지 품목
이었던 목화씨 열개를 얻어 붓대에 넣어 가지고 온다. 그 중 1대가 성장하여 전국에 목화가
퍼지게 된다. 원나라 승려 홍원에게 직조술을 배워 옷감을 만들 수 있게 되고 고려의 의생활에
큰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참고 도서
- 고려 이야기 (민영. 창작과 비평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박현. 두산동아)
- 미술로 보는 우리 역사 (전국역사교사모임. 푸른나무)
이야기 한국 역사 6-1 - 조선왕조의 창업과 발전 -
조선의 건국
이성계(태조) - 공양왕 4년. 배극렴. 개경 수창궁
왕자의 난
1차 왕자의 난 : 정도전 <-> 사대부( 방원, 이숙번, 하륜 )
결과 - 세자 방석 방번의 죽음
영안대군 방과 세자 - 정종
- 방원의 세력 커짐(민심 얻음)
2차 왕자의 난 : 넷째 왕자 회안대군 방간 = 박포 <-> 방원
결과 - 방간 - 귀양
박포 - 죽음
방원 - 왕세자 책봉 - 태종
- 왕의 권력, 위엄 기틀 제도
백성을 잘 다스림 ( 신문고, 노비변정도감 )
- 1404년 10월 태조에게 인정
* 이성계의 과제
1. 민심 돌리기 - 고려 충신 자신에게 오게 하기
2. 불안정한 조정 기반, 질서 찾기 - 세자 책봉(방석 <= 정도전) * 개국공신의 힘(사대부)
3. 친명정책 - 명나라의 지지로 세력 확장(이름 조선으로, 이름 단으로)
4. 유교적인 이상 정치 - 조선경국대전, 경제육전 <-> 불교억제
중앙집권적 정치기구의 정비
1.정치제도
* 도평의사사 - 개국공신 -합좌기관 - 귀족정치 - 의정부 - 조정회의
* 문화부
* 3사 - 권력의 치우침 방지 - 홍문관 - 집현전 - 학식, 문장
사헌부 - 감찰기관
사간원 - 독재방지
* 중추원 - 군사관계업무 - 3군부
* 6조 - 실무 - 권한강화 - 호조 - 호구조사. 세금, 백성동태 파악
예조 - 예법, 음악, 제사
병조 - 무관
형조 - 법률, 노비
공조 - 관개시설관리, 산림, 광산
이조 - 인사권
의정부 전달, 6조직계제, 왕의직접 참여
* 승정원 - 왕의 비서실
* 의금부
* 지방제도 - 8도 - 부.목.군.현 - 6방
수령(목민관) - 임기제
향청 - 풍속. 감시
관찰사(감사)
2. 문화
* 불교탄압 - 도첩제
* 유교권장 - 충. 효, 인쇄술 발달
* 외교 - 친명정책
3. 경제
* 무역소
* 상업의 발달 - 화폐의 발달(세금) - 저화, 조선통보, 전폐
시전 - 6의전 - 어용상 - 장시
수공업, 상업 발달 - 천민, 상인 신분 상승
전문적인 사영수공업 발달
* 호패법 - 16세 남자, 신분증서, 백성움직임
* 농본정책 - 농민 -기술개발 -지위향상
부역의무
호패법 - 안정
자영농민
* 토지 - 농장 - 양반관료 - 권력강화
종류 - 사원전, 학전, 공신전, 군전, 내수사전 - 세습
과전법 - 직전법(세조) - 녹봉(명종)
18과 - 대를 물리지 않는다.
* 방화시설
* 개천도감
4. 신분제
신분제 사회
* 양반 - 한계 - 상업, 농업, 공업 천시. 기술관 양반 천시. 문무반 차별
특전 - 군사, 부역의무 없음
과거 - 중앙관료정치
사대부계층 - 문관 -동반
무관 - 서반
18등급품계
* 중인
* 상민 - 양민 - 사회기층구성원 - 농민(농본정책), 상인, 장인(갖바치)
전조 - 공물 - 10/1
부역 - 군역, 요역 (노동력)
* 천민 - 노비 - 종류 - 관노비(선상노비, 신공노비).
사노비(솔거노비, 외거노비)
매매 - 상속 - 세습
무당 - 광대 - 백정
천민거주지 없어짐 - 고려시대보다 나아짐
5. 군사
군사제도 개혁
* 사병 - 삼군 - 5위도총부 - 5위 - 중앙군
지방군 - 도 - 병영, 수영
진 - 정영수성군,
노동부대영진군
* 봉수제 - 평상시 1, 적 2, 성에가까이 3, 싸움
6. 교육
과거제 - 유학(사서오경) - 4부학당, 향교 - 성균관
양반의 독점 - 경제적 여유
방법 - 문과 - 문관 - 생진과(소과) - 생원과, 진사과
문과(대과) - 초시 - 복시 - 장원급제
무과 - 활쏘기 외 - 병서 - 3단계 - 선달
양반관료의 체계화 - 무관채용의 길
잡과 - 중인계급 - 율과 - 기술
음양과 - 관상감(천문)
의과 - 전의감
역과 - 사역원
이야기 한국 역사 6-2 - 조선시대 전기 : 세종 - 세조 -
1. 세종대의 번영
1) 양녕 대군의 진심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제) 효령대군(보) 충녕대군(도) 성년대군(종)
양녕대군의 해괴망측한 행위를 두고 볼 수 없다며 태종 18년(1418년)에 세자를 바꾸어 왕위를
물려줌.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넓은 도량과 백성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성군 세종대왕을
탄생시킴.
2) 황희 정승
고려말 공민왕 12년(1363)에 태어나 우왕15년(1389)에 27세의 나이로 급제. 고려 멸망후 72
명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감. 거기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기 위해서 다시 조정으로 나왔다.
공명정대하고 모나지 않은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소와 농부에 얽힌 일화에 감명을 받고 글
공부와 정신 수양에 힘썼다. 세자 책봉때 반대한 일로 파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세종때
다시 조정에 와서 주요 관직을 거치다가 세종 13년(1431)에 영의정이 되어 18년간 국정을
이끌었다. 국가 기틀을 잡고자 <경제육전>을 수정 보완, 국방과 예법을 정비, 문화 진흥을
주도하였다. 저서는 <방촌집>이 있다.
3) 슬기로운 임금님(해동 요순)
태종이 상왕이 되고 1418년에 왕위에 오른다. 1년후 왜구들의 본거지인 쓰시마섬을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해서 왜구를 정벌함. 평화시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집현전 - 재능있고 행실이 올바른 문신들을 두고 학문을 연구하게 함. 전임학사 20명이 경연
(왕이 공부하는 곳) 서연(세자가 공부하는 곳)에 나갔다.
- 학자 :권도,남수문,유의손,박팽년,최항,하희지,정인지,신숙주,변계량,성삼문,어효첨,설순등
- 사가 독서제 운영
- 집현전에서 한 일:왕과 세자의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학술연구,서적 편찬과 저술,문서 작성등
#도첩제 실시 - 추천 제도로 숨어있는 인물을 찾아서 썼다.
# 전제 상정소 설치 -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의 안정을 꾀함.
공신전 지급을 하지 않음. 공전의 확대로 나라 재정이 늘어남.
#의창제도 - 빈민구제, 사회 사업 차원에서 춘궁기에 빌려주고 가을에 돌려받음.
4) 학문의 발달
훈민정음:한자음의 혼란을 막고 통일음을 위해 지어진 낫봉과 송렴의 <홍무정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항, 박팽년, 신숙주 등이 운서 연구를 해서 새 한자음을 제정하여 <동국정운>을
엮었다. 소리 나는대로 적은 표음 문자로 한글을 만들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에
“백성을 편하게 하기위해 만든다”라고 했다.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최항이
힘을 기울여서 만들게 되었다.세종은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적을 수 있고 배우기 쉬운 글자
를 새로이 만들기 위하여 궁중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
였다.그리하여 1443년에 모음 11자,자음 17자 등 모두 28자로 구성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 뒤 세종은 훈민정음을 널리 알리기에 힘써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많은 책을
엮거나 번역하게 하여 배포하였으며 지위가 낮은 관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하게 하였다.
편찬사업
역사:태종 때에 <태조실록>이 편찬되었고, 조선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의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오늘날의 <조선 왕조 실록>은 날짜별로 그 날의 주요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므로 조선 시대 연구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그밖에 고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찬한 <동국통감>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도 편찬되었다.
지리:지리서로서는 세종 때 <경상도 지리지> <팔도 지리지>등이 간행되었고 성종 때에는 이를
보완한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여 각 도시의 지리, 역사, 정치, 경제, 풍물 등을 자세히 수록
하였다.지도로는 태종 때에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도>와 전국 지도인 <팔도지도> 세조 때에는
과학 기구를 이용한 최초의 전국 실측 지도인 <동국지도>.가 제작되었다.
법전:법전의 개편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 마침내 15세기 말 서거정 등이 지금까지의 모든 법령을
정리, 보완하여 <경국대전>을 펴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보완되었으나 그 기본 골격은
변하지 않았다.
예절:국가 의식의 규범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국조오례의>를 간행하였고 삼강의 윤리 덕목을
국민에게 교화시키고 장려하는 의도에서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과학 기술
농업:<농사직설>은 세종의 명에 의해 정초, 변계문 등이 농부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의 농사 기술이 이론적으로 정리
되어 있다.그 밖에도 세조 때 <사시찬요> <농산축목서> 성종때에 <금양잡록> 등이 편찬 되어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사법을 제시하였다.
천문, 역법:천체 관측을 위해서는 건극초부터 서운관을 설치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관상감으로
명칭을 바꾸고 천문, 지리, 역법, 기상 등을 종합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한편 1442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국 각지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강우량을 측정하여 농업에 도움을 주었는데
이것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세조 때에는 인지의가 제작되어 양전 사업과
지도 제작 등에 이용되었다.또 세종 대에는 이천, 장영실 등에 의하여 천문 관측 기구인
강의와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혼천의가 제작되었으며 시간 측정을 위한 해시계(앙부일귀)와
물시계(자격루)도 제작되었다.
의학:세종 때에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이 편찬되었다.
인쇄술:태종 때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계미자라는 구리 활자를 만들었으며 세종 때에는
활자를 개량하여 납으로 갑인자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서적이 대량으로 간행되어
교육 진흥을 촉진시키고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법과 무기:국방 강화 정책과 관련되어 각종 병서가 간행되었다. <진도>와 <병장도설>
<동국병감>이 편찬되었다.고려 말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화약 무기의 제조 기술은 더욱
개량되어 성능이 뛰어난 화포가 만들어지고 로켓포와 비슷한 화차가 제조되기도 하였다.
병선 제조 기술도 개량되어 태종 때에는 뛰어난 전투선인 거북선이 제작되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2. 세종의 왕도 정치
세종때는 왕의 권한과 신하들의 권한이 균형을 이루며 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왕은 신하의
의견을 존중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었다. 세종은 유교는 윤리와 도덕 정치질서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불교를 통해서 참다운 삶을 깨달아 가려고 했다.
<석보상절> 석가의 공덕을 그린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만약 세종이 유신들과 더불어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썼다면 훈민정음이 설자리를 잃었을 수도 있다.세종의 참모습은
유교와 불교를 함께 받아들인 넓은 도량에 있었다. 어질고 과단성이 있는 성격이 32년간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능은 광주 대모산에서 예종때 경기도 여주군 신륵사
근처로 옮겼다. 능호는 영릉이고 묘호는 세종이다.
3. 세조의 왕권 강화
1) 계유정난:세자로 책봉된지 30년만에 왕이 된 5대 문종이 3대를 섬겨온 황희의 죽음 후 건강
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세종의 제사를 치르고 건강이 나빠져 돌아감. 즉위 2년만에 12세의
세자가 6대 임금인 단종이 되었다.영의정 황보인,우의정 김종서,좌의정 정분이 국사를 도
맡았다. 수양대군이 대사헌 기건과 권람, 한명회 등과 김종서를 없애고 황보인, 이양 민신이
숨지고, 안평대군, 이우직도 귀양을 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결과 -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되고 좌의정에 정인지, 우의정에 한확이 앉음. 단종3년에 옥새를
넘기고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었다. 7대 임금 세조가 됨.
2) 여섯 충신의 의로운 죽음: 단종 복위사건으로 많은 이가 죽게 된다. 병자원옥 -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기 위한 비밀이 김질 정창손에 의해 세조에게 알려지고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유성원, 이개, 하위지는 사육신이 되었다. 생육신은 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조여, 성담수,
원호등이 있다. 특히 김시습은 시대를 잘못탄 천재였다. <금오신화>를 지었다.
3) 세종의 위업을 이어:세조3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는다.
단종도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시체를 엄홍도라는 사람이 관을 묻었다.세조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치부로 인해서 심적으로 괴로움을 백성들을 위해서 민본주의 사상을 지닌
세종의 뜻을 이어 철저한 왕도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세조를 도운 집현전 학자는 훈구파
(관학파)들이었다. 신숙주, 정인지, 최항, 양성지, 정창손,서거정,노사신 등이 세조와 성종을
도와 정치적 문화적 상당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야기 한국 역사 7-1
* 사림의 등장과 사화
1. 훈구파(관학파) - 15C 정치 주도 세력
고려말 권문세족 -> 부패 -> 불만의 소리가 커짐
신흥 사대부 등장 1)역성 혁명파 : 정도전, 하륜 - 왕자의 난 공신. 계유정난 공신
2)온건 개혁파 : 정몽주, 길재 - 사림파
- 역성 혁명파의 한 갈래로 고려말 권문제족의 전횡에 분개 혁명에 나섰지만 새 왕조가 들어
서면서 정치, 경제적 특권속에서 고려말 권문세족과 똑같은 형태를 보임.
- 성리학의 정치 이념을 정착
- 사회 개혁과 국가 운영의 기초를 다짐
- 왕권강화. 중앙 집권 체제 정비. 한명회, 정인지, 신숙주, 권람, 서거정 등
2. 사림파 -16C 이후 사회 주도
- 온건 개혁파 정몽주와 길재의 태도를 계승한 학파로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의거 왕조의
개창 비판.
- 고향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향촌 자치 - 사학을 통해 육성
- 훈구파의 전황과 부패에 임금과 백성들이 준노할 때 이들의 지지를 얻으며 성종때 중앙
정계로 진출
-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김일손
- 사림파는 중앙 정계에서 대부분 삼사에 진출해 훈구파의 비리를 날카롭게 비판 -> 훈구파의
반격 -> 사화를 일으킴
-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상태는 자칫 왕권을 누를 수도 있던 훈구파의 세력을 견제하게 되어
성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도움을 주었다.
* 사화 (사림이 화를 입는다는 뜻)
1. 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 4 )
- 발단 :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글 <조의 제문>을 사초에 기록한 것(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
- 결과 : 유자광, 이극돈이 주도하여 임금께 고발
사림파 김종직을 부관참시. 김일손 처형, 김굉필 유배
2.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 10 )
- 발단 : 폐비 윤씨 사건을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고함.
- 결과 : 임사홍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사림파를 대거 희생. 윤필상,
김굉필 등이 처형.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 부관참시
-> 이 사건으로 사림 세력은 연산군이 폐위 될때까지 중앙 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함.
3. 기묘사화 1519년 (중종 14 )
- 발단 : 조광조 일파가 중종반정 공신들의 훈작을 삭탈하려하자 기존 정치 세력이 반격 =>
위훈 삭제 사건(남곤, 심정, 홍경주) => 훈구파들도 조공조가 왕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졌다고 모함(주초위왕)
- 결과 : 조공조를 비롯 김정, 기준, 김식등 많은 선비가 희생됨
4. 을사사화 1545년 (명종 원년)
-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대립
- 윤임과 윤원형은 왕위계승 문제를놓고 중종 말무터 맞섰다.
중종 1) 단경왕후 신씨(신수근의 딸) => 폐위
2) 장경왕후 윤씨 -> 세자 호(외삼촌 : 윤임) - 인종
3) 문정왕후 윤씨 -> 경원대군(외삼촌 : 윤원형) -명종
- 명종이 즉위하자 윤임 일파 제거
- 을사사화 이후 사림파는 산림에 은거 학문에 전념하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파 학자들이
정치를 주도.
* 사림파가 수차에 걸친 탄압을 극복하고, 재기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이라는 확고한 정치
이념과 공통의 스승을 모시는 학통으로 연결된 조직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사림이
훈구파와 맞서 싸울 땐 하나의 정치 세력이자 동지였지만 훈구파를 물리치고 집권당이 되자
갈라지게 된다. 이 결과 사림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다.
* 붕당정치
- 당쟁의 시작
이조정랑 : 사림이 갈라지게 된 계기는 이조정랑이란 관직을 누가 차지 할 것인가에서부터
비롯, 5품의 중간 관직으로 지금의 내무부나 총무부의 과장쯤
조선의 임용관리 권한 => 이조에 인사권이 있음 =>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리 추천권 => 이조정랑
이조정랑직에 대한 인사권
재임중 특별한 사고가 없는한 정승까지 승진할 수 있는 출세가 보장된 자리.
* 전임 이조정랑의 추천을 받은 김효원을 심의겸이 반대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젊은 시절 외척 윤원형의 식객으로써 지조 없는 인물
이라 비난. 결국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고 후임으로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이 들어
오자 왕실의 외척이란 이유로 김효원이 공격.결국 신진 사림은 김효원의 동인으로, 노장
사대부는 심의겸을 지지하게됨.
* 선조때 주도권을 잡은 사림은 정치에 참여하는 수는 늘어나는데 비해 관직의 수는 고정.
이렇듯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 투쟁이 벌어지면서 자연스레 붕당이 생겨났다.
* 붕당의 기능
1. 긍정적 : 정치 활성화와 정치 참여폭 확대, 정치 세력간 상호 비판과 견제 기능
2. 부정적 : 국리민복 외면. 자기 당파의 이익 우선. 학벌, 문벌,
지연 관련 => 국가 사회 발전에 지장. 왕권약화 초래.
< 선조 때의 정치 구도 >
사림
|
--------------------
| |
동인 서인
|
------------
| |
남인 북인
- 선조 7년 (1574) 사림. 동, 서인으로 분열
- 선조 17년(1584) 동,서인 융합 힘쓰던 이이 사망
- 선조 23년(1591) 광해군 세자 건저 문제로 서인 실각,동인, 정철 치죄 문제로 남북인으로 분열.
- 선조 24년(1592) 임진왜란, 의병장 다수 배출한 북인 대거 진출, 광해군 세자로 책봉
- 선조 41년(1608) 선조, 광해군에게 양위, 소북 유영경 광해군 즉위 저지하다 실패.
* 조선 중기의 영의정 이준경은 동, 서인이 분당되기 전(4년) 사망하기 직전에 “지금 벼슬아치
들이 이런저런 명분으로 붕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 나중에 반드시
나라의 고치기 힘든 환란이 될 것입니다.” 라 예언. 이는 이이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며 끝내
현실화 되었다. 이에 이이는 이를 부정해 이준경을 비판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동,서인의
화합을 위해 노력.이이가 죽은 후 선조는 동인을 등용 ( 영의정 노수신의 영향 )
=> 성혼, 박순, 정철, 박응남, 윤두수------ 서인들을 탄핵
이이가 죽은 후 수세에 몰린 서인들 가운데 동인으로 당적을 옮기는 이들이 생김.
* 동인의 선두 주자가 되었던 정여립은 스승인 이이를 비난하나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되고
세간의 비난이 겹쳐 낙향한 후 대동계를 조직, 역모를 꽤하다 실패.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죽어갔으며 서인이 다시 집권. 그러나 세자 건저 문제로 광해군을 주장하다 선조의 미움을
사 서인 세력이 다시 실각. (1591년)
* 15C 말부터 조선 사회는 지주제가 더욱 진전이 되고 상품의 유통 경제가 발달하여 변화를
겪는다. 이에 따라 공물이 상납과 군역의 포납에 따른 폐단이 점점 커져 농민들의 부담이
커지고 몰락한 농민이 고향을 등지게 된다. 16C 또한 15C 말부터 지주제가 더욱 발전.
토지가 지주의 손에 집중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공물의 방납,군역의 포납으로 그 폐해는
점점 커져 몰락한 농민이 도적으로 난립을 하며 국가에서는 관군을 파견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이게 된다. ( 임꺽정 )
* 성리학:우리 나라에서는 고려말 안향이 성리학을 도입한 이래 조선시대 국가 통치와 사회
기강의 근본 이념이 되었고 많은 인재외 성과를 낳았다.조선초 정도전,권근등이 국가 제도와
이념을 마련하는데 기본 사상이었고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는 사림은 개혁
정치를 단행하려 사화를 맞기도 했다.그 뒤 이황,이이의 등장은 사상적으로 조선 성리학을
심화, 발전 시켰다.
1. 이황 :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심화 발전
이 -==> 도심 기-==> 인심
사단 칠정
- 이는 주가 되고 기는 종이 되며, 이는 존귀, 기는 비천하여 이와 기의 존재의 가치를 차별
- 영남 학파를 중심으로 계승. 유성룡, 조목, 김성일, 이익, 정약용 등 남인 실학자에 영향을 줌
- 일본 성리학에 영향
2. 이이 : 관념적인 도덕 세계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동시에 존중, 일원론적 이기 이원론 주장.
만물의 본원이나 인간의 심성문제에서 이와기, 본연지성과 기질기성, 사단과 칠정, 선과악을
분리해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조화 속에서 그 구조를 일원적으로 해명.
-> 김장생. 송시열. 한원진등으로 계승 ( 기호학파 )
* 조광조의 개혁정치: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지향하며 왕도 정치의 실현 추구.
1. 정치 : 현량과 실시 -> 훌륭한 인재 천거, 관리로 채용(사림등용)
2. 경제 : 공납제 폐단 시정
3. 사회 : 불교, 도교의 행사 폐지 (소격서), 소학 교육 강화, 향약을 전국에 시행
-> 훈구 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때 희생
* 조선 전기의 문화
세종
음악 : 박연 - 음악을 정리
성현 - <악학궤볌> (성종)
정조전 - <신도가>
정인지 - <용비어천가>
설화문학 : 서거정<필원잡기>,
어숙권<패관잡기>,
성현<용재총화>
회화 : 강희안, 안견, 최경, 이상좌 (중종)
서예 :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 (선조)
미술 : 백자 - 밑바닥이 넓어져 안정감이 있고 실용적 => 양반 사대부의 성격
성종 - 정치, 역사, 문학, 지리, 음악등 여러 편찬 사업이 활발히 진행
<경국대전> 조선 왕국을 다스리는 기틀
<동국통감> 종합적 역사책
<삼국사절요> 삼국시대 역사책
<동국여지승람> 인문지리서
<농사직설> <식료찬요> <강목신증>
참고자료 <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
< 한국 역사 이야기 >
이야기 한국 역사 7-2
* 조선 시대 당파 분립상
선조 초 선조 말 광해군 인조 숙종
동인 --- 남인 ------------------------------- 청남 --- 남인
|_ 탁남 _|
|- 대북 --- 육부 -|
북인 --| |- 골북 |--------------------- 북인
| |_ 중북 |
| |
|_ 소북 --- 청소북 |
|_ 탁소북 _|
서인 ----------------------------|--- 훈서 --- 소서
| |_ 노서 -|
| | -----노론
|___ 청서 --- 산당 | |_ 소론
한당 _|
당파들간의 싸움이 집중적으로 부각된 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당쟁(붕당
지쟁에서 爭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조어)’ 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일본인
들이었다.붕당은 중앙정계에 진출한 관료들이 출신 지역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동일한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끼리,정책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데서 출발하였다.그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이러이러한 집단을 이룰 수는 있지만, 일단 관직에 있는 한 국왕의 전제 권력이 인정
되는 사회에서는 붕당이란 존재는 사실상 금기에 해당된다. 이들이 집단을 이룬다는 건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할 위험요소가 있기 때문이다.실제 종종 있었던 정변은 이러한
집단을 기본으로 삼아 가능했고 조선 초만 하더라도 붕당을 만드는 것은 사형으로 처벌될 수
있는 범죄 행위였다. 붕당의 원조가 출현한 것은 중종때 조광조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세 번의 반정(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를 벌임)
1.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계유정란
2. 연산군을 쫒아 낸 중종 반정
3.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 반정
2, 3의 경우, 모반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서 권력이 약하다. 그래서 재야에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약점을 보완하는 일이라 생각하였다.왕의 후원을 받으며 신진 관료로 진출한
사림과 반정 공신 등의 기득권 층으로 정치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기득권 층의
승리로 士禍가 일어난다. 사림은 꾸준히 중앙으로 진출해서 붕당을 형성한다.
* 임진왜란(1592. 왜군의 조선 침략) ------- 정유재란(1597)
1. 원인
-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전쟁이후 남아나는 무력을 외부로 방출
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총기와 화약을 공급하던 상인 세력의
부추김도 한 몫 한다.)
- 일본이 명. 조선 사이에서 겪고 있던 국제 무역상의 난제를 해결하려고 일으킨 침략 전쟁이다.
2. 결과
- 국가 재정고갈,농민의 과중한 부담,전쟁으로 격심한 피해 (토지 170만결->54만결 축소)
- 사림들이 향존사회를 이끌며 의병을 주도해 나갔고, 전세를 역전시킬 힘이 생김 => 양반
사회가 임진왜란 이후 지배층으로 자리 매김
- 비변사 권한이 강화되고 의정부 권한이 약화됨
- 호적과 양안(토지대장)이 소실되고, 노비문서가 불타 노비층 파악이 어렵게 되었고 납속책이
시행되면서 신분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함
- 일본군이 가지고 왔던 조총에 비해 대포를 위주로 한 전술로 싸우는 해전에는 대포가 더
위력적이다.
- 문화재 소실 : 경복궁, 경주 불국사, 사찰, 실록, 서적과 예술품
정치제도의 변화 - 비변사 체제로 전환
군사 제도
- 중앙군 : 5위 -> 5군영(훈련도감 중심)
- 지방군 : 제승방략 -> 진관체제
- 직업군인(장번급료병) 출현
경제 : 재정 파탄(농경지 황폐 선조때 37결), 대동법 실시(공납 폐단 시정)
사회 : 신분제 동요(공명첩, 납속으로 신분 승격)
문화 : 문화재 소실(경복궁, 불국사, 사고 소실)
대외 관계 : 여진족의 흥기(후금과 외교문제 빌생)
3. 선조
- 조선을 구한 것은 조선의 장수가 아니라 명나라라는 논리를 갖고 있던 인물이다.
- 파천을 결정한 것, 요동내부(망명)설을 관철하려 했으나 명나라에서 거절하였다.(명은 왜와
조선이 결탁하여 쳐들어온다고 생각했다)
- 신위론은 요동내부의 걸림돌이었던 국왕의 직무를 세자에게 양위하고, 전쟁터를 벗어나
안전지대인 요동으로 도망가기 위한 계획이었다.
- 전쟁영웅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를 제거 대상으로 찍음(자신과 대비된 행위로)
- 환도 후에도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고, 강제로 군수용이란 명목으로
재산을 빼앗고 부역을 강화한다.
4. <선조실록> 과 <선조수정실록>
- 광해군 때 편찬한 <선조실록>은 총제관 이항복이 북인 기자헌으로 교체되면서 북인의 당파적
시각이 많이 들어가 북인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다른 당인은 부정적으로 서술함.
-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이런 문제점을 들어 수정실록을 편찬할 필요성을 제기
하였는데 이식이 상소를 올려 당위성을 주장함.
-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순신 = 충신, 원균 = 역적으로 쓰여졌다. 왜냐하면 인조반정은 형식상
서. 남인의 연합정권이었다. 인조반정 후 영상이 남인인 이원익, 남인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은 이순신은 남인으로 분류하고 북인이 집권했던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5.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
1) 거북선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13(1413)년 2월
2) 거북선은 왜선을 격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3) 거북선은 사실상 이순신의 창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 임난 당시 사람들로부터 거북선을 이순신의 발명품으로 여기는 것
- <선조수정실록>에 “이순신은 전쟁에 앞서 전투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광해군14(1622) 비변사가 이순신이 만든대로 거북선을 만들 것을 주청하자 “빨리 이순신의
거북선을 만들며 무기를 수리하고 사졸들을 훈련시켜 착실히 변란에 대비하기를 한결같이
순신이 한 것과 같이 하라”라고 말하였다.
- 인조17(1639) 최명길은 임금에게 “경기 수사에게 거북선을 제조하여 시험해 보도록 하려
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창제한 것입니다.”라고 고한다.
* 의병의 봉기 : 임진왜란을 극복한 동력 중 가장 큰 것은 의병항쟁이다.의병의 지도층은 당시
향촌의 지배 세력이었던 사림들이다. 의병장에 대한 신임과 향촌에서의 지도력이 있어 민중
들의 신뢰를 이끌어 냈다. 농민들이 의병을 선택한 이유는 전쟁에서 군대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굶지도 않았으며, 관군과 달리 질 싸움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약간의 공만 있어도 자발
적인 것이기 때문에 커다란 포상을 받았다.
* 인조반정(1623)
- 서인 당색의 문신과 무장, 유생들이 군사를 동원하는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하고
선조의 손자이며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 1623년 3월 13일 이귀, 김유,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 서인들이 600 ~ 700명의 군사를
홍제원에 모아 서울로 진격
- 반정의 정당성 : 광해군의 廢母殺弟 행위를 패륜행위로 규정하고,중립외교를 극렬히 비난.
- 반정을 비판하는 이유 : 임진왜란의 피해를 잘 극복하고 왕권 강화되어 정치 질서가 바로
잡혔으며, 후금에 대해서도 세련되고 융통성 있는 정책을 폈다는 점.(광해군 때 대동법,
은광의 개발, 주전, 용전론 등의 개혁정책들을 시행)
* 이괄의 난(1624)
- 인조 반정 때 김류가 망설이고 있을 때 대장이 되어 반란군을 수습하는 등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등공신 밖에 못한 데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변방으로 가게 되자
사전에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 통설
- 1624년 문회, 허통, 이우는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기자헌, 이시언, 한명련등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문. 무신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전혀 사전 계획도 없었고, 반란을 일으킬 명분도
없었다. 외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터진 것이다.
- 반란 이후 - 국내의 반란으로 처음 국왕이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
-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깊은 불신감
->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 강홍립 휘하에 들면서 조선정세를
알림 => 1627년 정묘호란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 정묘호란 : 1627년 후금이 조선 침략, 화의를 맺고 돌아감 =>형제관계
2. 병자호란 : 1636년 12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청 태종이 친히 출병
3. 삼전도(서울시 송파구)의 치욕 :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태종 앞에서 삼궤구복함
* 조약 : 청을 임금으로 섬길 것, 명에 대한 사대를 끊을 것
조선왕의 장남, 차남,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낼 것
청의 요청시 명을 정벌할 군사, 예물을 바칠 것
조선은 성과 요새를 짓지 않을 것, 매년 한번 세폐를 바칠 것
4. 척화 : 청과 싸우자(반청) -> 반정에 대한 명분-------------김상헌
주화 : ------------------최명길
* 김상헌 - 최명길이 쓴 항복서를 찢어버린 일화가 유명
- 남한산성에서 나와 안동으로 감 (신하로서 임금을 잘못 모셨다)
* 최명길 - 청의 별동대를 막고 국왕과 신하를 남한산성으로 가게 함
- 청의 횡포와 굴욕을 참고 피해를 줄임
- 임경업을 명에 파견, 한동안 우호관계 지속
정몽주 -------- 사제관계
| ………….영향
길 재
|
김숙자
|
김종직
-------------------|-----------------
| | |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
:……………………………………………: |
: -----------------------
: | |
이언적 김안국 조광조
: |
이 황 이 이
----|------- ----|------
| | | |
유성룡 김성일 정 엽 김장생
이야기 한국 역사 8-1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
1. 위대한 북벌의 꿈
2. 사회경제의 발전
3. 사회체제의 동요
효종(17) ------- 인재등용, 임금권한 강화, 군사제도 정비(조선사회 안정기반)
=> 북벌의 꿈 실현(8년동안의 포로생활의 원한)
* 효종 : 국가의 치욕(명분) + 북벌강행(실천)
* 서인 : 정치적 입지 강화. 명나라에 대한 복수
* 민중들 생활 궁핍 -> 생활안정에 대한 비판
숙종 ---------- 1. 사회체제 전반의 정비 및 복구 마무리
^ 2. 환국정치(외척, 부인, 정치에 이용)
| -> 왕권 강화 목적
| 3. 후기 상업 발달에 영향
|
백성 : 전쟁에 대한 두려움, 생활고 (민심 어지러움) (천민의 반란 조직화)
* 대동법 실시 -> 세입 일원화 완성
* 양전사업 추진
* 상업활동 지원(화폐주조 -> 상평통보)
* 도성 수리 공사
* 영토 문제 -> 4군 설치 -> 옛땅 회복 운동
청나라와 협상
일본 -> 울릉도 귀속 확립
* 명분의리론 -> 대보단, 사육신 복원, 노산군 복위(단종)
* 서원사우 건립
울릉도. 독도 문제
* 역사 - 삼국 - 512 - 신라거칠부 - 우산국
고려말 - 왜구 - 노략질
조선 - 태종 - 공도정책 - 성주민 보호, 일본과 문제
* 안용복 - 일, 도쿠가와 - 통역 - 납치 - 백기주, 죽도침범죄
* 어장 가치
* 정리 - 1699 - 최종 외교문서 - 우리땅
1876 - 일제 침략 - 지금도 문제
붕당 정치
*학파 중심(비판, 견제)
조선 정치의 특색 - 유교정치 -> 정치토의에 입각한 정책
사대부 -> 학문 + 이상
정치범 -> 처벌관대
-> 왜곡 ->세도정치(처음) -> 서로 존중, 친밀한 관계
효종 -> 예송논쟁----- 학설논쟁 -> 인신공격
-> 일당전제화(당파싸움의 폐단)
-> 붕당정치 파탄
* 예송논쟁
1. 효종 계모인 조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나 ?
(서인 : 송시열 -> 1년)
2. 윤선도의 상소 : 송시열에 대한 인신 공격, 효종 계승에 대한 수상한 저의
3. 조대비 며느리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나(남인)
* 숙종 -> 인경왕후(서인) -> 인현왕후
-> 장희빈(남인) -> 남인득세(민암)
-> 서인득세(장희빈 쫓김)
사회, 경제의 발전
1.수취제도 - 배경 -양란 - 토지제도 분란
해결 - 경작지 확보 - 개간 산업 - 개간지 - 소유지
문제 - 국가수입 감소 - 농민 부담 증가
전세개혁
2.균역법 - 배경 -병농일치 - 군사력 약화 - 농민생활 어려움
변화 - 중앙 5위 -지방(진관)
훈련도감
5군영(향군) - 속오군
모병제 - 군포 -부작용 - 황구첨정, 백골징포,족징, 인징
의미 - 국방의 미균등
방법 - 호포론 - 신분구분 없음
군포 - 군포 + 결작미 외
민란 발생
4. 대동법 - 배경 - 방납 - 농민 - 상업, 광산 노동자, 도적떼
발전 - 공납미 - 1608 - 1708 안정
조세의 급납화 - 상품화폐경제 촉진
방법 - 쌀. 과세기준 - 토지결수
양반 반대. 서민층 - 지주
5. 농업 - 개량농법 - 생산량 증가
- 농업 생산의 다양화 - 상업적 농업
이양법 - 1인당 경작면적
직파법
저수지 - 비료생산
농민지위 상승 - 농민층 분화
6. 상업 - 대동법 영향
도고(도매상인) - 상권 독점 - 은행 - 위탁
장시 - 6의전
공인 - 한성시전, 지방장시(난전), 전국적 사업망
무역업 - 개시무역 - 정부통제
후시무역 - 사무역 - 책문후시 - 밀무역
화폐발달 - 상평통보
7. 수공업 - 장인세
지역 - 농촌 - 전업
도시
종류 - 자립 - 전업수공업자, 부업수공업자
관 - 관영, 민영 사영
8. 광업 - 세방법 - 원정세 - 잡세 - 자본주의 방향
별장제 - 실점수세제 - 거대화
역사 - 민간참여 - 실정수세제, 잠채
금은 - 관 - 명(세공)
9. 결과 - 신분제 붕괴 - 농민 - 경영형 부농
양반 - 분해현상
노비 - 양인 - 납속
서얼 - 중인 - 실무관직, 문학운동
순조 1년 - 노비 해방 - 고종 23년 - 신분세습법 폐지
여성신분 - 만덕
이야기 한국 역사 8-2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
영조
- 탕평책
*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정책.
* 노론(을사처분) ->소론(정이환국) ->노론 ->노론, 소론(민지원, 이광좌, 기유처분, 쌍거호대)
*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 금지
* 탕평과 실시
* 동색금혼패 : 같은 당파의 집안은 혼인을 금함 -> 당파싸움이 줄고, 왕권 강화.
- 학문 장려 : <자성편><속오례의><속대전><소학훈의><속병장도설><해동악장><동국문헌비고>
- 국문학의 발달: <춘향전> <훈민정음운해> <삼운성휘> <해동가요> <일동장유가>
- 농업의 발달에 노력 - 저수지, 수리 시설
- 균역법 실시 : 국방의 의무 대신 내는 세금으로 포목 2필을 1필로 줄임, 농민들의 세금 감면
- 금주령 - 영조 34년(1756) 7월 2일
이유.: 곡식의 낭비. 백성들의 건강, 일을 게을리함
- 가난한 백성에게는 너그러운 왕 - 유세교의 경우
- 형벌 - 압슬, 자형, 낙형을 없앰.
- 사도세자의 죽음 - 장헌 세자, 후궁 영빈 이씨의 아들.
1. 영리한 세자 - 임금의 “덕”에 대한 질문 - 영조의 의심
2. 영조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들이 세자 주위에 모임
3. 숙의 문씨와 정순왕후의 모함 - 영조의 잦은 질책 - 세자의 이상한 행동
4. 세자의 방탕한 생활
5. 영조38년(1762) 5월 나경언의 투서 - 장헌세자와 소론파의 역적모의에 대해
6. 세자 측근들 용서 간청 -> 영조의 노여움, 숙의 문씨파의 처형 종용
-> 휘령전에서 자결 요구 -> 폐서인 -> 뒤주에 가두어 죽임 ->사도 세자(아들의 죽음
후회 - 나라를 위해서 한일)
- 재위 기간중 산업, 학문등 발달, 형벌 감량등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지만 사도세자의 사건이
오점으로 남는다.
정조
- 시파(사도세자를 동정)와 벽파의 싸움이 본격화 -> 벽파 제거 -> 시파인 홍국영에 의해
“세도 정치”가 시작됨(정조가 정치에 뜻을 잃고 대부분의 국정을 자기를 도왔던 홍국영에게
맡기면서 이루어짐)
- 규장각 설치(1776) - 인재를 등용하여 외척, 내관들의 역모와 횡포에 대항하기 위함
- 외규장각 설치(1781) - 강화도 강화행궁에 설치하여 왕실의 보물,
서책을 보관했으나 병인양요로 프랑스인들에게 도난 당함.
- 서자 출신 등용 (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
순조
- 1800년 11세의 나이로 즉위 - 정순왕후 수렴청정
- 경주 김씨(정순왕후), 안동김씨(순조의 왕비), 반남박씨(순조의 어머니 가순궁박씨)의 대립
->정순왕후 사망으로 경주김씨(벽파)가 제거됨 -> 안동김씨(시파)에 의한 세도 정치 시작
세도 정치 -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로 중종조에 조광조등의 사림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
-> 정조때 홍국영에 의해서 변질 :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
-> 천주교 탄압을 계기로 당파에 의한 당쟁의 시대가 종식되고 집권자 일족만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 정권 형성.
-> 안동 김씨 : 순조, 헌종, 철종의 60년에 걸친 세도 정치
->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종식.
- 세도 정치의 폐해: 벼슬을 사고 파는 일이 성행하여 삼정이 문란해짐(벼슬을 사는데 드는
돈을 농민들에게 부담시켰기 때문에)
1. 전정 : 토지세(땅의 넓이, 비옥도, 풍,흉년)로 임란후 급격히 증가했으며 나중에는 황무지,
존재하지 않는 땅에도 세금을 메김.
2. 군정 : 군역을 배 1필로 대신하는 제도. 어린애, 죽은 사람에게도 징수, 당사자 대신 친척
이나 이웃에게 징수
3. 환곡 :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돌려 받는 제도. 고리대금업으로
전락, 강제로 빌려주고 거둬들임.
- 끊임없는 재난 :가뭄,홍수,가뭄(순조 9,10,11년),물난리(순조17년,1817), 전염병(콜레라,
1821년)
결과 : 농민 - 소작농, 도둑, 거지로 전락 - 농민반란
농민항쟁
->순조시대 - 황해도 곡산의 농민반란, 홍경래의 난(평안도 농민반란),제주도민의 난(양제해)
->철종시대 - 진주민란(철종13년,1862, 2월), 경상도의 개령,단성,함양,선산,성주,밀양,거창
(3월) 전라도의 익산,함평,회덕,순천,부안,금구,장흥(4월), 충청도의 공주,은진,
연산,청주,회인(5월)
=>내부적으로는 참고만 있던 농민들이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외부적으로는
이양선의 출현, 천주교의 전래 등으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박문수(숙종 17년,1691 ~ 영조 3년,1756) : 불의를 뿌리 뽑은 암행어사의 상징으로 33세에
과거에 급제해 영조3년(1727) 지방의 수령들이 환곡을 올바로 실행하는가를 감시하는 직책인
감진어사로 임명
대동여지도
- 철종 12년(1861) 김정호가 완성.
- <청구도> : 순조 34년(1834) <대동여지도> 전에 만든 지도로 경선,위선을 사용,고을의 경계,
산, 강, 나루, 성곽의 정확한 위치 표시.
- <청구도>에 표시 못한 산, 강, 도로, 제방, 역사적 사적까지 표시
- 제작목적 : 외침과 내란 대비, 조세, 농사등의 나라 경영에 이용.
지방의 풍속과 민정을 살핌.
- 대원군에게 외면 당함.
- 청일 전쟁 때 일본군의 군수 물자 수송과 군사작전에 사용된다.
실학
- 나라 안팎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데 대해 서얼, 남인 출신등이 주자학을 비난, 정치,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등장.
- 다양한 학문 연구( 정치, 경제, 군사, 지리, 농학, 자연과학등)
- 학문이 현실 개선에 이바지 해야 한다고 주장
- 옛 성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모순이나 불합리를 대상으로 실증
적인 연구를 한다.
- 영조, 정조, 순조 시대에 절정을 이룸
- 실학의 학파
중농파,경제치용학파, 성호학파 : 성리학을 반성하고 재검토하여 변화된 현실에 맞게 적용,
사회개혁의 방향을 제시->토지제도의 개혁이 중심
중상파, 이용후생파, 북학파 : 성리학 거부->상공업 발전이 개혁의 중심
- 영조시대
- 토지, 행정제도의 개혁과 연구
- 이수광(실학의 선구자), 유형원(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갖춤), 이익(실학을 하나의 학파로
끌어올림), 한백겸, 김육, 안정복
- <지봉유설> <동국지리지> <반계수록> <성호사설> <동사강목> <색경>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고사신서> 등
-정조시대
- 청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고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는 청의 문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
- 상업, 수공업의 발전 주장.
- 대도시에서의 일상 생활 개선
- 놀고 먹는 양반들 비난
- 박제가<북학의>, 박지원<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호질>, 홍대용<연기>,
이덕무 <입연기>
-정약용
- 영조38년(1762) 6월16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귀농-약용(15세에 결혼,관명으로 바꿈),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나 1800년 정조가 사망한 후 노론 벽파에 의해 남인 시파 제거
방법으로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지고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은 신유사옥 때 체포,
- 헌종 2년(1836)에 사망.
- 가장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실학의 집대성자이다.
-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재검토에서 시작.
- 귀양살이 시절 의학, 농학, 정치, 경제등 연구.
- 거중기 발명 - 정조 16년(1792), 수원성 축조 당시 사용.
- 천주교는 학문으로 접근했음.
- <경세유표>정치조직, <목민심서>지방행정 개선책, <흠흠신서>형벌,
<강계고><대동수경>지리, <마과회통>의학
- 실학이 남지 못한 이유 : 조선후기는 지배층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로웠던 서민층에 의해
조선 이전의 문화가 되살아나고 있었으며, 실학자들도 그 부분을 수용하여 우리 문화의
되살림을 연구, 계승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거기에 외래 문화를 수용해 완성도 높은
사회개혁을 이루려 했다. 그러므로 실학은 우리 역사 속의 우리 문화로 주체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 실학자들의 대부분이 천주교인으로 여전히 주도적 세력이었던 성리학파의 눈치를 보며,
탄압을 받는 위치에 있어 학문적으로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2. 창조적인 사회적 대안으로 자리잡기 이전에 유럽의 문물이 먼저 밀려 들어와 연구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다.
천주교
- 16세기 중국에 전래 -> 사신들에 의해 17세기 조선에 소개
- 초기 : <사학>이라하여 서양문물(학문)로 받아들임. 장례의식 문제등 전통적 유교사상에는
위배되었으나 또다른 학문으로 생각, 심한탄압은 없었다.
-순조 즉위 -> 천주교 박해 시작
-신유사옥 : 순조 1년(1801) 정순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으로 "서학 금지 교서”
“오가작통법(치안유지법)”등
천주교 탄압 시작. - 주문모의 죽음
황사영 백서 사건
서양세력의 침투 경계
-천주교 탄압의 실제적 의미 : 신유박해는 정치적 숙청이다.
명분 : 인륜을 무시하는 사교를 뿌리뽑아 나라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
실제 : 노론 벽파들이 정적인 남인 시파와 진보적 사상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
-> 신유박해 후 실제로 남인 시파는 완전히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 순조 31년(1831) 조선 교구 창설
- 기해사옥 - 헌종 5년 (1839) 순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김씨에 의해 다시 탄압.
천주교의 뿌리를 뽑기 위함.
헌종 11년 10월 -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이 조선에
들어왔으나 헌종 12년 9월 15일 새남터에서 사형당함.
동학
- 철종 11년(1860) 4월, 최제우에 의해서 만들어짐.
- 외래문화를 바탕으로한 서학에 대항하는 것으로 동방의 도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짐
- 유교, 불교, 선교, 무속, 천주교의 원리가 모두 들어가 있다.
- 평등 사상 주장 - “사람이 곧 하늘이다.”
- 철종 14년(1863) 11월, “서학과 다름없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나라를 망친다”
는 죄목으로 최제우가 체포되어 고종 1년(1864) 3월 처형당함.
- 은밀히 민중들 사이에서 퍼져 민족 종교로 발돋움하며,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문화
조선전기 ; 양반 중심의 문화
조선후기 ; 18세기 상품유통경제의 발달로 평민, 중인, 천민등에 의한 문학, 예술
->서민 문화 (판소리, 탈춤, 민요, 민화등)
이야기 한국역사 9 - 1 근대화의 길
* 1860년대 나라 안팎의 사정
1) 3대 60년에 걸친 세도정치로 왕권 약화.
2) 동학과 천주교의 교세 확장
3) 서양세력의 침략 위협
* 대원군의등장
-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의 넷째 아들로 조선26대 고종의 아버지.
- 철종때 안동김씨가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종친에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미친척 구걸하면서, 상갓집개,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 시정인과 어울려 서민생활을 체험하며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었고 마음속으로
야망을 키우면서 왕실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익종비)의 조카인 조성하, 조영하와 친분을
맺고 조대비에 접근,둘째아들 명복을 조대비의 양자로 들여 익종왕의 후사를 계승하도록
묵계.
- 1863년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가 국새를 쥐고 중진회의를 소집,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
으로 하여금 익종의 후사를 잇게하고 조대비가 섭정권을 갖음
- 이로써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쥐게됨
*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1. 세도정치를 없앰 -> 안동김씨 축출
2. 고른 인재등용 -> 문벌, 당파, 신분을 초월한 인재 등용.
3. 서원정리 -> 전국 650여개에서 47개만 남게됨.유생들의 무위도식,파벌조성,건축,수리등의
명목으로 지방관헌과 부호들로부터 막대한 돈 염출, 당쟁조성등의 폐단.
4. 군포 -> 호포 : 양반들도 강제로 세부담
5. 환곡제도 -> 사창제도 : 관리들의 부정 불법을 엄벌
6. 비변사 폐지, 의정부 부활 -> 삼군부를 두고 군정 분리를 통한 국방강화
7. 사회악습개량 -> 복식의 간소화, 사치를 금함
8. 경복궁 중건
->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왕권강화의 상징으로 경복궁 중건을 단행하나 경비 염출을
위해 단행한 여러 가지 조치가 백성들의 원성을 자아내고 민심이 그를 떠나게 했다.
@ 당백전 ; 기존의 엽전 1백배의 가치를 갖는 화폐를 남발 중건비용에 충당,
화폐가치가 폭락 화폐체제가 대혼란에 빠지게됨
@ 문세 ; 4대문에 드나드는 우마차나 물품에 대한 통행세
@ 원납전 ; 돈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내는 일종의 헌금
@ 부역동원
대원군의 과감한 개혁 정치는 오랜만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하나 계속되는 큰 공사로 세금은
높아졌고 백성들은 부역에 시달리고 당백전이 발행되면서 물가는 치솟아 결국 백성들만
힘들게 되고 민심이 그를 떠나게 된다.
9. 천주교 박해 : 대원군은 불우한 시절 남인들과 사귀었고, 러시아의 무력 침공 가능성이
우려될 즈음 남인 천주교 신자 남종삼이 " 조선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영국, 프랑스의 연합
으로 러시아를 막아 줄테니 조선에서 천주교를 믿게해 달라" 고 제의.대원군은 조정대신들의
강력한 유교적 반대에 부딪히고, 실각을 모면키 위해 천주교 박해를 감행. 대원군은 국제
정세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고 국내정치의 수준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 -> 대원군의 국제,
국내 정치면에서의 한계
10. 통상수교 거부정책
11. 척화비 건립 -> 서양오랑케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화해를 주장
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자손 만대에 경계시킨다.
* 서양세력과 충돌
1. 병인양요 ;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일어난 사건.
1) 배경: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의 힘을 얻어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주고
천주교를 인정하라는 교섭이 실패. 이로인해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인 8쳔여명이
새남터에서 처형됨.
-> 살아남은 리델 신부와 김영희등 교인이 청으로 탈출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보고
2) 경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침입,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패한 뒤 철수하면서
외규장각을 불태워 버리고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도서와 문화재들을 약탈, 현재
프랑스의 여러 도서관에 흩어져 보관.
2. 신미양요 ; 1871년 고종 8년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1) 배경:미국은 산업화에 성공한 뒤 18세기 말부터 상품시장을 확보하려고 동양에 진출,
1886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사건에 대해 따지기 위해 왔다하나 본질적으로는 이를
계기로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고자 조선원정을 계획.
2) 경과:미국은 덕진진과 토지진 점령. 이재현이 이끄는 조선수비대는 광성진에서 미국의
상륙을 저지했지만 350명의 전사자를 내며 패함. 하나 수비대장 이장령이 5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습을 감행, 미국측을 가까스로 몰아냄.
3) 결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나 대원군의
정치생명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경복궁의 중건과 서양세력의 잦은 침입으로 국가 경제는 파탄으로 치닫고, 대원군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극에 달했다.
3. 오페르트의 도굴사건
병인박해때 살아남은 프랑스 신수 페롱신부는 유태계 독일상인 오페르트와 함께 차이나 호를
타고 충청도 홍주군 행남도에 닻을 내림. 이들의 목적은 각자 다름.
페롱신부 : 남연군 묘지 발굴후 부장품으로 천주교의 승인을 얻으려 했음.
오페르트 : 부장품에 대한 욕심
-> 천주교 교인에 대한 무차별 대량 보복, 조선 민중들의 서양인에 대한 배척 고조
대원군의 통상수교 강화의 계기
* 정감록
안팎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백성들 사이에 "이씨조선은 망하고 정씨의 세상이 된다."
는 <정감록>에 쓰여진 말이 유행하게 됨.
- 정덕기의 난
- 이필제의 난 - 진주민란의 주동자.
* 대원군의 하야
- 장성한 고종의 친정의욕을 민비가 고취시키면서 세력을 넓혀감.
- 1868년 완화군 사건이후 민비와 사이가 멀어지게된 대원군이 민비의 아들이 대원군의 산삼
처방으로 죽게 되자 극도로 갈라지게됨
- 민비는 양오빠 민승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실각한 안동김씨와 손을 잡음.
- 조영하, 조성하, 대원군의 형 이최응, 장남 이재면까지 엉입
- 민비는 최익현을 통해 퇴진상소를 올리게하였고 대원군의 궁궐 출입문을 폐쇄시킴
- 1880년에는 개화파가 형성되어 - 고종의 친정 선포.
* 통상 개화론의 대두
19세기 후반 봉건사회가 무너져가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판을칠 즈음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을
구하고자 여러 가지 사상이 대두된다. 개화사상, 위정척사사상, 동학사상이 대표적사상이다.
개화사상
- 1860년을 전후하여 중인과 양반 출신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실학파의 북학론을
이어받음
개화운동 전개
- 부국강병하려면 통상 개화해야 한다는 주장
- 박규수,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김옥균, 박영교,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등
* 일본의 침략과 운양호 사건
1854년 미국 페리제독에 의한 미일 통상조약이후 일본은 급격한 사회변혁을 겪으면서 제국
주의 경향을 띠었으며 차츰 정한론이 일기 시작되었다.대원군 집권시절 조선의 접근이 여의치
않아 부산 동래에서만 활동하던 일본이 대원군의 위세가 기울 즈음 통상외교를 시도, 통상
외교에 대한 답이 늦어지자 1875년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에 입항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 이에 포병이 포격을가하자 일본함대는 일제히 포격개시, 초지진을 산산히 무너뜨리고
물러남.다음날 다시 영종도 점령, 약탈을 자행함. 하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아무 조취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 왜관의 일본인들은 더 활개를 치고 다녔고 운양호 사건의
책임을 묻기위해 군함 춘일호가 부산에 들어왔다.
- 강화도 조약
운양호 사건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던 민비조정은 일본의 춘일호 등장에 긴장을 하고 통역관
오경석을 보내어 일본의 의도를 묻게한다. 회담이 이루어 지고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는 일본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한 내용이다. 개화파들은 강화도 조약을 자주적으로 체결하려 노력
했으나 조선조정의 무능력 때문에 여의치않았다.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더할나위 없는 발판을 마련해 준 셈이다.
<참고문헌>
새롭게 읽는 명성왕후 - 유홍종
이야기 한국근대사 - 이현희
근대로 가는 길 - 김정환
이야기 한국역사 9 - 2
1.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 고종 13년(1876)
-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 : 12개 조항
- 1차 수신사 김기수 파견(강화도 조약의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기 위해)
* 고종 17년(1880)
- 2차 수신사 김홍집 파견(주일 청국 참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갖고 옴)
- 통리기무아문(개화 정책 추진 기구)을 설치
* 고종 18년(1881)
- 신사유람단(군사, 교육, 공업, 시설 등을 둘러보고 나라를 튼튼히 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이 목적)을 조직해서 일본에 보냄
- 영선사(신식 무기의 제조와 사용방법을 배우기 위함이 목적)를 청에 파견
- 별기군(신식 군사 훈련) 설치
- 이재선 사건 : 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사건(발각)
* 고종 19년(1882)
- 임오군란 : 민씨 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심화된 모습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군인의 항쟁
-> 실패(대원군 정권 장악)
-> 대원군은 일본, 청의 제국주의의 내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 정책에 의지하여
사태를 수습 하려다 청에 납치
-> 민씨 정권이 들어섬(청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복종)
-> 제물포 조약(일본 측의 요구를 다 받아들임
-> 서구 여러 나라와도 조약 체결
* 고종 20년(1883)
- 수신사 파견
- 기무처, 감성청, 박문국, 우정국, 치도국, 순경부 창설
-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 정식 국기로 선포
2.개화당의 3일 천하
* 고종 21년(1884)
- 갑신정변 : 개화당이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킴
1) 바라보는 시각
-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 근대 국민국가를 추구한 변혁
- 일본이 조종한 결과 친일 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일어난 타율적인 쿠데타
- 정변 이후 자주적인 개화를 담당할 주도세력이 거의 정계에서 배제됨으로써 자주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외세의 반복된 침탈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책임론적 시각
2) 주동인물
- 급진 개화파(수구파와 청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무력 동원하여 투쟁)
: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역관 오경석 + 의관 유대치의 영향으로 양반 자제들 중 개화세력
@ 무력 혁명을 결정한 이유
a. 수구파의 위협과 탄압
b. 청.불 전쟁에서 청이 연패를 거듭함으로써 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 약화
c. 러시아 남하 등 한반도 정세의 위기
- 온건 개화파(현재의 정권을 점진적으로 개량하여 개혁) :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3) 진행 과정
-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거사 돌입
- 별궁 방화 실패
- 우정국 옆집에 방화
- 민영익 부상
- 고종, 민비 설득(청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거짓 고함)해서 경우궁으로 옮김
- 개화파와 일본군 왕궁 호위
- 창덕궁으로 옮김, ' 정강' 발표(p.151)
- 청군 개입(민씨, 지원요청)과 일본군 철수
- 3일 동안 정권 장악, 실패(오적: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4) 실패원인
- 청의 무력간섭과 일본의 배신
- 개화파의 역량부족 :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
- 정세 판단에 실수를 범한 점
5) 의의
- 근대화와 부국강병, 민족자주권의 수호를 목표로 전개된 진보적 운동이었으며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
* 고종 21년(1884)
- 한성조약(갑신정변의 사후 수습책으로 조일 체결)
- 천진(텐진)조약 : 청. 일본
3. 동학 농민 전쟁(1894)
: 삼례 집회-상소운동과 벽보투쟁운동-보은. 원평집회를 걸쳐 종교적 테두리를
벗어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의식을 결집시켰고, 후에 무장봉기에 나섰다.
1) 시대 상황
-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우리 농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 지주들은 쌀을 팔아 이익을 얻어 땅을 사들이고, 지방관리의 착취와 일본상인들의
수탈이 심해짐. 1862년 진주 중심으로 민란이 시작되어 1890년에는 전국적인 현상.
- 1892년 '교조 신원 운동'(이단으로 규정된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일어난 운동)
공개적으로 전개
- 집회가 주로 동학이 주도한 모임이지만 이중에는 동학을 통해 맺힌 한을 풀려는 자들이
대거 참여(국가 관리들, 지주, 상인들의 착취에 시달림 받던 소외 계층이 동학의 변혁
사상에 호응하여 집회에 참석)
-> '포교 공인'이라는 종교적 구호는 사라지고 '외세 척결'이라는 정치적 투쟁 구호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종교적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실질적인 현실 변혁을 통해
국가 민중을 구제한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2) 주동 인물
* 최제우 -> 북접 - 최시형 - 보은집회
-> 남접 - 서장옥 - 원평집회
@ 전봉준(1854~1895); 본관 천안, 자는 명숙, 호는 해몽. 녹두장군
- 고부 민란(1894. 1) : 군수 조병갑의 부정과 비리, 수탈에 저항하는 항쟁
- 황토현 전투 -> 관군 패배로 청나라에 원병 요청(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들어옴)
- 장성 전투
- 전주화약(전주성에서 화해의 약속-1894. 5)이후 농민군 해체
- 고향으로 돌아가 집강소(농민의 자치 기관)설치 : 최고 책임자를 집강이라 하고, 성찰(질서,
치안 유지), 동몽(교육담당), 집사(재정관련 업무), 서기가 있다.
- 상황; 정부에서 청과 일본군에게 철수 요청, 일본은 '갑오개혁'추진하며 농민군을 토벌하려 함
-> 일본 상대로 다시 봉기 ->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패배(1894. 11)
- 농민 전쟁 실패
3) 의의
- 민중들의 항쟁을 결집하여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 '만민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념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진보적 성격이라 볼수 있다.
- 반봉전, 반침략 전쟁을 일으킨 점은 자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농민군에 봉기를 호소한 사발통문
- 조선 시대에는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 거사의 명분을 적은 '통문'이라는 것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통의 통문은 오른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써 넣게
되어 있었으나, '사발통문'은 사발을 뒤집어 놓고 거사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원을
그리면서 써 넣게 되어 있었다. 이는 거사가 실패하더라도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하는 동시에 모두가 연대 책임을 진다는 단결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야기 한국역사 10 - 1
* 1894년
청일전쟁 : 동학 농민 전쟁 후 청나라는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일본은 정치개혁이란 명목으로
민비를 내쫓고 대원군에게 정치를 맡겨 대신을 바꾸고 청나라와 단절을 꾀하게 하였다.그리고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함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이로써 조선이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는 끝이나고 일본의 지배하에 서서히 놓이게 된다.
--> 시모노세끼회담 : 청나라의 조선 지배권 포기를 통해 일본은 만주 침략의 발판, 조선침탈
갑오경장 :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하고 정치, 경제, 행정, 사회면
에서 개혁을 실시 개혁의 내용은 근대적 성격을 띄는 듯하지만 일본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 1895년
을미사변 : 민비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배척하게 되자 일본 공사 미우라는 민비를 살해한다.
춘생문 사건
단발령
을미의병 : 반일 의병투쟁 : 일본화에 반하여 농민군, 유생, 양심적 봉건 관리가 모여 대대적인
의병 활동이 일어남 -> 봉건적 사고방식에 의해 해산 -> 농민 의병 -> 활빈당
* 1896년
아관파천 : 일본 침략에 반대하며 러시아 공사관에 고종이 피신하여 1년 동안 정사 처리한다.
일본 침략에 반대하여 일본 침략 정책인 개화정책을 이루지 못하게 하지만 국가적인 수치이다.
시베리아 간선 철도 부설 (1893) 러시아 극동 진출 본격화
-> 삼국간섭 -> (러일의 각축장)을미사변
협정 ( 항만교환론. 38도선경계 : 한반도 분할론, 한반도 중립화론 )
독립신문 : 한글인쇄(한글판, 영어판)로 백성들을 깨우침
개화의식 고취, 근대민주주의 사상을 심어 줌으로 애국계몽운동고취
외부 : 열강의 이권침탈, 식민지 예속화
내부 : 개혁실패, 조정무능비판, 자주권 상실
독립협회 :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 단체 - 도시지역 국한, 적극적 투쟁방식이 아님
개화파 고급 관료
목적 : 나라독립과 자강개혁
활동 : 독립문, 독립공원 세우기 - 독립의 의지 알리기
젊은이 교육 (강연회, 토론회) 효과적인 의사 표현으로 민주주의
행동성향 익힘, 1896년말 회원 2000명
* 1897년
대한제국 : 대외적인 완전 자주 독립 선언
* 1898년
만민공동회 : 정치모임 (조선 관민이 모여 나라 일 토론)
내용 : 정치를 바로 잡고 외세 물리침, 국왕의 관리 임용권 제한
근대적 조세 사법제도 확립
의의 : 자주독립의 기초, 과도적 의회정치
황국협회 - 보부상 중심
* 1899년
독립협회 해산
러일 전쟁 : 승리 (일본)
러시아의 남하정책 (영국, 미국이 일본 지원)
일본의 조선에서의 지배권 굳히기
* 1904년
러시아 떠남
강점 1단계 : 한일 의정서
강점 2단계 : 1차 한일협약
포츠머스 조약
강점 3단계 : 을사보호조약(한일협상조약 1905) - 통감통치 (외교권 박탈)
을사5적
강점 4단계 : 한일신협약 - 정미 7조약
합방촉진성명 ( 제국주의적 침략
군사적 강압
자력으로 이길 수 없음 )
한일 합방
* 일본의 독도 침탈
이야기 한국 역사 10 - 2 국권 회복의 길
애국 계몽운동의 시작
- 사상 기반 ; 사회 진화론(적자생존, 약육강식)
- 목표 1. 민족의 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
2.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통해 부국강병 이룩
- 참여 ; 개화파,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대한제국의 관료, 유교 지식인
상공업자, 부농층.
- 시작 ;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한반도 침략 인식. 근대화 운동 -> 국권 회복 운동
- 계몽주의자들의 착오 ; 사회 진화론은 제국주의 논리
강경파 - 강자 논리 수용 - 일제에 항거
온건파 - 약자 논리 수용 - 타협주의, 개량주의
정치 사회 결사 운동
1. 보안회(1904)
2. 헌정연구회(1905)
3. 대한자강회(1906) .
4. 대한협회(1907) -> 변질 : 1908년 회장(김가진), 부회장(오세창)
일본의 실체를 알지못함. 식민통치에 이용당함.
문화사업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의 대중적 확산
1. 사립학교 설립(보성, 양정, 숙명, 진명 등)
2. 언론(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소년)
(국외: 공립신보,합성신보, 해조신문, 대동공보, 권업신문)
3. 출판(사립학교의 애국 교과서, 서적 - 광문사, 박문사)
민족의식을 일깨운 국학운동
* 국권을 지키려는 국민의 자각 ->국사, 국어 연구 ->민족교육운동
: 역사교과서, 외국의 건국사, 흥망사, 위인전, 한국인 영웅전 저술, 국문연구
국채보상운동
* 국채보상운동이란?
1904. 8. 한일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된후 일본에 차관을 들여올 것을 강요 당함. 강압적
차관으로 인해 국권이 유린되고 예속과 약탈이 심해질 것을 우려하여 애국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나라빚 갚기운동’이 전개되었다. 언론의 도움으로 크게 확산.
* 실패의 원인
1. 일제의 탄압과 이간 책동
2. 참가세력이 조직적으로 통일되지 못함
3. 지도층의 지도력 부족
4. 보상방안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못함
* 의의 :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빼앗으려던 시기에 민중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고 항일의식을 북돋아 주었다.
헤이그로 향한 특사
-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이준, 이상설, 이위종) 파견
- 목적 :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알려 도움을 청한다.
- 경과 : 을사 5조약으로 외교군을 상실했으므로 회의 참석을 거절당함
- 결과 : 일본의 침략야욕 더욱 고조됨
1907.7.20. 광무황제는 융희황제(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줌.
비밀결사조직 신민회(1907. 4. 안창호)
- 구성원 : <대한매일신보>중심의 계몽운동가, 상동교회의 중심 인물, 구한말 군인출신
인사, 평안도 일대의 상인과 실업가 집단, 미주하와이 지역의 공립협회 인사
- 목표 1) 국민에게 민족 의식과 독립 사상을 고취할 것
2) 동지를 발견, 단합하고 국민 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3) 교육 기관을 각지에 설치하고 청소년 교육을 진흥할 것
4) 각종의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무력을 증진할 것
- 구체적 방법
1) 계몽운동 전개 : 표면적 방법으로 신교육 보급, 열악한 토착산업 육성.
2) 독립전쟁대비 : 실질적방법으로 국외에 무관 학교 설립, 독립군기지 및 독립군 창건.
신민회의 구국활동
청년 학우회, 대성학교, 자기회사, 태극서관
국외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
- 신민회의 독립전쟁 전략
: 국외에 독립군 기지 창건 ->무관학교 설립, 독립군 양성 ->국내에 진격 ->독립전쟁
반일 의병 전쟁
의병 항쟁
- 1907년 융희황제 즉위후 일본은 한일신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추진
- 박승환의 자결로 군인들 봉기, 해산된 군인들 의병에 참여, 의병투쟁 가속화
- ’13도창의대’결성, 연합의병을 만들어 한성으로 진격
- 실패 : 다른 도의 부대와의 합류 차질, 총대장 이인영의 부재, 무기의 열세
<남한대토벌 작전> 1909.9.1 ~ 10.30
가장치열하게 항쟁했던 전라도 지역의 의병 토벌작전
1907.8부터 계속되던 의병토벌 작전의 마무리
- 의병들의 거취
* 국외 - 연해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3도의군 조직 -> 국내로 진격
-> 일본의 대러시아 외교 -> 무장해제, 감금 -> 독립군으로 전환
* 국내 - 광산노동자, 화전민, 농민으로 복귀 -> 유격전 -> 채응언 의병장의
순국 이후 투쟁은 막을 내림.
<홍범도> - 고종5년(1868) 8.27. 평남 평양 출신, 가난한 농부의 아들
-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당시(14세) 군대에 지원(나팔수)
- 부패한 장교와 싸우고 탈영. 신계사에서 승려로 지내며 반일감정을 키움
- 철령전투 : 홍범도의 최초의 의병 전투
- 홍범도, 김수협, 유인석의 의병부대가 함께 항쟁 -> 패배
- 혼자서 의병투쟁 계속
- 개마고원에서 산포수의 표연대장이 되어 본격적인 의병운동
- 후치령, 삼수성, 갑산읍, 운승리 세곡, 전투에서 승리
- 일본의 의병 탄압강화로 러시아령으로 망명. 13도 창의대에 참여
의열투쟁
<정명운, 장인환> - 스티븐스 처단의거(1908. 3.23. 페리부두에서 저격)
@ 스티븐스 :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보호국'으로
삼도록 외교적 역할. 광무항제의 강제 퇴위, 정미 7조약 체결에 관여. 조선을
모독하는 발언
* 의의 1)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한민족이 환영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던
일제의 침략성 폭로.
2) 조선 백성들의 국권 회복의 의지를 보여줌.
3) 조선인의 애국심 각성의 계기가 되어 이후 항일 의열투쟁에 큰 영향.
<안중근> - 이토 히로부미 저격
@ 이토 히로부미 : 초대 통감. 일본의 조선 강제 병탄에 큰 역할. '기유각서' 체결
-> 무력에 의한 투쟁 주장
-> 1909.9.26 하얼빈에서 이토 저격, 체포
-> 재판에서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
-> 1910.3.26 여순감옥에서 사형당함.
* 의의 : 청나라와 일본 사람들은 물론 다른나라에까지 대한제국의 살아있는 혼을
뚜렷이 보여줌.
<일진회>
- 대한제국 말에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그 실현에 앞선 친일단체(1904~10)
- 송병준이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윤시병, 유학주등과 유신회를 조직했다가 20일
일진회로 고침.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 일진회 통합
- 강령 : 국정개혁(4대 강령), 취지 : 독립 추구 ->표리부동한 상투적 구호
- 1904년 일진회선언서 ‘ 일본의 지도보호를 받기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된다.’
- 러일전쟁중 수송,정탐,노역등 수행(일군을 북진),경의선철도 부설 공사, 고종의 양위 강요
- 자위단 조직 ->의병토벌, 의병을 폭도로 매도.
이토 저격사건 ->사죄단, 동아찬영회조직
- 합방성명서 ‘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 앙국은 합방되어야 한다.’
-> 의병들 일진회 회원 공격, 국민신보 습격,
- 병합후 일제에 의해 해산
<송병준 1858~1925?> - 함경남도 장진 출신(서북,관북 정계진출 어려움)
- 민영환의 식객, 일본인 상인과교제, 김옥균의 동지, 민비의 총애
- 김홍집 내각이 들어선후 체포령 -> 일본으로 망명
- 1904년 러일전쟁중 일본군 통역관으로 귀국, 일진회 조직
- 1906년 헤이그 특사 사건때 광무황제 앙위 운동
- 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을 지냄
- 한일합병 청원서 제출
- 합병후 자작작위 수여,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백작작위
<이완용 1858~1925> - 당대 권력가 민씨집안의 사위인 이호준의 양자
- 수구파(척사파) -> 개화파(친미파, 미국을 다녀온 후)
친러파 -> 친일파
- 독립협회 초기 창립총회 위원장, 협조적 태도
- 을사 5조약에 찬성, 을사 5적의 우두머리
“지난날의 모든 조약이 일방적으로 강요에 못이겨 체결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나라는 늘 그
조약의 글자 수정을 못하여 후회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운 조약은 서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직 불가라고만 말해서는 안된다. 조약문 중에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서 제정해야하니
3조에 있는 통감밑의 외교, 두 글자를 명언하지 않아 훗날 폐가 있을 듯하다. 외교권은 우리
나라 실력이 충실할 적에 반환될 것이니 연한을 정할 필요도 없다.”
“나는 친일파다. 어차피 넘어갈 나라이니 일본과 손잡고 희생을 줄여야 한다.”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p75)
- 헤이그특사 사건때 송병준과 함께 광무황제 양위 강요
-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정미 7적)
-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합방후 백작 작위. 조선총독부 고문에 취임
- ‘일선의 융화’주장
- 1919. 3.1운동때 독립투쟁 비난, 3차에 걸친 경고문 발표
- 1920년 후작이 되어 죽을때까지 일본에 충성
==>직업적 친일파 : 개인의 영달과 재산 갈취를 위해 친일 부역배 또는 매국노가 되는 것.
->한일합병조약 체결(1910. 8. 22) 후 대한제국 ->조선. 통감부 ->조선총독부
10월 1일 데라우치 통감이 초대총독으로 임명
1) 대한제국의 내각을 없앰
2) 76명의 왕족, 정부대신들을 귀족으로 임명, 효자, 열녀상, 죄수 방면
3) 전국에 헌병대 배치 -> 경찰의 감시 강화
4) 모든 민간인 정치단체 해산, 신문 폐간
<읽고 나서>
이번 단원에서는 우리 근대사에 명멸했던 몇 명의 인물에 중점을 두고 보았습니다.역사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긴이도 있고, 치욕적인 이름을 남긴이도 있습니다.근대로 들어선 역사를
접하고 보니 단순히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그 지식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달하고픈 욕심
만으로 끝낼 수는 없음이 느껴집니다.우리가 역사 공부를 이토록 열심히 함은 역사를 스쳐간
그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보면서 우리 부모들이 먼저 올바른 정신과 삶의 자세를 배우고,
그런후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가장 명예롭고 의로운 길을
택할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 역사문제 연구소 편/ 역사비평사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 우리누리 지음 / 소담
이야기 한국역사 11 - 1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항일 투쟁
1905년: 을사5조약 체결
1906년: 통감부 설치-외교권 대행
1907년: 정미 7조약
1910년: 한일병합- 힌국신민화 침략의 완성
★무단 통치시기(1910-19)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마련키 위해 전재적인 군국통치체제.
1.통감부-조선총독부
-조선총독은 일본 국왕직속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군수 통수권부여.
2.헌병경찰제도
-헌병이 경찰 및 군사 경찰업무까지 담당
-조선인의 생활을 철저히 탄압
105인사건: 민족지도자의 집결체였던 신민회 말살목적으로 조작된사건. 안명근이 테라
우치 암살기도 사건을 계기로 양기탁, 이승훈, 김구등 항일 사상을 가진사람을 투옥.
3.식민지 노예교육
-조선인의 우민화(愚民化), 언어통일
-「조선교육령」: 식민지 수탈을 위한 조선인을 하층일본인으로 키우려 함.
4.역사왜곡과 문화재 약탈
-1916년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공포 (한민족의 문화재를 약탈하기 위한편법).
학술조사 명목으로 각지역의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적과 출토품등을 도굴 파괴.
-박은식의 「한국통사」:일제의 왜곡된 한국 역사교육과 침략성을 폭로.
-식민지 사관정리 : 일본이 고대로부터 한반도 남방을 식민지로 경영
→‘임나 일본부설’‘정체성론’‘봉건사회결여론’‘타율성론’.
5.식민지 종교정책
조선의 모든 종교에 일본의 신도 정신을 불어 넣어 한민족의 정신을천황제의
위엄앞에 복종시키려함.
6.산업수탈
-1908년 동양척식 주식회사:한반도를 착취하기 위해 세운 특수 국책회사
-1908년「산림령」
-1912년「토지 조사령」실시→전국토지의 40%약탈(한반도 지배비용으로 사용)
:임야소유자들에게 지적과 면적도를 첨부하여 신고하게함.
⇒ 총독부소유 (일본인들이 한반도 산림을 맘대로함.)
-1912년「회사령」:조선총독의 허가 없이 회사를 맘대로 설립할 수 없게함.
⇒민족자본의 성장억제, 한국을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한 원료공급지 및
상품판매시장으로 만들려는 목적.
-1915년 「조선광업령」
광업독점권 강화(전체광산의 80%소유, 한국인0.3%소유)
「조선어업령」:황실 및 개인어장강탈.
※한국인의 산업이 일제에 종속됨에 따라 민족의 존립자체가 말살되는 상황에 당면하게
되었고 무단통치로 인해 독립운동은 더욱더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됨.
안팎에서의 민족의 저항 : 일본 헌병과 군대의 무자비한 탄압속에서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은
지하조직속으로 옮겨 활발히 이어졌다.
※비밀 결사 조직
대한독립의군부:의병계열
민단조합:유생
기성볼단:계몽운동계열
조선국권회복단:국외운동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군에게 군자금 지원
대한광복회:공화국 건설 목표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고 군자금 지원-1918년 관련자 체포.
조선국민회:평양에 재학생과 교사중심⇒1918년해체
⇒3.1운동 학생동원, 독립선언서 보급,지하신문제작
※민족을 살리는 교육 : 총독부의 민족교육탄압으로 사립학교는 문을 닫게됨
개량학교:민족교육의 장이 됨
만주
-서전 서숙: 이상설이 북간도 용정에 세운 국외에 세운 최초의 민족교육학교.
근대 학문 독립군 양성학교.
-명동서숙: 민족교육 군사교육 양장과 양봉법.
-간민교육회(간민회):민족교육운동
-신흥강습소: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
⇒일제는 1907년 통감부간도 임시 파출소를 세워 만주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음
-동제사: 신규식이 세움.임시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의 공식단체로 독립운동은 물론
조선인들의 직장알선, 중국학교 입학주선.
러시아
-대한청년교육회
-승무학교
-야학
-한족회중앙총회(1917): 1914년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일본 동맹관계→러시아
지역에서 조선인들의 민족운동불허
≒1918년 일제는 시베리아 점령후 조선인민단 조직→조선인 사회분열
미국
공립협회((1905년):대한인-국민회
=어려운 이민생활속에서도 군사훈련을 받으며 일제와의 결전을 준비.
※주시경
-한글연구와 보급을 통해 일제에 저항.
-한글연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움
-저서
1908년 국어문전음학
1910년국어 문법
1914년말의 소리
※박은식
-역사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민족적인 역사서집필-한민족의 각성을 촉구, 겨레의 얼을 지키도록하는데 영향
-만주애서 신규식 홍명회등과 동제회단체만듬-애국교육을 맡음
-강우규 의거 계획
-저서 : 대동고대론사,한국통사,안중근 의사전
※신채호
-새로운 학문을 통해 한민족을 눈뜨게 하려고 한 학자,언론인.
-일제의 민족사관을 부정하고 역사적 사실을 통해 민족사관을 세우려 노력.
-저서 :조선 상고사.
3.1 민족 해방운동의 태동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후 폭압적이고 착취적인 식민주의 제국주의→정의와
평화,인도주의와 민족주의
-1917년 러시아 제국주의→볼세비키정권.
-미국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발표
-대한인국민회는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본내기로 결의했으나좌절 →일본에 있는 유학생 독립운동가에게 큰용기를 줌.
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중이던 한국인 남녀 학생들이 도쿄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
“2.8 독립선언서는 한일 합방이 한국민에 뜻에 반하는 것인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니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땐 우리민족이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을 선언.”
∵2.8독립선언은 국내의 민족지도자 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의 계기가 됨.
3.1운동
-손병희를 대표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인사고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이 3월1일 오후2시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경찰에 통보 자진체포.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광무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많은 군중과 합세하여 평화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감.
-총독부는 평화적시위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이 학살 부상 투옥됨.
민족대표47명 내란죄구속.
∵의의: 대내적으로 우리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내고 온민족이 항쟁에 참여하여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유관순
-1903년 3월15일충남천안 목천에서 태어남.
-1914년 천안 아우애장터에서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
-일본헌병의 가혹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당당히 조선의 독립을 주장.
-1920년 잔혹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남.
-일제에 대항하여 끈질기고 강인한 저항정신을 보여줌.
이야기 한국 역사 11 - 2
1. 기만적인 문화 통치
1) 무단 정치 -> 문화 정치
-무관뿐 아니라 문관 출신도 총독취임 가능 => 문관 출신 총독은 한 사람도 없었다.
-헌병 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바꾸고 관리와 교원의 제목, 대검을 폐지
=>특고 형사, 사복 순사, 밀정을 만들어 조선인 생활 감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정치단체를 제외한 결사의 자유 허용
=>동아일보, 조선일보/개벽, 신천지, 신생활, 창조, 폐허, 백조, 문예운동
-조선인의 관리임용과 처우 개선 =>직원 707명중 10명이 조선인
-교육 개선 =>일본의 학제에 맞추어 바꾸고, 식민노예교육, 동화교육강화,
실업중심의 교육
∴폭력과 회유를 교묘히 배합한 문화정치는 전민족적 항일의지가 분출하는
상황에서 일제가 고안해 낸 교활한 식민통치방식이었다.(민족분열정책)
2)토지조사사업, 회사령 -> 산미증식 계획과 회사령철폐
: 조선의 수요 증가 대비, 농가 경제의 향상, 일본 제국 식량문제 해결
1차(1920 ~ 25), 2차(1926 ~ 1934)
※관동대지진 : 지진을 핑계 삼은 관동대학살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1)정부수립운동
-블라디보스톡, 상해, 한성정부에 각각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단일화에
합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민주 공화제)수립
2) 활동시기
①1919 ~ 1921 세계대전이후 국제적으로 혁명운동 고양
ㄱ.인물: 외교독립론자(이승만), 실력양성론자(안창호),
독립전쟁론자(이동휘), 초기 사회주의자들
ㄴ.활동 - 독립신문 발행
-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대표 파견
- 연통제 실시: 상해에 위치한 임정의 국내, 간도지방과 연락망
- 대한민국 임시헌장
-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사건
②1921 ~ 1940 임시정부 침체기
: 독립전쟁론자 탈퇴, 실력양성론자 탈퇴, 외교론자인 이승만 하와이로 활동 무대 옮김
③1940 ~ 1945 활발한 재기 움직임
- 태평양 전쟁
한국국민당세력(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
- 한국독립당결성 + 민족혁명당(김원봉)
- 중국 국민당정부의 재정지원
- 광복군 창설: 일제가 패망하는 시기에 일본군의 맞상대로 하는 독립전쟁
계획을 수립했다는 점
3. 독립군의 빛나는 투쟁
※북·서간도, 연해주가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무대이었던 점
- 지역에 다수의 한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되었고, 우리나라 국경과 가깝다.
▶봉오동전투(1920.6)
-대한 독립군을 이끈 홍범도 부대가 최진동 부대와 함께 봉오동까지 추격한
일본군을 매복작전으로 섬멸한 전투
▶훈춘사건(간도사건, 1920.10.2)
일제가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불태우도록 한 다음 이를 독립군
행위로 몰아 붙인 것으로서 일제가 월경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사건
▶청산리전투(1920.10.20)
북로군정서 김좌진 부대가 삼도구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맞이해서 싸운 이후 이도구와
삼도구의 지역에서 10.26까지 전개된 1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
->일본군의 간도 출병이후 독립군과 일본군과 대결 전투 중 최대 규모, 최대의 전과를 올린
전투
▶경신참변(1920.10 ~ 1921.5)
- 독립군 '소탕'을 핑계로 비전투원 동포에 대한 무차별 학살
▶자유시사변(흑하사변, 1921.6)
-대한 독립군단(1921.4)을 결성하여 소련 시베리아 자유시 알렉세이예프스크 로이동 중
독립군 내부의 군사 지휘권을 둘러싼 독립군 부대 상호간에 무장 충돌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4. 조국 해방을 향하여
1) 독립군의 새로운 편성
- 참의부(동만주 일대)
- 정의부(남만주 일대) - 국민부 - 조선혁명군
- 신민부(북만주 일대) - 혁신의회 - 한국독립군
2) 의열단의 결성과 투쟁
- 의열단(1919.11):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의 우두머리,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일제 탐정, 반민족적 토호 열신 등 암살.
- 살벌한 식민지 통치 아래서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국내외의 조선 사람들에게
항일 투쟁의 의욕을 고취
∴민족 해방 운동의 성장은 컸지만 각각의 운동이 분산적으로 통일적인 지휘나 전략기술 없이
수행되어 연합조직이 형성되지 못한 점, 국내의 민중과 연결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 농민
(원산총파업), 노동자(암태도 소작쟁의, 북률면 소작쟁의, 용천 소작쟁의), 학생(광주 학생
항일운동)의 민족운동이 일어남
이야기 한국역사 12 - 1
1. 조선독립의 대열에 선 농민들
① 원인: 1911년 - 1918년, '산미 증산 계획'으로 농민들은 생존권의 위협
② 농민들 단결의 필요 : 소작인 조합, 소작인상조회, 농민 공제회, 소작인 동맹
③ 한 일 소작쟁의 : 농민들 스스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지킴
④ 구체적 사례 : 암태도 소작 쟁의 p17 - p24
2. 노동자들이 적극적 규모의 조직을 만들다.
① 대상 : 소작농 ⇒ 막노동꾼, 지게꾼, 공장노동자
② 목적 : 식민지체제와 자본가로부터 권리 지키기
③ 발전 단계 : →(친목단체성향) 항구도시 대도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
→(계몽적차원) '조선노동공제회의'<= 지식인층이 이끄는 본격적 노동조합
<= 의의:노동강습소,야학, 노동단체로 발전
→조선 노동 동맹 : 기존 직업별 노동단체합침, 노동자간의 유대강화
→조선노동총동맹 : 연대투쟁의 중요성 인식, 노동, 소작쟁의 해결
: 농민단체와 합침(농민:지주 일제의 탄압
노동자:투쟁경험을 배우기 위해)
→25 : 분리
→27, 조선노동총동맹 창립 : 독자적 노동총동맹,노동자간의 유대강화,파업
투쟁강화,생존권 확보에 필요한 요구
3. 공산주의 운동시작
① 대외 : 1917년, 10월 혁명의 영향 - 러시아한인 활기(민족운동)
1918년 하바로브스키에서 한인회의
-자유종 발간, 군사학교설립, 전쟁과제국주의 반대사업
1919년 : 임시정부와 통합 참여
1920년 상해에서 한인공산당 조직
1921년→ 이르쿠츠쿠파 : 고려공산당조직
→ 상해파 : 국내 사회혁명당과 연합 : 민족해방중시
국내 : 1919년 : 지식인민족주의자 : 민족해방목표
1922년 : 국내 무산계급운동사상 : 청년,노동 농민 운동으로 성장
1923년 : 전국규모, 프롤레타리아중심, 사회혁명
1924년 : 조선청년 총동맹
② 조선 공산당 창당
1925년 : 조선공산당; 화요회,북풍회<= 코민테른 승인
→ 일본 제국주의 완전 타도 (비밀투쟁)
제2차 공산당조직재건 (사회주의 + 비타협적민족주의) → 6.10만세운동주도
1928년 : 3차 조선공산당
4차 조선 공산당 - 혁명노선을 분명히 함
↑→ 지식인,학생중심, 대중 운동 단체 활동을 효과적으로 이끔.
③ 6.10 만세운동 ↖ 일반 민중에게 혁명적 시련을 줌. 실패,동맹 휴학
↖ 융희황제 사망, 국장이용 시위 계획, 천도교 구파와 공동시위
4. 식민지 대중의 창구 언론과 출판
①언론과 출판 : 문화정책 : 조선인 생각과 동태 파악
1921년, 무명회, '언론 자유의 신장과 회원의 권익 보호'
1930년 모두 해체
②신문화 운동
5. 민족 해방 운동의 고양
① 신간회(1927년) ;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의 성격으로 항일 투쟁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통합
→ 강연회,노동야학,교양강좌
→ 1929년,광주학생운동 ⇒조선학생의 강한 애국심과자주독립정신
→ 1929년 해체
②근우회 : 여성해방운동 : 봉건적유물,현대적 모순,불합리성타파,<= 여학교 (신교육,기독교)
③노동자들의 총단결⇒ 원산총파업(p65) 지도자들의 판단 착오로 실패⇒계속운동
↕ → 치안유지법
④김구의 애국단(31년) 이봉창, 윤봉길
이야기 한국 역사 12 - 2
민족의 수난
국외 러시아 한인들의 강제 이주 : 한인들에 대한 오지추방 계획 - 소비에트 정부
국내
1.신사참배 강요
신사참배 - 일본국민 ; 전쟁을 치러내기 위한 정신적 결속
한민족 ; 독립의식 제거(정신적으로 억제)
거부항쟁 - 기독교계통 학교의 교사, 학생, 학부모 중심
2.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에 의한 수난
1) 전시동원체제
국내위기(대공황,식민통치위협)→대륙침략→식민정책의 변화 (농산물약탈→군수품생산)
2) 전쟁의 총알받이-국가총동원법(1938), 국민징용령(1939), 육군특별지원병제도(1938),
징병제(1943)
3) 정신대와 위안부 ; 여자정신대 근무령(1944.8.23) -군수공장. 종군위안부
민족말살을 위한 정책
1. 창씨개명 - 한민족의 전통문화 말살, 조선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인과 같다는 구실
2. 민족분열책(민족지도층의 와해)
신간회 해산 → 민족지도층 변질 → 민중이 항일운동의 주체로 등장
*친일파 - 친일파로 전향한 민족지도층인사(이광수,최남선,최린 ⇔ 한용운) 직업적 친일파
:일본숭배, 전쟁협력, 국방헌금, 황민화. 해방후 친일파에 대한 심판 → 현재
3. 친일문학
문학 - 시대의 반영 -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 양성, 민족문학말살
프롤레타리아 문학, 농촌계몽 소설
→ 순수문학(구인회;사회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못하는 소극적 인물들)
→ 황민화 문학(최재서,이광수,주요한 ⇔ 윤동주,이원록,이병기)
4. 언론탄압
언론의영향력 중시 → 언론탄압 → 세계정세 파악 불가능 → 민족정신말살 →식민통치순응
1930년대 이후
항일신문(신문 압수로 인한 경제적타격의 두려움)
→생활개선, 식민통치의 고통 외면
동아일보, 조선일보 → 1940년 폐간 → 매일신보(한민족의 여론 통제)
5. 말과 글의 탄압
일선동근동조설(일본과 조선은 한뿌리, 한조상) → 민족동화,언어동화,문화동화
→ 일본어강요 → 조선어 과목 폐지(1938. 조선교육령)
1)조선어학회
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1931)→조선어학회사건(1942)→한글학회
한글보급(문맹타파), 우리말통일(표준말보급), 한글맞춤법보급
2)진단학회(역사연구)
취지 ; 조선문화의 개척, 발전,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목적 ; 조선과 그 인근 자역의 문화 연구
일제패망의 길
중일전쟁(1937) → 태평양 전쟁(1941)→ 미국 자극
본국 ; 대정익찬회 - 반대세력 제거
조선 ; 사상범예방구금령 - 상상범이었던 사람은 무조건 구속시킬수 있다.
외부 ; 대동아공영권 - 일본의 주도하에 아시아가 뭉쳐 번영과 발전을 이룬다.
해방후를 위한 민족국가 설립 준비
1. 해외
*만주지역
항일유격대→동북항일연군(중국과연합)->북만주로 이동(소련국경 근처)
*연해주지역 →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만주,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기반 붕괴
→ 중국관내로 이동 → 중경시대(한국독립당),미주(재미한국연합위원회)
→ 임시정부에 참여 → 민족국가 설립 준비
1) 임시정부(좌우연합 정부)
1941년 일본, 1945년 독일에 선전포고 ⇒ 얄타회담에서 한민족의 독립 논의
*광복군 - 연합군으로 참전
이유 : 전쟁이 끝난 후 국제무대에서의 조선민족의 발언권행사
*학도병 독립군에 참여
2)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대→조선의용대화북시대→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북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창설 - 화북 조선 독립동맹 예하의 무장조직
2. 국내 조선건국동맹(1944. 8)
구성 ;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각계각층
이념보다는 조국해방에 대한 의지와 애국적 사상이 기준
3. 독립운동 세력의 합작 추진
1940년대 독립운동 전선 ⇒ 연합을 위해 노력 ⇒ 일제패망으로 중단
의의 :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서로 힘을 합쳐 일제에 맞서려 했다.
조국해방의 길목에서- 일본의 패망후 전승국의 위치를 확보하기위해 노력
전후 우리의 국제적 지위 상승을 위해
이야기 한국역사 13 - 1
해방과 국토분단
-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 (미.영.중)-최초로 조선독립 약속
-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 (미.영.소.중)-조선독립 확인
- 2차대전 연합국 승리후 조선을 전승국으로 인정치않음⇒소련, 미국이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일본군을 항복 받기위한 명분으로)
♧남한
*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여운영, 부위원장:안재홍
-민족국가 건립목적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연합→인민공화국
-우익인사참여 거부
-해방직후 국가기구 역할
* 미군정시대
-총독부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음.
-한국을 패전국으로 대우 한반도 직접통치 주장
-조선인의 자주적인 건국운동 인정치않음
-건국준비위원회 좌파세력으로 분류 인정치 않음
-한국민주당 계열 인물등용(우파세력)-송진우로부터 이승만을 추천받음
좌파 ;일제잔재청산, 토지개혁, 산업개혁주장 →노동자, 농민의 권력투쟁 →우파 친일파로매도.
우파 ;개혁반대, 체제유지(기득권) →지주 자본가 지식인→좌파를 공산주의로 매도
*좌우합작시도
-자주적인 노력으로 불안전한 민족문제해결, 정치적단결(여운영, 김규식)
-좌우합작 7원책이 서로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결렬됨
♧북한
-소련점령군의 지원으로 김일성 정권장악. 모스크바3상회의와 신탁통치
-1945년 12월 미,영,소,중은 한국의 통일 임시정부수립, 신탁통치합의
-좌우익지도층:합의내용중 신탁통치부분에만 관심→단정수립, 민족분열계기
통일정부수립 노력
* 4김회담
-1948년 4.30 평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공동성명서 채택
=>남한; 단선, 단정수립 발표
북한;조선인민최고회의 창설 -인민공화국 선포⇒남북분단, 남북대결
대한민국의 탄생
*제주 4.3사건
-1948년 단독정부에 반대한 제주도민의 항거
-부산 주둔군대 파견, 강경 토벌작전으로 제주도민 3만여명사망(해방이후 최대 비극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48. 5.10: 제주도 제외, 남한전역 총선거실시(독립촉성국민회.한민당참여)
-5.30: 제헌국회개원. 의장-이승만, 부의장-신익희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2.12: 대한민국 합법정부 승인
*여순사건
-1948년 10.15 여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제주도민 진압명령 거부
-1225명 사망 실종
*1949년 6월26일 김구 저격 사건
해방후
-미국: 이승만을 통해 남한 반공기지건설
-이승만: 한민당과 친일파의 기득권보장⇒권력장악
-친일파,극우세력: 통일정권에서 자신들의 설자리가 없음⇒반공분단세력인 이승만 이용
*반민특위
-1948. 9.22: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1948. 10.23: 반민족행위 특벌조사위원회 설치
-1949. 2.2: 본격활동
반민특위 → 친일파검거(구속 친일파 전원석방)
정부와 국회의 대립:이승만→반민특위 지원, 특별경찰대 해산
반민특위활동 6개월만에 와해
친일파→국가보안법 제정→반민특위 국회의원구속
※민족정기를 바로 잡을수 있는 기회를 놓침
*원조경제와 귀속재산처리
미국의 무상원조:한국경제의 의존성 ,독재성, 소비성증대
차관방식:경제침체
귀속재산 처리법:이승만 정권의 각종특혜조치로 신흥재벌형성. 특권층에 치우침
농지계혁법:지주의 땅을 거두어 소작인에게 5년에 땅값을 갚는 방식⇒다시 소작인으로 전락
비극의 6.25
*폭풍전야
-정부와 야당의 극심한 대립
-1948~49년 미,소군대 철수
-1949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축출
-1950년 미국무장관이 한국의 방위책임을 지지않겠다고 선언
-북한의 소련군의 무기지원과 졍제성장
-1950년3월 소련 수상 스탈린에게 남침보고
*북한군의 남침
-1950 6.25 일요일 새벽 4시 남침
-6.27 새벽3시 이승만 서울피난
-6.28 오전11:30 서울함락
-7.1 이승만 대전 떠남
-7.20 대전 함락
-8.17 대구 -부산
-9월초 공산군 대구에서 폐배
-9.15 유엔군 인천에 상륙(7만5천 병력. 261척 함정)
-9.29 맥아더, 이승만 서울 수복
-10.19 평양 함락
-10.19 압록강변 초산 점령
-10.29 중공인민의용군 12만명 지원
-12월말 공산군 38도선 이남으로 몰려옴
-1951 1.4 서울 점령
-2.18 국군과 유엔군 서울 되찾음
-6.23 유엔안전보장이사회-휴전협상제의
-1953 7.21 휴전협정 체결
*전쟁의 후유증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
-국토의 황폐화
-이산가족 발생
◎ 이승만이 현대사에 남긴 악의 유산
1)분단 책임
2)친일파 중용-친일파중심 정권구성. 반민특위 강제 해체
3)한국전쟁
4)독립운동가 탄압-항일 민족운동 세력 소외 계층화
5)헌법 유린
6)정치군인 육성
7)부정부패
8)매판 경제
9)양민 학살
10)극우반공
11)언론 탄압
12)정치 보복
이야기 한국 역사 13 - 2
▶전후 복구와 민주주의의 수난
1.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 당선
* 거창사건(1951.2.11) : 공비 토벌을 위해 창설된 육군 제11사단의 9연대 병력이 경남 거창군
신원면 주민들을 국민학교에 수용한 후, 군. 경. 지방유지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5백여 명을
집단학살하고 불태운 사건
* 국민방위군 사건(1951.3) : 6.25전쟁 중인 1950.12.21 공포된 국민 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제2
국민병에 해당하는 17~40세의 남자들이 이에 편입되었는데, 전선이 후퇴하게 되자 방위군도
후방으로 집단 이송되었다. 한데 이 과정에서 방위군 간부들이 막대한 물자를 착복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보급부족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1천명이 훨씬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2. 계엄령 선포, 발췌개헌안 통과----------2대 대통령 당선
3. 민주당(1955.9.17) 등장 - 신익희 당수로 야당 결집
4. 4사5입에 의한 3선 개헌---------------3대 대통령 당선
5. 고령인 이승만 사후의 정권 유지와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 조병옥의
죽음 -------------------4대 대통령 당선
※ 역사적 정당성과 지지기반이 약했던 이승만 정권은 애초부터 재집권할 가능성이 없는 정권
이었다. 정통성이 약한 정권이 억지로 장기 집권하려면 부득이 독재화 할 수밖에 없다. 정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느라 정치적 폭거를 감행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기만적이고 강압
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19(1960)
1. 원인
- 3.15 부정선거와 그 이전의 이승만정권의 행태와 억압에 대해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폭발
- 경제적인 요인: 소비재 공업 중심의 대외 의존적인 독점기업이 발달하고 그 결과 농업, 노동,
중소기업 문제 등에 부조리가 쌓이게 됨
- 국제 정치적인 요인: 경제 공황으로 인한 미국의 정책변화
2. 전개 과정
- 1960.3.4월 항쟁에서 학생(중고생)등이 주역이 되었다는 점
- 대구에서 고교생 시위(학원의 정치 도구화에 반대)
-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 김주열시체 발견→2차 항쟁
- 고려대생 정치깡패에 구타 → 서울시내 대규모 시위
- 교수단 시위 → 4.26 이승만 하야
3. 의의
- 낡은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이상을 지향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을 혁명이라고 할 때 4.19는
이런 정의에 부합한다(역사속의 역사 읽기/풀빛)
-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짓밟던 부정한 정치권력을 퇴진시킨 한국 역사 최초의 민주
혁명→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이 과제
- 정권은 교체되었으나 지배계급까지는 교체되지 않은 정치적 변혁이었을 뿐, 사회 혁명을
수반한 역사적 의미의 혁명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면 4.19는
'혁명'이라기보다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 (20세기 우리역사/강만길)
※ 이승만 정권 (국내 지주 세력과 친일 세력)
↓
허정 과도 정권 (이승만 하와이 망명)
↓
장면 정권 (독재 세력청산에 철저하지 못하고, 친일파 숙청작업도 못함→4.19주체세력의 평화적
민족 통일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
↓
박정희 군사 쿠데타 (미군의 묵인과 협조)
▶5.16 군사쿠데타(1961.5.16)
- 군부 내 권력 지향 세력의 끈질긴 책동과 4.19 후 평화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는데 불안
해진 미국 쪽의 묵인 내지 방조, 장면 정권의 방어능력 부족 등이 원인이 되어 성공. 2년 7개
월간 군정 시작. 이후 30년간 군사정권유지
- 박정희 5대 대통령 당선(1963.12.17)
※박정희 정권
- 자립경제와 조국근대화를 외치며 경제 개발을 목표로 삼는다.
- 한일협정 체결: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3각 안보체제를 구축하려던 미국 쪽 요구에 쫒기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으로서 그 정통성의 취약점을 감추기위해 서둘러 시작한 경제
개발자금을 조달하는데 쫒기던 박정권이 35년에 걸친 민족적 희생이 확인되지도, 정당하게
보상받지도 못한 졸속 협정을 체결하고 만다.
- 베트남 파병: 미국의 지원 약속과 전쟁 과정에서 생기는 각종 공사 일자리로 한국 경제를
일으키려는 생각에서
- 6대 대통령 - 7대 대통령 - 8대 대통령 - 9대 대통령
- 10.26사건으로 18년간 유지된 군사 독재정권이 무너짐
경제체제
이승만 : 원조 경제체제, 자본과 원료를 대외 의존하는 소비재 중심
박정희 : 외자도입 경제체제, 일부 재벌이 독점, 소비재 중심
=> 1960년 수출지향적 공업화로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착취), 70년대 심한 인플레이션, 지속적인
국제수지 악화, 경기침체가 노동운동 격화
▶7.4 남북 공동 성명(1972.7.4)
- 서로의 체제를 고집하여 왔던 남과 북 양측의 통일 문제에 관한 최초의 합의
- 통일원칙
①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말고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함
②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함
③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며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의의: 1950년대 이승만 정권과 1960년대 박정희 군사 정권아래서 이적론으로 탄압받던 평화
통일론이, 같은 군사정권 아래서 겉으로나마 일단 정부 쪽의 통일 방법론으로 정착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남북의 대등 통일을 전제로 한 성명이었고, 20년 후의 '남북
합의서'에도 그 정신은 이어져 남북정부들이 대등한 처지에서 통일을 약속하게 된 것
▶10월유신(1972.10)
- 장기 집권을 위한 폭력적인 개헌 조치며,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정치체제
-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한다'는 주장으로 국회 해산, 정치활동 금지
- 새 헌법: 대통령 3권 통수, 임기 6년, 중임 제한의 철폐, 통일 주체 국민회의 설치, 국회의원
3분의 1의 대통령 지명 등
- 8대, 9대 대통령 당선
※박정희 정권 -> 최규하 대통령 -> 전두환 -> 노태우
10.26 12.12 쿠데타
▶반독재 민주화 운동
-YH무역 여성노동자 시위
-부마 민주 항쟁
-광주 5월 민중 항쟁
-6.10 민주 항쟁
12.12 쿠데타 - 1979.12.12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감행한 군사 쿠데타.
10.26 사건 이후 사태 추이에 불안해하던 차에 정승화가 수도권 지역의 주요 지휘권을 개편
하자 전두환 등이 육군 참모 총장 공관이 있는 한남동과 삼각지, 경복궁 일대에서 총격을 벌인
끝에 12.12 저녁 7시경 정승화를 김재규 내란 방조죄로 체포한 사건.
< 역사의 여명 ~ 초기 국가 성장 >
= 지구의 탄생과 변화 =
1백억 ~ 2백억년 전 : Big Bang으로 은하계 생성
50억년 전 : 태양계 탄생, 지구의 탄생
* 지구의 변화 1.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암석층과 대기권으로 존재하던 지구의 표면에 산, 평야,
강, 호수, 바다 등이 생성
2. 지구의 표면은 비, 바람, 파도에 의해서도 변화
3. 끊임없는 화산 활동
20억년 전 :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하나 이것은 동물도, 식물도 아닌 형태
5억년 전 : 바닷속에 물고기 등장
3억년 전 : 파충류(공룡 포함)의 지구 지배 시기
2억년 전 : 지구 및 한반도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약간의 틀이 잡혀가던 시기
한반도는 서해, 남해가 모두 육지이고 일본과도 육지로 연결
1억년 전 : 포유류가 지배하던 시기로 지구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지고 한반도도 동해,
남해, 서해로 둘러싸이고 일본과도 분리된 모습
2백만년 전 : 빙하기의 시작.199년간 4번의 빙하기와 3번의 간빙기로 북반구는 빙하시대,
남반구는 홍수시대. 지금의 오대양, 육대주가 형성
= 인류의 변화 =
6천만년 전 : 영장류의 조상인 동물 출현
3백만년 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남쪽 사람 원숭이 )
2백만년 전 : 호모 하빌리스( 손쓴 사람 )
150만년 전 : 호모 에렉투스( 곧선 사람 : 자바원인, 하이델베르크원인, 베이징원인)
=>전기 구석기 시대
20만년 전 : 호모 사피엔스( 슬기 사람 : 네안데르탈인 )
1. 타제 석기 사용
2.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처음으로 입기 시작
3. 불 사용
4. 혈연 관계를 이루어 최초의 사회형태
5. 협동의 중요성 인식
6. 복잡해진 언어
=>중기 구석기
4만년 전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슬기슬기 사람 : 크로마뇽인 )
1. 지금의 인간과 거의 비슷한 모습
2. 피부색깔이 달라짐
3. 더욱 정교해진 도구 사용 - 석기, 짐승의 뼈, 힘줄을 이용
4. 남녀의 일 구별
5. 한반도에 3~4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
=>후기 구석기 시대
= 한민족의 역사 =
- 기원전 3천년경 아시아 중부 파미르 고원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고대 동부 아시아족으로 추정
- 인종학상 : 시베리아 족
- 언어학상 : 알타이어 족
- 역사의 첫 무대 : 백두산을 중심으로한 만주와 한반도
- 한반도에는 전기 구석기 시대( 약 70만년 전 )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으나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며 오늘날 한민족의 모체가 된 것은 신석기 시대인 부터이다.
신석기 시대( 기원전 6천년~1천년 경 )
1.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며 각각의 종족은 서로 동화되고 혈통을 융합시켜 오늘날 한민족의
모태가 됨
2. 빗살 무늬 토기사용
3. 농사 : 정착 생활
4. 목축
5. 씨족 공동 사회
6.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청동기 시대
7. 청동기 사용
8. 군장 국가 : 부와 권력을 가진 군장 등장으로 부족 사회 붕괴, 빈부의 차이, 지배,피지배의
관계 형성
9. 고인돌과 신돌 : 세력과 지위를 상징
10. 한반도의 고조선 시대
고조선의 생활
1. 농사와사냥( 대동강 유역 )으로 많은 농기구의 연구와 발전을 가져왔다.
2. 법금 8조 - 최초의 법률
3. 사유재산 인정
4. 화폐 사용
5. 씨족이나 부족의 족장이 지배자로 군림
철기 시대
이미 철기를 사용하던 중국의 연나라에 의해 고조선의 요동이 정벌되면서 고조선에도 철기
문화가 시작된다.
1. 더욱 정교하고 세련된 칼. 창. 농기구
2. 온돌
3. 나무로 기둥을 세운집
4. 중국식의 회색 토기
5. 무덤 : 토광묘, 옹관묘
= 고조선의 역사 =
- 기원전 2333년 고조선 건국 : 단군 신화( P46~P48 )
- 기원전 194년 위만 조선
한의 진개 요동 정벌 -> 춘추전국시대 -> 진나라에의해 통일(기원전 225~221년) -> 한에
의해 다시 통일(기원전 206년) -> 노관의 반역으로 요동땅 공격 -> 위만, 고조선으로 망명
(기원전 195년) -> 왕검성 공격으로 준왕을 몰아냄(기원전 194년)
- 여러 부족 국가 정벌
- 한무제에 의해 고조선 멸망 : 기원전 108년, 우거왕 고조선 땅에 한4군을 설치함.
= 부여 =
- 기원전 1C 송화강 상류 일대에 성립
- 부족 국가에서 초기 연맹 국가로 변화( 고조선에 이어 두번째로 형성된 국가의 형태 )
- 선비족과 고구려 사이에 위치,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왕권유지->중국인에게 온화한
성품으로 보인 원인
- 신분 제도, 형벌 제도 엄격
- 순장 제도
- 영고 : 추수 감사절 축제
- 동부여와 북부여로 나뉨
= 고구려 =
- 기원전 37년 주몽에 의해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에 세워진 나라
- 기백이 있고 전쟁을 즐기는 강한 성품
1. 지형적으로 산세가 험해 농사나 목축보다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
2. 고구려가 세워진 졸본에 이미 있었던 예맥과 손잡고 중국과 끊임없이 충돌
3. 동해안 지방의 동예와 옥저를 정복하며 세력을 키워감 -> 한나라에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
= 진국 -> 삼한 =
- 한강 이남의 땅
- 준왕과 대동강 변에 살던 부족이 모여 이룬 나라
- 북쪽의 유민들의 철기 문화와 진국의 세럭이 합쳐 마한 형성
- 마한 지역에서 밀려난 주민들이 동과 서로 흩어져 진한과 변한을 세움
- 진국에서 삼한으로 나뉘어 불리게 됨
- 삼한의 생활 1. 신지, 읍차가 나라를 다스림 : 정치
2. 천군 : 제사를 주관
3. 농경 사회
= 역사속에 나오는 신화와 인물 이야기 =
1.고조선의 건국 신화
단군 신화의 신화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천부인과 풍백, 우사, 운사등의 부하를 거느리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여자가
된 웅녀(곰)와 결혼하여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이 태어남.
1. 환웅 : 북방 민족인 환웅족
2. 곰과 호랑이 : 태백산 부근에서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종족
3. 곰 ->웅녀 :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던 종족이 멸망하고 곰을 토템으로하던 종족이 남게됨
4. 환웅과 웅녀의 결혼 : 환웅족과 곰 토템 신앙의 종족이 흡수, 통합
5. 단군 왕검에 의한 고조선 건국 : 종족의 통합으로 세력이 강대해진 환웅족이 고조선이라는
국가 형태로 발전
참고 : 단군왕검은 밝달임금과 같은 말로 밝달은 단골 중 가장 으뜸인 사람을 뜻하며 임금은 여러
우두머리 중 가장 으뜸이라는 뜻. 즉, 단군왕검은 고조선 시대 통치자의 명칭으로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절대군주의 의미라고 한다.고조선은 47대까지 이어지며, 3대 가륵 시대에 가림토
라는 문자를 사용, 22대 색불루 때 8금법이 만들어졌다(꼬마 단군 참고)
고조선 이전의 환인, 환웅도 그 시대의 왕의 호칭(한단고기 참고)
2. 부여 금와왕
고조선과 같은 시기에 있었던 부여의 해부루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어느날 곤연이라는 연못
근처의 돌밑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개구리를 닯은 사내아이를 점지 받고 그 아이를 태자로
삼고 이름을 금와라고 지었다. 그후 금와는 동부여의 왕이 되어 후일 고구려를 세우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를 왕비로 삼아 주몽을 키운다.
- 항상 주몽의 이야기와 함께 나오는 이야기
- 곤연 : 부여의 옛터전인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호수. 경박호라고도 부름. 해발 350미터의
높은 곳에 있다고함.
- [고구려 이야기]와[다시쓰는 이야기 한국사] : 유화가 해모수를 만난 얘기를 듣고 유화를
데려와 가두어 .
[연오랑 세오녀] : 유화를 데려와 궁녀로 삼음.
3. 고구려의 주몽
천제의 아들 해모수(북부여의 왕)와 하백의 딸 유화의 아들.부모의 허락없이 결혼한 유화가
쫒겨난 후 동부여의 왕인 금와에게 발견되어 금와왕의 궁전에서 알을 낳았는데 모든 동물이나
새들마저 귀하게 대접한 그 알에서 태어났다. 주몽은 원래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총명하며 무예에도 능해 자신들의 자리에 불안을 느껴 주몽을 해지려는 금와왕의 아들들을
피해 졸본이라는 땅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
4. 주몽의 아들들
- 유리 : 주몽이 동부여를 떠날 때 남겨 두고온 부인이 나은 아들로 어려서는 아비없는 자식
이라는 욕을 먹고 자라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일곱모가 난 돌위에 소나무 밑에 있는 유품을
찾아 주몽을 찾아간다. 동명성왕(주몽)에 이어 유리명왕이 된다.
- 비류와 온조 : 동명성왕이 졸본(솔골)에 와서 낳은 아들들로 그후 온조는 한강(아리수)
남쪽의 기름진 땅인 하남 위례성에 나라를 세우고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인천)에 나라를
세운다.그러나 비류가 죽은후 척박한 미추홀을 떠나 온조의 백성과 합쳐 백제가 탄생한다.
< 생각해 봅시다 >
1. 역사 속에 나오는 신화와 인물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할까?
2.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삼국유사와 같은 설화집에 나오는 건국신화로, 다만 하나의 이야기로만 치부하도록 할것인가?
아니면 숨겨진 역사를 찾는 노력을 보일 것인가?
< 참고 자료 >
- 꼬마 단군 1, 2 ( 산하, 정우상 )
- 고구려 이야기 (창비, 민영 )
- 다시쓰는 이야기 한국사 1 ( 소담, 우리누리 )
- 연오랑 세오녀 ( 산하, 조호상 )
- 어린이 역사 소설 고구려 ( 우리교육, 송언 )
- 만화 한국의 역사 1 ( 대산 )
- 쟁점으로 본 한국사 (푸른 나무, 김육훈 )
- 한단고기 ( 정신세계사, 이일봉 )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자하는
노력과 숨겨진 역사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접근해 보려는 의지와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을것이다. 손쉽게 접근할수 있다는 이유
만으로, 또는 지금까지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안이함으로 역사의 진실을 캐나가는
작업을 게을리 한다면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어른들에게 쉽게 외래 문화에 물드는 아이들을 나무랄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언제나
역사서를 대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 하나, 분명히 존재했었고, 우리 민족의 뿌리이며,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려는 노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점이다.
이야기 한국 역사 1-2
< 고대 삼국 시대의 성립 >
1. 건국 신화
1)고구려 :주몽신화(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 알이 태어났는데 그가 주몽이다.해모수의
아들 금와가 유화를 보호했고 그의 아들이 괴롭히자 친구와 함께 압록강에 이르러 졸본 부여
에서 새나라를 건설 고구려가 된다.)
#유리는 주몽과 예씨 사이에 태어나서 아버지 없이 자라다 18세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일곱 모난 돌위의 소나무 밑에 있는 칼을 갖고 주몽을 찾아간다.
#해명태자:황룡국 선물 활을 받아서 꺽어 버린 죄로 유리왕이 자결을 명한다.그는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지만 이웃과 원한을 맺게한 죄로 창에 몸을 던져 자결하는 비운의
태자가 되어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 낙랑의 최리가 호동을 사위로 삼고 싶어한다. 그를 궁에 초대해서
연회를 베풀고 자신의 딸 낙랑을 소개하고 둘은 서로 좋아하게 된다. 호동의 요청에 따라
자명고의 북을 찢게되고 그 틈을 타서 함락하지만 왕비의 모함으로 대무신왕의 마음이
변하자 자결을 한다.
2)백제 : 온조신화(주몽과 소서노 사이의 온조가 남하하여 한강 주변에 나라를 세우고 백제라
칭한다. 20년간 왕권을 잡고 2대 다루왕에게 왕권이 주어진다.
3)신라 : 박혁거세 신화(사로국 양산촌의 나정 우물에 횐말이 큰 알을 갖고 있었다. 큰 말은
하늘로 사라지고 알을 깨뜨리자 단정한 사내아이가 나왔다.불구내란 이름과 박씨 성을 주고
임금으로 삼게 된다.기원전 57년에 나라를 세우니 계림국이라 부르고 알영을 왕비로 맞아
들인다. 60년 재위 후 다섯도막이 난 몸대로 무덤을 만든다. 아들 남해가 차차웅이 된다.
석탈해에 대한 전설도 알을 낳아서 강에 띄워보내어 노파가 길러 남해의 딸 아니공주와
결혼을 한다. 4대 왕이 된다.
#김알지 : 탈해 이사금이 닭 울음소리를 듣고 가니까 궤짝에 아기가 있었다. 계림이라 하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알지라고 하였다. 신라는 천년간 박, 석, 김이 번갈아 왕이 되고 김씨
임금이 41명이 되었다. 신라는 17애 내물 마립간에 이르러 고대 왕국으로 탈바꿈
%신화를 통해서 고구려, 백제의 밀접한 관계, 국가 성립단계가 백제가 앞섰다.
2. 삼국 시대의 비교
고구려 백제 신라
------------------------------------------------------------------------------
특색 넓은 영토, 여러 민족 온조계,비류계, 박,석,김 번갈아 왕이 됨.
문화적 국제성, 신분이 명확히 구분
왕호 거서관->차차웅->이사금->마립간
관등 *상가,대로,패자,고추가 *6좌평16관등22관부 *화백회의
제도 주부,우태 *행정- 방,군,성지방관 *진평왕-위회부,선부,조부,승부,예부
* 성,촌 - 지방제 파견 *4~5주 설치. 촌,성을 두었다.
* 좌보,우보 - 정치,군사
전성기 5C광개토대왕,장수왕 4C초 근초고왕 법흥왕, 진흥왕
-평양성 고국원왕 살해. - 진흥왕 순수비
불교 372년 소수림왕, 전진 384년 침류왕, 미라난타 527년 법흥왕 이차돈 순교,
신종,원효화엄
미술 *고분 벽화 *금동미륵 반가상 *조화된 아름다움 , 세련, 화려함.
초기;초상,생활상 *연가 천년명금동여래입상 *금관
후기;수호신(사신도) *서울 풍납, 공주,부여, 익산 *기마인물형토기
*벽화고분;쌍영총,무용총 *무녕왕릉 벽돌 무덤(석수) *금동판 삼존청화상
각저총, 강서대묘 *부소산성,벽돌무덤 *금동판 삼존청화상
*무득사지 - 3탑3금당(무왕) *감은사지3층석탑
*군무리 석소여래좌상
3. 고대 삼국의 의의
자주성을 갖고 넓은 국토를 가졌던 고구려의 기상과 묻혀있는 고대사 연구에 더 많은 관심과
연구를 해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삼국이 서로 견제 하면서 다져온 국력이
신라로 인해 통일이 된다. 백제 660년, 고구려668년에 망하고 당의 힘을 빌어서 676년에 통일.
고구려가 통일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고구려, 백제의 발전 >
1) 신대왕때 명림답부, 고국천왕때 을파소의 진대법 실시 백성이 잘 살 수 있게 노력했다.
명재상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힘이 있었다.
2) 동천왕227년 산상왕이 죽고 즉위한다. 요동으로 세력을 넓히고 성왕으로 존경을 받는다.
3) 미천왕 313년 낙랑군 추출, 고국원왕 371년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전사 남하정책, 북진
정책이 실패
4) 광개토왕(391년) 담덕이 왕이 되어 웅대한 포부와 총명함으로 정사를 처리, 광개토왕비는
1880년경에 일본인 군인에게 발견되어 탁본이 있는데 위조되었다는 설이 있다. 충분히
가능하며 일본치하에 있으면서 식민지사관으로 역사를 배웠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 :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가야, 신라를 지배했다는 설.
#광개토대왕비도 위조 되었다면 141자가 없어졌으면 그 내용을 알아내어서 민족이 가졌던
웅대함을 되찾을 수 있다면….
#한사군에 대한 의문점은 낙랑군과 낙랑국의 차이점이 아리송하다
<느낀점>
방대한 고대사700년을 단숨에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왕들의 그 시대의 명확한 자료
들이 없기에 추측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일제 36년간 이루어진 식민지사관으로 작아진
민족의식을 빨리 깨워서 한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21세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도서>
1.역사속의 역사 읽기 : 고석규, 고영진 / 풀빛
2.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 이덕일, 이희근 / 김영사
3.한국 고대사 입문
4.21세기 백과 사전
6. 신라,고구려,백제 이야기/창비
7. 상상하는 한국사 : 김정환 / 푸른숲
이야기 한국 역사 2-1
< 신라의 발전과 화랑 >
- 402년 내물왕의 동생 실성왕이 왕위 계승
-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미해) -> 일본, 복호 -> 고구려로 화친을 명분으로 볼모로 보냄.
마지박 눌지까지 제거하려다 실패
- 417년 눌지왕이 됨(실성왕 제거)
- 눌지왕은 삼량주 태수 박제상에게 볼모로 가 있는 두 동생을 구해 오길 바람
- 박제상은 압록강 건너 국내성에 들어가 복호를 구해옴
- 바로 그 길로 일본으로 향함. 이 때 박제상 부인이 남편을 만나기 위해 바닷가로 달려가나
배는 이미 출발.
- 일본왕을 속이고 미해를 탈출 시킨 뒤 자신은 죽임을 당함
- 남편의 귀국만을 기다리던 박제상의 아내 -> 치술령에서 망부석이 됨
신라의 발전
- 지증왕 순장 금지 : 인간 존중
인간의 노동력 중시
소를 이용 -> 농업 생산력 증가. 경제력 향상
국호 : 신라. 임금 -> 왕
주. 군. 현 -> 지방관 파견 -> 왕이 직접 통치. 왕권강화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
- 법흥왕 불교 공인
- 진흥왕 영토 확장 : 한강유역 차지
진흥왕 순수비 :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고대의
가장 중요한 금석문 -> 신라의 정치, 불교를 연구하는 자료
이차돈의 순교
신라가 차츰 고대 국가로서의 틀을 갖추어가며 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체제가 확립되면서 왕에
대한 충성이 강조 되었다. 이 때 들어온 종교가 불교이며 불교의 교리에 왕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임금이 불교를 공인하려하나 토착 귀족 세력의 힘에
부딪치게 된다.이차돈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불법을 펴는 일에 목숨을 바침.이차돈은 죽기전에
불법에 영험이 있다면 신이 죽은 후 반드시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 한다.이윽고 목을 베자
흰피가 높이 솟아 올랐다. 이로써 신라에서는 법으로 불교를 공인하였고 불교 입장에서도 중국
에서 들여온 불교책에서는 이차돈을 신비화 시켰다.
신라의 가야 정벌
- 법흥왕(532)19년 -> 금관가야 정복.
- 진흥왕562년 -> 가야 정벌 (이사부)
- 가야는 낙동강 유역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국가들로서 삼국에 뒤지지않는 문화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연맹체의 형태로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채 신라에 의해 사라
지고 말았다.
화랑도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청소년들의 결사체 화랑도는 15~18세의
청소년들이 3년동안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무예, 지리를 익히고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길렀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고 도의를 닦았다. 원광의 세속오계도 충과 신을 강조한 도의로써 화랑은 무엇
보다 명예를 중시하여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한다.
고구려 = 경당
중국의 연표
- 기원전 1766~1122년 ;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의 통치기
- 기원전 1122~256년 : 주
- 기원전 770년 ; 춘추 전국 시대 시작
- 기원전 221~206년 ;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 “진” - 만리장성
- 기원전202~서기220 ; 한. 비단길로 유럽과 교역
- 서기 220~280년 ; 위. 촉. 오 3국 분열 -> 진 통일
- 서기 304~439년 ; 북중국 5호 16국
- 서기 317~589년 ; 남북조
- 서기 581~618년 ; 수
- 서기 618~907년 ; 당
수 ; 581년 양견은 지금의 화중.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중국 통일제국을 이룩
수의 고구려 침투
- 1차 590년 수문제가 중국을 통일 후 고구려 위협->고구려가 요서지방 선제공격->수문제의
자존심을 건드림.
결과 ; 육군 -> 홍수로 군량을 운반하지 못해 군사들이 전사
해군 -> 풍랑으로 이후 10년간 평화 유지
- 2차 612년 수양제는 고구려를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 -> 100만 대군으로 침입 ->을지
문덕의 거짓 항복과 유인 작전으로 수의 군대를 살수에서 크게 무찔러 이김 -> 우중문에게
보낸 오언시
- 3차 613년 수양제가 직접 최신 무기로 침입
후방에서 전쟁으로 인한 민심이 극도로 악화. 반란이 일어나 결국 후퇴
- 4차 614년 고구려의 강화요청과 수나라의 내분상태에서 양제 철수
결과
수 ; 4차례의 전쟁으로 인명과 물자의 손실. 민심이 흩어져 반란으로 당에 의해 멸망
고구려 ; 국위를 떨칠 수 있었으나 수와 마찬가지로 손실이 막대해짐.
신라와의 국경수비가 소홀한 틈을 타 신라의 영토 확장에 좋은 기회를 줌.
천리장성
당은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화해 분위기 였으나 628년 중국을 통일하고 주변 세력을 흡수
하면서 고구려에 대해서도 지난날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경관’을 헐어
버리라 압력을 가한다. 이에 고구려는 631년부터 16년간 부여성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아 당의 침입에 대비함.이 공사의 감독으로 연개소문이 임명되나 포악한 그를 비밀
리에 내치기 위한 계획이었으나 이에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며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
울보공주와 바보 온달
- 평원왕에게는 울보 공주가 있었는데 임금은 늘 농담으로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 함.
마침내 공주는 궁궐을 나와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서 글과 무예를 가르쳐 고구려의 용맹스런
장수가 됨.
- 설화 속에 담긴 고구려 사회의 모습
고구려는 북쪽의 중국과 신라. 백제의 공격으로 군인들의 신분이 강조되던 시기이므로 평민
들이 무예를 익혀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벼슬을 얻어 신분 상승의 계기가 되었다라고 추측.
이 설화에 나오는 온달 역시 그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으며 조상 대대로 권력을 누려온
귀족들은 그런 계층을 곱게 볼리 없으므로 바보 온달이라 빈정댔을 것이다.
신라의 3가지 보물
- 황룡사 장륙삼존금불상(불상 높이 5m) 인도의 아소카왕이 보낸 책과 황금
9층목탑 : 자장이 당에 유학하고 있을 때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어진다고 해서
세움 -> 호국불교
- 진평왕 옥대 : 하늘에서 하사받은 옥으로 만든 허리띠
왕권을 하늘에서 내린 것이란 뜻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냄.
슬기로운 여왕
선덕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여왕의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이는 그 당시 성골 신분의 남자가
없었기에 왕위에 오른 여왕이기에 여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바꾸려하는 의도에서 생긴
일이다. 그녀가 왕으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음을 보여 주려함이다.
2000년 3월 21일자 신문에 일본 교과서 왜곡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기사를 보았다.한일 교육부
장관 회담에서 한국의 입장을 일본 교과서의 한국사 왜곡 문제를 거론하려는 방침이었으나
일본측의 요구에 의해 공식 의제로 조차 채택하지도 못했다 한다.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한 나라의 역사는 그 민족의 기본 뿌리이고 정신인데 왜곡되고 한국을 경시하는 역사를
배운 그들이 과연 세계 무대에서 우리 한국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하루속히 교과서 왜곡
부분에 대해 수정을 촉구해야 한다. 이에 앞서 우리의 역사에서도 나타나는 모화사상과 식민지
사관으로 잘못 인식된 역사부터 바로 잡아 고조선 시대와 고구려 시대에서도 정확한 우리의
영토를 찾는 노력을 해 자라는 우리 자녀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의 문화가 없는 이 시대에 신라의 화랑이나 고구려의 경당과 같은 기능을 하는 제도가
부활 한다면 그들에게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참고 자료
- 백제 고구려 신라 이야기
-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 백과사전
이야기 한국 역사 2-2
1. 백제의 마지막 항전( P. 87 )
2. 방탕한 의자왕 ( P. 124 )
3. 백제의 5천 결사대 ( P. 129 )
4. 백제의 마지막 불꽃 ( P. 139 )
의자왕 : 백제의 마지막 임금. ‘해동증자’로 불리며, 초기에는 주와 군을 순찰하면서 살인자를
제외한 모든 죄수들을 석방한 어진 임금이었다.즉위 2년 만에 대야성(합천) 싸움에서 승리하며
싸움마다 연전연승한다. 또 부여성충과 부여윤충 같은 충신이 옆에 있었다.차차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사치와 부패에 물들기 시작한다. 태자궁을 호화롭게 짓고, 궁녀들과 술잔치를 벌이며
생활한다.
대야성 전투( 642년 )
백제와 신라를 잇는 교통요지로, 40여 성읍을 관할하는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큰 곳. 도독은
김품석(김춘추 사위), 백제 공격군 선봉은 부여윤충(성충의 동생).백제 승리(김품석 부부 살해)
부여성충과 연개소문과의 비밀동맹(역할 분담)
“백제가 신라와 싸우게 되면 고구려는 당을 쳐서 당이 신라를 구하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가
당과 싸우면 백제가 신라를 쳐서 신라가 당나라를 돕지 못하게 하자”
변수 : 1) 당이 고구려 공격에서 패하자 신라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백제 공격
2) 의자왕의 방탕
3) 김유신의 계략(백제의 좌평 ‘임자’와 내통하여 백제의 실상을 파악, 의자왕에게 무당
금화를 천거하게 함) -> 성충의 죽음, 윤충이 전쟁에서 활약하지만 화병으로 죽음
백제가 망한 이유는?
표면적인 이유는 의자왕의 타락과 신하들의 무능 때문이지만,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사상을 버리고 외래사상에 전적으로 의존하려 했던 일부 지배층의 지나친 욕망때문이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인간의 근본 이상과 일치하는 뛰어난 사상을 갖추고 있었지만, 왕족을
비롯한 소수층은 자신들의 권력독점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언가 다른 사상이 필요했다. 백제
불교는 미륵불로 현재의 왕과 동일시하고 많이 의존하였다.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두산동아/박현)
백제의 부흥운동
1) 부여복신(백제 무왕의 조카)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풍이 복신을
살해함 -> 백강전투 대패(분열과 사기 저하)
2) 임존성의 성주 지수진과 흑치상지(웅진도독부의 부여융에게 투항)
3)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과 대결하고 있어서 원병을 보낼 여유가 없었지만, 왜는 주류성 앞
바다에 왜선 1척을 보내었다.=>’신라’가 당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것은 - 독립적인
속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 백제 부흥군의 덕이었다.
1.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 P. 93 )
2. 철벽의 요새 안시성 ( P. 98 )
3. 새야 새야 무당새야 ( P. 101 )
4. 고구려의 집안 싸움 ( P. 150 )
5. 불타는 평양성 ( P. 153 )
당의 고구려 침략
1. ‘수’에 신라, 백제 모두 고구려 공격을 부탁하였지만, 고구려에 패함
2. ‘당’이 들어서자 신라는 621년 삼국 중 제일 먼저 조공하며, 4년 뒤에 조공하는 길을 고구려가
막고 있다고 당에 호소한다. ( 당나라가 한반도의 삼국 문제에 간섭하게 된 시초)(P.71)
3. ‘당’이 신라를 선택한 이유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백제 무왕이 원정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백제보다 약소국 신라를 지원하면 평정 후에 정세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안시성 전투 ( 645년, 보장왕 4 ) :
당나라 태종이 지휘하는 군대가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3개월 가량 안시성을 포위, 공격
했으나 끈질긴 항전으로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가 승리한 싸움.개모성,비사성,백암성이 차례로
함락되었지만 안시성은 끝까지 저항하였다. 당태종은 직접 평양을 공격하려 했지만,이세적과
손자 무기가 보급로 차단과 고구려군의 역공이 있을 수 있다고 건의해 안시성을 끝까지 공격
하였다. 당 군은 흙산을 쌓아 공격하려 했지만, 고구려군이 점령하였다.
고구려의 내분
영류왕 건무 -> 북수남진 주장
을지문덕 -> 북진 주장
연개소문 -> 북진 주장 => 영류왕과 군신의 눈 밖에 난다.
=> 영류왕의 아우 대양왕의 아들 장을
보장왕으로 삼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된다.
=> 보장왕 25년 연개소문 죽음
=> 집안 다툼으로 내분, 나.당 연합군의 공격
=> 고구려 멸망(시조 동명성왕부터 28대, 705년)
1. 김춘추의 꾀(p.89)
2. 삼국통일의 주역 두 사람(p.107)
3. 비단 옷감으로 산 꿈(p.111)
4. 신라의 꽃 비령자(p.115)
5. 김춘추의 목숨을 구한 온군해(p.120) 6. 김춘추의 친당외교(p.127)
7. 반굴과 관창의 용기(p.133)
8. 신라의 굴욕(p.144)
9. 당나라에 맞서는 신라(p.157)
10. 아들을 버린 아버지(p.180)
백제와 신라 사이가 멀어진 이유는?
1)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빼앗은 사건(나제동맹이 깨짐)으로 554년 백제 성왕이 전사한 사건이
발생; 동맴관계에 있다가 일방적으로 한쪽이 깨어 버렸고, 그 와중에 일국의 왕이 전사하는
비극(갈등양상=>보복양상)
2)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사건; 김춘추
(무열왕)의 개인적인 원한+문무왕의 왜곡된 백제관(누이가 죽은데 대한 복수)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
김유신(증조부 : 금관가야 구해왕, 부:대량주도독 서현, 모: 지증왕의 증손녀 숙흘종의 딸 만명,
처: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부인, 자: 원술)
김춘추(김유신의 누이동생과 결혼 -> 태종 무열왕)
=>김유신은 김춘추의 처남.매부이자, 사위. 장인의 관계
김춘추의 외교
대야성 전투에서 딸과 사위의 죽음에 대한 원한과 성골 출신왕의 계보가 무너지면서 극심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백제가 신라를 자주 침략하므로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가나 실패.
다시 당으로 건너가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당고종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므로 스스로
속국임을 인정)
신라의 입장
1. 만약 신라가 중국과 대등한 관계였다면 언제라도 잃은 땅을 되찾을 수 있는 일이었다.하지만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고구려의 거대한 영토 뿐아니라 대외관계 측면에서
신라는 중국의 속국(지방)에 불과했다.
2. 법흥왕(521년), 신라는 백제 사신을 따라 양에 조공을 바친다.<양서> 동이열전에는 ‘신라어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신라는 <양서>에 처음으로 중국 문헌에 등장)
3. 중국과의 교류를 절실히 원했지만 중국으로 가는 길을 백제가 가로막고 있었고, (바다길로?
백제수군은 동아시아 최정예) 485년부터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기에 있게 되므로 신라가
굳이 중국과 통교할 필요가 없었다.
4.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비극적인 삼국통일과 1500년
사대 관계가 싹 트게 된다.(다른 측면: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 동아시아를
통일하고 중국 중심의 고대국가질서를 확립한 사건이었다.)
(상식밖의 한국사/남경태 저/새길 출판사)
고구려가 망하여 발해가 되고, 백제가 망하여 신라에 합하였으니 삼국이 합하여 양국이 되었다.
그후 발해가 망하여 압록강 서쪽의 땅은 거란,몽고 등 다른 민족에게 넘겨 준 바 되었으니 900
년 간 이어온 고구려의 영토가 상실되고야 말았다. 슬프다! 고려 태조가 우리나라를 통일하고
조선의 개국으로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 통일은 반쪽의 통일이요,전체적인 통일
은 아니다. 만일 이러한 반쪽 통일을 말한다면 동명성왕도 역시 통일이요, 온조 혁거세도 역시
통일이니 하필 김춘추 이후에 통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체적인 통일은 단군이래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어찌 김춘추를 통일한 자라 일컬으리오. (신채호, <독사신론> )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 본다는 것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의미이며,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가 고구려를 통합하여 민족을 통일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쟁점으로 본 한국사/ 박현)
당나라의 야심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 신라에는 계림도독부 설치 -> 부여융과
유인궤, 문무왕의 화친의식=>백제도 속국화, 신라는 스스로 속국 인정-> 신라는 안으로 힘을
한데 뭉쳐 당을 몰아내려 하고, 당은 한반도를 독차지하려 했으므로 두 나라는 항상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 P. 159)
연도 7C 무렵의 한반도
===============================================
551년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589년 수에 의한 중국의 통일
612년 고구려와 수의 대결전, 살수대첩
641년 백제의 대공세(신라의 대야성 등 40여 성 점령)
645년 당의 고구려 침략, 안시성 승리
648년 김춘추가 당에 건너감, 나.당 간의 동맹 형성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멸망
676년 신라의 당군 축출, 삼국통일의 완성
698년 발해의 건국
이야기 한국 역사 3-1
< 삼국의 사회와 문화 >
= 삼국의 문화 =
1. 고구려
* 문화적 배경 - 영혼은 살아있다. - 무덤(궁궐, 가옥)
도읍지 - 졸본(압록~동가) - 국내성(압록강) -
평양성(대동강) - 기름지고 기후온화
선진대륙문화 - 중국과 대등한 위치
* 문화의 내용 - 호쾌, 웅대함 - 진취적기상 - 귀족적 - 불교적
* 근거 - 무덤과 벽화 - 4~5C - 안악3호 덕흥리 - 주인의 초상 - 신격화 삼각구도, 경직, 근엄
5~6C - 수렵도 - 북방민족의 기상
- 씨름 - 전통적 힘겨루기 - 이국인의 모습
- 춤추는 모습 - 진취적 기상
- 생활인의 모습 - 지배의식 변화 - 지배, 자신감
* 학문 - 태학 - 유학 경당
* 불교 - 소수림왕 - 광개토왕
2. 백제
* 문화적배경 - 도읍지 - 위례성 - 웅진 - 사비 - 조용,평화
주변국과의 관계 - 중국, 일본과 우호 - 일본문화의 밑거름
문화의 내용 - 온화, 우아 - 친근함 - 부드러움
불교장려 - 불교미술 - 건축물(목조, 균형미) - 미륵사지탑, 정림사지탑
불상(온화한 미소) - 마애삼존불, 금동보살입상
무덤 - 3~5C -고구려의 영향
5~6C - 돌무덤
무녕왕릉 - 돌방무덤(석실무덤). 남조의 영향
학문 - 오경박사, 의학박사, 천문학
* 외교관계 - 백제와 일본 - 정치적 친화 관계 - 아스카문화
3. 신라
* 문화의 내용 - 문화적배경 - 정월, 설, 대보름 - 토착신앙
도읍지 - 서라벌 - 경주 정교, 섬세
근거 - 무덤 - 돌무지무덤 - 도굴않됨, 벽화없음, 관파괴 덧널무덤 금관총, 서봉총
* 학문 - 이두문자 - 향가 - 국학 독서삼품과
* 불교 - 석가족화
고구려의 묵호자 - 호국불교
불교의 내용 - 온화한 미소 - 친근감 - 피정복인의 고통구원 - 마애불
귀족 + 왕권 - 미륵불교 - 귀족상징
원시불교, 전륭성왕사상 - 정법에 따른 정치 - 부처님은덕 - 왕권발전
1.삼국의 문화 - 중앙집권 - 문화의 발달
- 영토 싸움 - (기후, 풍습의 차이) - 문화의 차이
2.삼국의 불교 - 불교를 적극 후원 (부족국가 ->보편성, 객관적 관념체계
국가가 불교 공인 - 사회 질서를 유지 왕 중심의 지배 체제 귀족 수용
계급의 당연시 - 서민(백성) - 현세의 삶(전생의 업)
- 귀족, 왕 - 전생의 덕
= 삼국의 계급 =
1.관리제도
* 고구려 - 12등급 법률이 엄격
* 백제 - 16등급 22개의 담로 - 왕국이 다스림
* 신라 - 17관등 상대등 - 귀족대표
2. 계층구조
* 귀족 - 신라6부 백제 5부 고구려 5부 토지, 벼슬 권력
* 평민 - 장사, 세금, 부역
* 노예 - 잡역 - 상품성
% 고대사회
* <귀족의 독점> - 생산수단, 생산결실
민중의 노예화(전쟁->귀족의 부, 집권욕),
토지의 황폐화
(민중의 의식변화 : ‘려’ ‘우경’의 보급, 생산력 증가)
- 인신적 지배 -> 토지를 매개로한 인간지배, 생산물 수탈
=> 봉건제 성립
* 순장제도가 사라지고, 민중의 사회적 지위 상승
< 남북국시대 >
1. 신라
1) 왜구와의 관계
2) 피리
3) 고구려인의 강제 이주
* 외부적 상황
- 사라센세력의 확대
- 당나라 - 탈라스전투
안녹산의 난
4) 통일후의 귀족 <--> 백성 궁핍(세금, 부역) -- 사치(지방호족세력의 강화)
5) 통일신라후의 종교
(호국불교) - 양지. 원효대사. 보덕. 의상대사. 부궤화상. 혜공스님
극락이 현세에 있다. 곧, 신라땅이 극락이다.
(신라 - 불국토설 -> 귀족왕실을 위한 불교) (불국사)
석불 (조화로움, 이상미) 신분의 존엄성
석가탑 안정, 균형
(권위의 상징) - 특정귀족의 모습
@ 백성(업보로 신음)
사회 신분의 역할을 합리화.
- 귀족을 유지.
- 민중을 효율적으로 통치.
- 민중의 자각을 막음
@ 김대성 - 불국사
2. 발해 <- 고구려 땅의 새기운(고구려 부흥운동)
1) 당 - 고구려 도독부
2) 강제이주(669년 3만8천가구) ->몽골 -> 세금징수, 기아, 흉년
3) 배경 (당의 영주 반란) -> 말갈족 고구려 유민의 자극
4) 발해건국
->압록강 상류. 만주지방
->진나라 (왕조영 : 대조영)
위치 : 길림성 돈화현 부근(천연 요새. 철. 출중한 인물)
* 외교 : 돌궐과 화친
713 발해 ( 발해군왕 홀한주도독)
719 무왕 (무역활발)
-> 중국과 문제 (발해독 자연호)
문왕
732 신라 + 당 / 발해 + 일본 (이이제이 정책)
근거 : 신라고기. 구당서. 일본서기
한국사이야기4 (p 80)
발해사에 대한 여러가지 측면
한국사 새로보기 ( p 165 ~ 170 )
이야기 한국 역사 3-2
- 신라의 동요
- 후삼국 시대
신라
* 신라의 전성기 : 중대(태종 무열왕 ~ 혜공왕) 신문왕 ~ 경덕왕
* 학문 : 불교 유학
* 유학의 인물 : 강수, 설총, 김대문, 최치원 등
* 관리 제도 : 왕 상대등(화백회의의 의장) 시중
* 행정 구역 : 9주5소경과 9서당
- 9주 : 나라를 나눈 행정구획
- 5소경 : 5개의 도성으로 직할시와 비슷한 역할
경주로 통하는 요충지 - 서원경, 금관경, 남원경, 중원경, 북원경
- 9서당 : 국방, 치안 유지의 경찰 임무
* 불교 < 교종 > < 선종 >
* 전통적 불교 종파
* 화엄종
* 불경 연구가 목적 - 교학불교
*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
- 왕즉불의 사상, 윤회 사상
* 왕실 불교, 귀족 불교
- 귀족 신분 옹호
*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
* 어려운 이론에만 치중
* 교종의 폐단에 대한 반발
* 7C 한반도에 전래
* 자기 수양이 중심
- 문자에 구속되기를 거부
- 개인주의적 경향
* 호족들이 선호
- 중앙집권에 반대하던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 됨
* 호족들의 근거지인 지방에서 발전
* 신라 사회의 붕괴와 새로운 단계로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 녹읍, 식읍 제도
- 녹읍 : 국민의 세금중에서 일부를 녹봉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녹읍을 지닌 관리에게는 그 지방에 대한 행정권이 없다.
- 식읍 : 공로에 대한 보상
그 지방의 세금, 특산물을 직접 받는 것
1대로 끝나며 세습권이 주어지지 않음
- 녹읍, 식읍 제도 -> 연봉, 월봉 -> 녹읍 제도(경덕왕 16, 757년)
- 연봉, 월봉의 의미 : 1. 토지 독점의 폐해 방지
2. 지방 호족의 군림, 횡포 봉쇄
왕위 계승으로 본 신라
36대, 혜공왕 (765~780)
* 8세에 왕에 즉위, 어머니 만월 부인이 섭정.
* 왕, 만월부인, 김대공일파와 김양상, 김만종등의 귀족들이 대립
* 김대공 : 만월 부인의 일가, 벼슬 ; 일길찬
김춘추의 후손
* 김양상 : 내물왕의 10대손
김대공 일파 제거
김융(대아찬), 김은거(이찬), 김정문(시중) 반란 제거
김지정의 난 - 만월 부인과 내통하던 인물이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만월부인과 혜공왕을 살해.
김양상이 제거
37대, 선덕왕 (780~785)
* 김양상 - 김경신에 의해서 추대되어 왕위에 오름
* 김춘추 자손의 왕위 계승이 끝남
38대, 원성왕 (785~798)
* 김경신 - 내물왕의 12대손
* 북천제사 - 북천 개울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 비가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게 되어 신하들이 화백회의에서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
* 김주원 : 선덕왕의 조카, 태종 무열왕의 6대손,
선덕왕의 왕비 구족부인이 왕으로 추대하려던 인물.
* 제도 1. 무력 학문중심 (오랜 평화 시대)
2. 독서 삼품과 : 상품, 중품, 하품으로 나누어 관리 등용.
3. 철저한 귀족 중심의 사회 - 골품제도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남.
평민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
39대, 소성왕 (799~800)
* 원성왕의 큰 아들 인겸의 아들.
* 재위 2년 만에 사망
40대, 애장왕 (800~809)
* 소성왕의 원자로 13세에 즉위, 작은 아버지 상대등 김언승이 섭정.
* 802년(즉위 3년) 죽었다 살아난 사건 후 해인사 건축.
- 염라대왕이 불교를 소홀히함을 질책하여 살아난 후 불사를 일으킴.
- 왕비의 등창을 승려인 순응과 이정이 치료, 이의 보답으로 해인사를
짓는 불사를 일으켜 절에 보시.- 민중의 고통이 더욱 가중.
* 개혁 정치 예) 불교 보시, 녹읍 제도 실패
김언승에 의해 주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
41대, 헌덕왕 (809~826)
* 김언승 -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름.
* 애장왕대의 개혁 정치 계속.
* 김헌창의 난 (재위 14년) - 토별대 파견, 승리했으나 국력약화의 심화.
* 당나라 구원병 파견 -> 국력 약화
* 지방 호족 세력의 등장.
42대, 흥덕왕 (826~836)
* 헌덕왕의 동생
* 장보고에게 청해진을 설치하게 함.
* 왕위를 계승할 왕자 없이 사망.
43대, 희강왕 (836~838)
* 흥덕왕 당시 상대등인 김균정의 조카 - 김제융
* 김균정과 왕위 다툼 싸움 끝에 김균정이 죽고, 희강왕에 즉위
* 자신을 추대한 김명을 상대등으로 임명하나 그의 반란으로 자진.
44대, 민애왕 (838~839)
* 김제융을 추대해 희강왕이 되도록 도왔던 인물로 후일 반역 - 김명
* 김균정 계에게 도전을 받고 재위 1년만에 병사들에게 살해됨.
45대, 신무왕 (839)
* 839년 4월에 즉위, 7개월만에 사망.
* 김균정의 아들, 희강왕 때 아버지 김균정이 김제융에게 패하고
죽은 후 아내와 아들 경응을 데리고 도망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의탁.
* 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름.
46대, 문성왕 (839~857)
* 경응 - 신무왕(우징)의 아들.
* 장보고의 딸 난화와 정혼했던 사이, 신하들의 반대를 이유로 왕비로 맞지 않음.
* 장보고의 반란 - 염장에 의해 진압. - 장보고를 속여 죽임.
* 신의를 저버린 왕
47대, 헌안왕 (857~861)
* 신무왕의 이복 동생
* 슬하에 딸만 둘이 있어 사위에게 왕위 계승.
* 궁예의 아버지로 알려진 임금.
48대, 경문왕 (861~875)
* 할아버지가 희강왕
* 헌안왕의 두 딸을 모두 왕비로 삼음.
* 정치에 열의를 가졌으나 뿌리 깊은 진골 귀족간의 분쟁을 바로 잡지 못함.
* 866년, 김윤홍, 숙홍 형제의 반란 - 일족 몰살
* 868년, 김예, 김현의 반란
* 874년, 근종의 모반 - 거열형
49대, 헌강왕 (875~886)
* 처용가
* 879년 신흥의 반란
50대, 정강왕 (886~887)
* 887년, 이찬 김요의 난
51대, 진성여왕 (887~897)
* 헌강왕과 정강왕의 누이.
* 나라일을 돌보지 않고 젊은 화랑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
* 재위 2년(888년) 2월, 대구화상이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만듬
* 백성들의 생활 - 유랑민, 거지로 전락
* 재위 3년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 - 농민 전쟁의 시작
52대, 효공왕 (897~912)
* 헌강왕의 서자.
비 : 이찬 예겸의 딸
53대, 신덕왕 (912~917)
* 이찬 예겸의 아들
* 실제 다스리는 지역이 경주로 한정될 정도로 국력이 약화된 시기.
* 국토의 대부분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속함.
54대, 경명왕 (917~924)
* 신덕왕의 아들
* 918년, 현승의 난 - 신라의 몰락 재촉
* 궁예 피살되고 왕건이 추대된 시기.
55대, 경애왕 (924~927)
* 신덕왕의 둘째 아들
* 927년, 포석정에서 견훤의 공격을 받고 자살.
56대, 경순왕 (927~935)
* 문성왕의 6대손 - 김부
*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름
* 고려에 항복 - 스스로 왕건의 신하가 됨
* 마의 태자 -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
인물로 본 신라
장보고
* 본명 : 궁복
* 당나라의 행패와 방관하는 조정에 대한 불만, 미천한 신분의 한계->당으로 건너감->당의
군대에서 무녕군 소장 벼슬(중간 지휘자) -> 헌덕왕 때 귀족들의 반대로 신라의 장군이 될
수 없었음 -> 흥덕왕 때 신라로 돌아와 3개의 군진 중 청해진의 대사로 임명 -> 이름을
장보고로 고침 -> 우징과 아내,아들 경응 보호 -> 때를 기다리던 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제거하고 우징의 신무왕 즉위를 도움 (딸 난화가 왕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 신분 상승)
-> 감의 군사(공로에 대한 보상이었으나 신라의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우를
못받음) ->청해진으로 돌아옴 -> 난화를 태자비로 삼겠다는 신무왕이 약속을 못 지키고
일찍 죽음 -> 문성왕 (난화와 정혼했던 사이)이 귀족들의 반대로 다시 장보고와의 약속을
어김 -> 장보고의 귀족에 대한 분노, 반란 -> 염장에 의해서 살해됨
* 장보고의 의의
- 해양 활동과 무역 활동으로 국위 선양
- 평민의 지위를 향상시켜 낮은 신분층에 활력
* 장보고의 죽음
- 귀족과 평민의 세력 다툼에서 평민의 패배
처용랑
* 49대, 헌강왕대의 용왕의 아들.헌강왕이 개운포에서 용왕에게 절(망해사 or 신방사)을 지어
주기로 약속하자 용왕이 일곱 아들 중 하나인 처용을 데려 가도록 한다.왕은 처용에게 벼슬과
아내를 내려 주며,처용은 화랑들과 어울려 산천을 돌며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진다.
어느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다른 사내와 있었으나 이를 죽이지 않고 자신이 떠나기로
결심하고 노래와 춤을 추자 사내가 나와 용서를 빈다.그는 역신으로 앞으로 처용의 얼굴
그림만 보아도 비켜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라진다. 그 후 신라에는 병을 예방하기 위해
처용의 얼굴 그림을 집에다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 처용은 아랍인?
1. 신라 시대에 아리비아 상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
- <고려사>에 고려 초기 아라비아 상인의 활동 서술
헌강왕 재위와 고려 건국은 약 30년의 차이 밖에 없으므로 신라 시대에도 아라비아인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
- 신라국에 들어간 아라비아인은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대부분이 정착했다.
2. 경주 괘릉의 무인석
- 신라인과 다른 이방인의 모습.우람한 체격,높은 코,파마를 한듯한 텩수염, 곱슬 머리 등
3. 개운포(울산)는 신라 최대의 국제 무역항
* 처용랑은 지방 호족의 자제?
- 울산 출신 호족의 아들. 취약한 왕권 강화를 위해 지방 호족의 아들 포섭
최치원
* 헌강왕 1년(857년~?) 출생
* 한국 최초의 유학 사상가
* 문성왕 시절 경주 근처의 한 고을의 사또 부인이 멧돼지의 아이를 낳는다.남편이 그 아이를
강물에 띄워 버렸으나 빨래하던 할머니에 의해 구출되는데 그 아이가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이라고 전해진다.
* 12세에 당에 유학 -> 18세에 당의 과거(빈공과)에 급제
* 당에서 율수현위의 벼슬을 지낸 후 회남 땅에 머무르던 중 황소의 난을 글(토격황소문)로써
토벌
* 29세에 신라로 돌아와 시독겸 한림 학사수병부 시랑 지서 서감의 직책을 맡음
* 진성왕 때 <시무책>을 올려 개혁의 시급함을 알리나 외면 당함
* 귀족 사회의 신분 제도 반대
* 질서속의 개혁 주장 - 농민 봉기 부정
* 신라 조정에 회의를 느끼고 산천으로 떠돌다 말년에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감
* 저서 : <계원필경>20권, <중산복궤집>5권, <난랑비서문>, <화랑세기>
인물로 본 후삼국 통일
견훤(진훤)
* 신라 사벌주(경북 상주시) 가은현, 아자개의 다섯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남.
*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15세 때 성을 '진'으로 바꾸고 왕경에서 군에 입대 -> 비장
* 신라 조정의 부패를 보고 군사를 모으기 시작 - 도둑떼와 유랑민
* 진성여왕 6년(892년), 완산주(전북 전주시) 함락 -> 무진주(광주) 함락
* 효공왕 4년(900년) 완산주에서 왕위에 오름 -> 후백제 건국
의자왕의 묵은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백제 유민의 의식,반신라적 분위기를 이용
* 935년 3월 맏아들 신검이 왕위 찬탈
- 견훤이 첩에게서 나은 아들(금강)에게 왕위를 계승할 것을 경계
* 금산사에 유폐
1. 말년의 견훤 의지력 약화
2. 신라 제도와 의식을 그대로 사용, 독자적 연호도 만들지 않음
- 백제 유민의 정서와 상반된 모습
3. 고려에게 계속 밀리는 추세
4. 금강의 나이가 어림 - 강력한 왕권 행사가 어려우리라는 추측
5. 개혁 정책 시행으로 골품제에 따른 귀족 사회의 권력과 재부의 독점을 막기를 바라는
진보파와 달리 견훤쪽의 보수 세력은 개혁의 의지가 없었다.
* 금산사에서 탈출, 고려에 귀순
* 전쟁터인 황산에서 등창으로 사망
궁예
* 신라 헌안왕(or 경문왕)과 후궁 사이의 왕자, 5월 5일에 출생
* 나라에 해가 되는 인물이라는 일관의 말을 듣고 왕이 죽이도록 명하나 유모가 몰래 아기를
키운다. 신하가 아기를 다락 밑으로 던질 때 유모가 받으며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
눈이 되었다고 한다.
* 세달사의 승려(법명-선종) - 무술연마(신라 왕실에 대한 증오심)
* 진성여왕 5년(891년) 기훤에게 의탁
* 진성여왕 6년(892년) 양길에게 의탁
* 진성여왕 9년(895년) 첫 전투
* 신라 북부와 한강 유역의 땅 차지
* 송악의 유력한 세력인 왕륭과 아들 왕건이 귀순
* 효공왕 5년(901년) 후고구려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됨, 도읍 : 송악
* 효공왕 8년(904년) 국호 : 마진 연호 : 무태
* 효공왕 9년(905년) 도읍 : 송악 -> 철원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왕륭 등과 같은 호족세력을 받아 들여서 세워진 나라.
그러므로 지방자치를 원하는 호족들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하기 위해 천도.호족세력의 실세인
왕건과 반목
* 911년 국호 : 태봉 연호 : 수덕만세
* 초기에는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 하고 상벌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등 민중으로
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했으며 포악한 성격과 신라 왕들 못지 않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어감.
* 재위 18년(918년) 6월 왕건과 신하들 반란
- 궁예의 폭정. 궁예가 중앙 집권으로 그들을 누르려 하자 그들(호족세력)의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 도망 쳤으나 시골 농부에게 맞아 죽었다고 함.
왕건
* 877년 송악의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남.
* 918년 6월 15일 왕으로 즉위 국호 : 고려 연호 : 천수 도읍 : 송악
* 견훤이 고려를 치기 위해 먼저 신라를 공격, 신라는 이찬 김율을 고려에 보내 도움을 요청
-> 후백제 후퇴
* 924년 7월 견훤이 고려의 조물성(경북 김천시) 침공
-> 서로에게 볼모를 보내기로 하고 화친
* 926년 4월 - 14대 애왕 26년에 발해가 멸망하여 그 유민을 모두 받아들여 세력 강화
* 볼모인 견훤의 조카 진호가 병사 -> 조카의 죽음을 의심하여 볼모인 왕건의 6촌 동생을
살해 -> 다시 고려 침략 -> 후백제 패배
* 927년 11월(신라 경애왕 4년) 후백제가 신라 침공 -> 경애왕 자결
* 신라의 왕족 김부를 왕위에 세움(경순왕)
* 경순왕의 요청으로 고려는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와 전쟁을 하나 패배
* 고려 태조 13년(930년) 1월, 고창(경북 안동시) 전투에서 고려 승리
* 후백제 936년 9월 건국 45년만에 멸망
* 신라 경순왕 9년(935년) 11월 고려에 항복, 스스로 나라를 내어줌
* 다시 한번 한반도 통일 - 고려 건국 19년만에 통일
신라 멸망의 원인 - 골품 제도의 모순
1. 왕당파에로의 권력과 재부의 집중에 따른 귀족파의 불만
2. 끊임없는 왕위 쟁탈과 권력 투쟁 (어린 왕의 왕위 계승, 단명)
* 반역의 역사 - 정치개혁 의지에 의한 저항이 아닌 권력에 대한 사사로운 욕심
- 내부 붕괴로 통치력 약화, 국가 재정의 고갈, 미약한 왕권
3. 월봉에서 녹읍제도로 전환되면서 호족 세력 성장.
4. 오랜 세월의 평화와 안정에 의한 귀족(화랑 포함)들의 타락과 사치, 방탕한 생활.
5. 평민들의 유랑민, 도둑으로의 전락 -> 나라에 대한 반감, 무리의 힘 집결,
지배 세력에 대항하기 시작
6. 불교의 선종 - 민중 의식을 깨움
7. 도둑 집단과 몰락한 귀족 세력이 연합 예)김헌창의 난
8. 백제, 고구려 유민의 반감 유발
- 중앙 정계 진출 봉쇄, 지방의 성주, 장군의 길도 봉쇄
궁예의 실패
1. 지나친 개인적인 복수심과 폭정
2. 신라에 대한 불만 세력 흡수에 실패
3. 자체적인 세력 확립 실패 - 호족 세력과의 연합.중앙 집권제로의 전환으로 호족세력의
반감을 불러 일으킴
견훤의 실패
1. 신라의 제도 고수 - 진보파의 불만, 백제 유민의 불만
2. 경애왕을 죽여 정치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신라인의 반감만 유발
왕건의 성공
1. 정세의 정확한 파악
2. 내정 개혁 - 신라의 낮은 귀족, 지방호족, 유학세력, 풍수세력, 선종세력을 끌어들임
3. 10분의 1세 고수로 호족과 농민의 환심을 얻음
4. 겸손하고 온유한 이미지 부각에 성공
5. 여러 신분, 지역에 따른 겹혼인으로 세력 확장 - 호족세력 규합이 권력의 관건임을 간파
참고 자료
* 남국 신라와 북극 발해(한길사, 이이화)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 이덕일, 이희근)
* 진훤이라 불러다오(푸른 역사, 이도학)
이야기 한국 역사 4-1
1. 다져지는 고려의 기틀
1)태조 왕건
936년 후백제 멸망으로 통일 왕조를 세움. 후삼국뿐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 유민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통일.인자하고 백성을 사랑했다.개국공신들과 호족 세력을 중앙관리로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며 공로에 따라 ‘역분전’을 실시함.
* 왕권 강화 정책
ㄱ. 기인제도 : 지방호족의 자제들을 인질 삼아 서울에 머물게 함(회유, 통제의 수단)
ㄴ. 혼인정책 : 6명의 왕비와 23명의 후궁으로 호족 세력의 반란은 막았지만 호족들의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됨.
ㄷ. 훈요십조 : 후손들에게 전하는 훈요를 조석으로 읽어 귀감으로 삼으라. <고려사>에 전함
진위 여부(고려사 최제안전에 <신서>와 <훈요>를 병란에 분실되었다가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얻어 세상에 알려짐. 태조의 정치사상과 한계)
2)혜종(943-945)
장화 왕후의 맏아들 무. 도량이 넓고 지략이 뛰어나며 용맹. 외척, 호족 세력의 도전과 위협.
왕규와 요 왕자가 왕위를 노림. 2년만에 혜종이 죽고 박술희와 왕식렴의 추대로 요 왕자가 3대
임금 정종이 되었다. 정종은 박술희와 왕규를 갑곶으로 귀양을 보내고 왕규는 박술희를 살해함.
왕규의 가족과 친지 모두 몰살. 강한 두 귀족을 제거하고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려고 왕식렴에게
대궐 공사를 시키지만 2년만에 왕식렴과 정종이 죽음.
3)광종의 왕권강화책
ㄱ. 노비 안검법(956)-전쟁중의 포로,이재민들을 양민으로 풀어 주게함. 호족의 세력이 약화
되고 국가의 세수입이 늘어났다.
ㄴ. 과거제도 : 후주의 쌍기가 추천. 958년 9월에 첫 과거시험, 임금에게 충성할 관리층이 생김,
백관의 공복을 제정등급에 따라 자삼, 단삼, 비삼, 녹삼을 입도록 함.
ㄷ. 연호 사용 : 광덕, 준풍 황제 칭호를 사용함
4)경종
전시과 제도 실시(관리들에게 지위에 따라 토지를 배분, 일반 백성에게도 골고루 나누어줌.
조세를 거둘 수 있는 수조권만을 주었다.)
5)성종 : 호족 세력 힘은 약해졌지만 그들을 이용할 필요성
#최승로 : 시무28조 (고려 역대 왕들의 잘못을 가려내어 고칠 점을 건의)
내용 : 군사의 수효보다 훈련에 주력, 불교 숭상으로 낭비, 간신을 물리치고 충신에게 일을
맡기도록 함.
2. 거란의 침입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서 태조가 거란을 미워함. 만부교 사건, 송과의 친밀한 관계에
불만을 가진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1) 1차 침입
성종12년(993) 소손녕이 봉산군을 점령. 박양유, 최량이 봉산군에서 졌다. 대동강 이북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이 대두됨. 서희와 이지백이 반대. 안융진에서 10일 동안 공격하다 수만의
대군으로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담판을 보자고 요청을 한다. 서희가 거란 소손녕
과의 담판이 벌어졌다. 소손녕은 침략 이유를 고려가 옛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고려가 오랑캐라고 부르며 멸시하고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는 점을 들었다. 여기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이었고 송나라 문물을 배우고 여진이 통로를 막고 있어서 불가능 하다며
옛땅을 돌려 달라고 함(여진을 끌어들인 태도는 상국답지 못한 행위가 아닐까?)
#결과 : 압록강 동쪽에 여러 성을 쌓고 평안북도 일대에 군사, 교통상의 요지를 마련함. 6주
(홍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는 중요한 군사기지이며 조공로가 된다. 그후 압록강
남쪽의 여진족을 무찔렀고 6성을 쌓게 된다. 서희의 담판이 국토를 넓히는 결과. 목종1년에
서희는 죽었다.
2) 2차 침입
현종1년(1010) 거란의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홍화진에서
양규가 물리침. 통주에서 행영도통사인 강조가 30만 군사로 단숨에 무찔렀다. 아율분노와
야율적노가 다시 공격하지만 실패함. 10만을 무찔렀지만 20만이 남아있었고 자만심으로
허술한 사이에 고려의 작전을 깨달은 거란의 장수들은 3진을 하나씩 공격해옴. 참패하고
강조와 이현운등이 포로로 잡혀갔다. 거기서 꿋꿋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강조.하공진과
고영기가 국서를 들고 거란군에게 갔지만 현중을 요나라로 보내라는 억지를 부렸다. 개경은
잿더미로 변하고 왕은 나주로 피난을 갔다. 양규는 귀주에서 거란을 크게 물리쳤다. 양규
장군은 추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강조의 정변 : 경종의 셋째 왕후인 현애왕후의 아들이 목종이 되면서 김치양과 짜고 세자로
책봉중인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했다. 절에 피한 대량원군은 주지스님의 기지로 목숨을 구했다.
김치양이 목종을 죽이려고 대궐을 불태우는 일까지 생기고 목종은 강조에게 개경으로 오라고
했지만 망설이는 강조는 어지러운 개경에 닿아서 김치양 일당을 죽이고 충주까지 도망간
목종도 죽이고 대량 원군이 현종으로 왕이 된다. 현종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열게 된다. 하지만 강조의 정변은 2차 침입의
원인이 되었다.
3) 3차 침입
현종9년(1018) 거란은 현종이 거란의 수도로 찾아오기를 요구하며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했지만
1015년에 거란과의 외교를 끊었다.이를 구실로 소배압이 10만을 이끌고 침입을 했다.강감찬과
강민첨이 이끄는 20만대군이 안주,홍화진에서 쇠가죽을 이용해 거란의 군사들을 물리쳤지만
소배압은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했다. 병마판관 김종현은 개경을 지키고 있었다. 강감찬과
강민첨이 귀주에서 소배압 군사들을 격퇴했다. 귀주대첩
#결과 : 2천의 군사만 데리고 참패한 거란은 정식으로 외교를 맺고 사신이 오고가게 된다.
거란의 힘이 미약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종은 백성들의 안정을 위해서 의창수렴법을 실시
하고 군사들에게 구분전을 나누어 줌.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토성을 30만4천명을동원하여
현종 20년에 끝났다.
* 귀주대첩의 명장 강감찬
정종3년(948)금주 삼한 벽산공신 강궁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서삼경, 천문, 지리, 술서,병법
까지 10살에 통달하는 신동. 35세에 장원 급제. 한성판관, 예부사랑, 한림학사, 중추원사, 행영
도통사, 평화기엔 문하시중까지 올랐다. <낙도교거집> <구선집>등의 시가집도 남겼다.
3. 귀족 문화의 발전
1) 학문이 꽃피다.
* 벽란도 : 국제적 무역항으로 일본, 거란,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드는 곳으로 종이와 책등은
고려 문화를 발전시킴.
* 최항 : 고려 건국부터 목종까지 실록을 기록(19년) 아들 최유부가 하사품을 받지 않음.
* 교육제도
ㄱ. 국자감 : 국가기관으로 학비를 받고 공부 기간이 길고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적었다.
ㄴ. 사학 : 9재학당(문헌공도) 최충이 세움. 12개의 사학이 생기고 거기서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대부분. 정지상, 김부식 등 유학으로 연결됨.
2) 해동 공자 최충
대령군(해주)에서 성종3년(984) 최온의 아들로 태어나서 22세 목종 8년에 장원급제. 우습유가
되어서 왕의 잘잘못을 간언. 7대 실록을 편찬, 덕종때는 중추원 부책임자. 정종때는 지공거로
책임을 다함. 문종 원년엔 문하시중, 9년간 수상의 자리에 있음.‘여러 대의 유종이요. 삼한의
기덕’이란 평처럼 학식과 인격을 골고루 갖춤.사학을 열어 후진을 양성함.9재학당에선 9경3사,
시부 사장을 가르쳤다. 학문을 닦고 덕망을 쌓아서 출세해야 뒤가 좋은 법이라고 했다.
3) 불교의 융성
* 고려의 지배 사상 : 불교,풍수지리설, 유고
ㄱ. 승과 제도 : 덕이 높은 승려는 왕의 스승으로 모심
ㄴ. 개경에 70개의 절이 세워지고 문종때 세운 흥왕사는 12년만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절이 세워짐. 연등회가 닷새동안 계속 됨. 그후 불교가 사치스러워지고 귀족 불교로
흘러가게 된다.
ㄷ. 대각국사 의천 : 넷재 아들. 선종 고종으로 나누어진 고려 불교계에 실망하고 송나라로 건너가
계성사의 유성법사에게 가르침을 받음. 속장경(송, 거란, 일본등 여러나라에서 구한 불교
서적과 옛경전을 모아서 만듬) 진리는 하나.통합하여 선종과 교종을 합해 천태종을 펴고 그
시조가 되었다. 불경을 강론하고 폭넓은 견문과 해박한 지식으로 저술된 책이 300여권,
화엄경 번역이 300여권에 이른다. 47세의 나이에 입적함.
4) 화폐사용
ㄱ. 화폐사용의 이유 : 의천이 좋은 정치를 베풀고 세금을 적게 부과하며 돈을 만들어서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상업이 발달할 수 있게 하라고 의견을 내고 숙종이 받아들였다.
ㄴ. 주전도감 : 돈을 만드는 관청
ㄷ. 엽전 :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중통보, 활구(은 한근으로 한반도 지형을 본뜬 은병, 가치는
쌀10섬에서 최고 50섬, 상류사회에서 유통)
# 참고도서
<고려왕조실록> 박영규 / 들녁
<고려시대 이야기> 창비
<반란의 시대> 김정환 / 푸른숲
<고려시대 사람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역사연구회 / 청년사
# 토론
고려의 건국과 거란침입으로 겪은 수많은 민중들의 삶, 고려가 이룩한 통일이 지금 현싯점에서
주는 의미를 되돌아보며….자주적인 민족과 진정한 인간의 삶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 싶었다.
이야기 한국 역사 4-2
< 고려중기사회 >
숙종 : 1095 ~1105
예종 : 1105 ~1122
인종 : 1122 ~1146
의종 : 1146 ~1170
명종 : 1170 ~1197
1107년 : 윤관 여진 정벌
1115년 : 금 건국
1125년 : 요의 멸망
1126년 : 이자겸의 난
1127년 : 북송멸망 남송건국
1135년 : 묘청의 서경천도
1145년 :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47년 : 남송 금 강화조약
1170년 : 무신정변
1179년 : 경대승 도방정치
1196년 : 최충헌 집권
고려의 대외 관계
1. 여진과의 관계
여진족은 고구려 말갈족이라 불리던 족속으로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발해로 옮겨왔다. 이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 라 섬기며 안으로 스스로의 힘을 기르다 숙종8년 여진의 오야속이 기병
부대를 이끌고 고려에 침범, 고려군은 참패를 당한다. 이후 윤관은 별무반을 설치, 1107년
윤관을 행영 대원수, 오연총을 부원수로 여진을 정벌, 고려는 17만 대군으로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소탕, 135곳의 촌락을 함락, 영토를 개척하고 이곳에 9성을 쌓고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이로써 고려의 영토는 함경도까지 넓혀졌다.하지만 여진이 함경도의 남부지방을 찾기
위해 항전을 계속 하자, 고려조정에서는 9성을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9성의 반환으로 여진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윤관을 추궁, 관직과 공신칭호를 박탈했다.이후 9성을 돌려받은
여진은 그곳을 근거지로 차츰 세력을 키워 오야속의 뒤를 이은 아골타가 부족을 통합하여
1115년에 금을 세우고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고려조정에서는 문벌귀족세력 특히
이자겸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수락하게되는데, 이는 민족의 수치이며
고려의 북진정책의 포기라 할 수있다. 이후 금과 화해적인 관계를 유지하게된다
2. 고려와 요의 관계
송.금연합군 : 요 공격
송은 그동안 괴롭혀온 요나라를 없애고 연운 16주를 되찾으려 함.
요는 이때 고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구하나 김부식등이 반대.
고려는 금의 공격으로 쇠약해진 거란의 점령지 보수와 내원성을 찾을 수 있도록 금과 교섭 :
고려의 실리적인 외교정책.
금은 고려에게 이 지역을 넘겨 줌으로써 두나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리려는 목표.
3. 고려와 송의 관계
요를 멸망시킨 금은 다시 송을 공격하고 함께 요를 무찌른 금이 쳐들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송은 양자강 남쪽으로 쫒겨 가 남송을 건립. 이때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나 고려는 친송
정책을 취하면서도 군사적 개입을 피하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문화적인 교류는
계속 이어져 송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보다 높은 문화를 창조해 나갔다.
귀족 사회의 동요
문벌귀족
경원 이씨의 왕실 관계도
(8)현종-------------(a)원성태후
| (b)원혜태후
|
-----------------------
| | |
(9)덕종 (10)정종 (11)문종------------ (1)민예태후
| (2)인경현비
| (3)인절현비
|
---------------------------------------------
| | (5)정신현비 |
| | |
(12)순종=(4)장경궁주 (13)선종---(6)사숙태후 (15)숙종 -----(명의태후)
| |
| (7)원신궁주 |
|
(14)헌종
(16)예종----(문경왕후)
|
(17)인종=(9)폐비이씨
(10)폐비이씨
<고려 왕실과 경원 이씨의 결혼도>
이허겸
------------------------------------
| | |
이눌 이한 안효국대부인----------김은부
|
| |
---------------------- -------------------
| | | |
아자상 이자현 (a)원성태후 (b)원혜태후
| |
| ----------------------------------------------------
| | | | | | |
| |
| | (1)인예태후 (2)인경현비 (3)인절현비 이호 보현왕사
(5)정신 (6)사숙태후 |
현비 (7)원신궁주 ---------------------
| | |
(4)장경궁주 이자겸 ***
|
------------------------------------------------------
| | | | |
*** (8)문경왕후 (9)폐비이씨 (10)폐비이씨 의장
(현화사)
<경원 이씨 가계도>
*중앙 집권체제가 세워짐에 따라 문벌귀족위주의 신분질서가 확립되었다. 문벌 귀족들은
자신의 세력을 더욱 튼튼히 다지기 위해 최고 귀족가문인 왕실이 아니면, 다른 문벌 귀족과의
혼인 관계만을 맺으려 했다.
이자겸의 난
세딸을 현종의 비로 들여보낸 김은부는 이자연의 고모부이고, 역시 세딸을 문종의 비로 들여
보낸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은 자신도 또한 둘째딸은 예종의 왕비로 셋째와 넷째딸은 인종의
비로 들여보내고 자신의 거처를 의친궁,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며 권력을 독점. 왕의 자리까지
넘보게 된다. 이에 인종이 1126년에 김찬 안보린등에게 이자겸과 그의 수하이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척준경을 제거하려하나 실패, 이에 척준경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인종을
이자겸의 집에 감금하며 감시하고 인종을 위협하나 인종은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타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 일파를 제거한다. 이후 척준경 또한 이자겸을 제거한후 공을
내세워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다 그 이듬해 제거됨.
묘청의 난
1135년(인종13년)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서경 천도를 강력히 주장(정지상, 백수한등)왕을
설득하나 개경세력의 반대로(김부식등)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묘청, 유참, 조광등은 서경
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하며 난을 일으켰다. 하나 묘청의 난은 왕권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다. 이는 그들 스스로 군대를 일으킨 것을 임금에게 알렸으며 국왕도 옹립하지 않았다.
이들은 개경의 중앙 문벌귀족을 타도할 목적으로 일어 났으며, 또한 서경을 서울로 옮기고 금
나라를 정벌하여 왕을 황제라 불러 민족의 수치를 씻고 강력한 나라를 만들려 하였으나 우유
부단한 인종과 정수를 쓰지 않고 속임수를 쓴 묘청의 실수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은 공신칭호를 받고 최고 관직에 올랐으며 이때 김부식은 정지상의
문장과 재주를 시기하여, 그를 반란군과 내통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죽인다. 단재 신채호는
새로운 나라를 세워 북방으로 날개를 펴려 했던 묘청의 대위국이 김부식 일파의 수구세력에
의해 격파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무신정변의 변천과정
집권자 권력기구
성립기 1170 ~ 1196 이의방, 이고
정중부 중방
경대승 도방
이의민 중방
확립기 1196 ~ 1258 최충헌 교정도감
무신정변
1. 배경
고려시대의 무신은 문신과 함께 양반이었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문신만이 존중되고 무신은
천시당하였다.고려 중기에 들어와 거란침입,여진정벌,묘청의 난등 군사문제가 이어져 무신의
지위가 차츰 높아졌으나 문신들 또한 무신들을 여전히 차별하였다.의종 또한 문신들과 어울려
놀기만을 좋아하고 나랏일에는 안중에도 없었다.이때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고,젊은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나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
하였다.
2 경과
1170년 의종이 문신들과 더불어 보현원으로 잔치를 즐기기위해 행차하는 중에 정중부,이의방,
이고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모두 죽이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대궐을 향해 궐에 있는 모든
문신을 제거, 의종을 폐위 시키고 그의 동생인 익양군을 19대 명종으로 추대한다. 이후 무신
정권을 세워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집권했지만 안정되지는 않았다.
*무신정변은 문신중심의 귀족정권을 무너뜨리고 무신들이 정치 권력을 차지함으로써 국가
체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의민처럼 천한 신분 출신으로 권력을 잡은 무신이 많았으며
만적의 난 처럼 신분해방을 내세운 난이 발생하는등 신분제 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또한 농장의
발달로 고려의 토지 제도인 전시과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더욱
심해졌으며, 무거운 세금등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몰락하였고, 이들은 무력으로 정부에
대항하기에 이른다. (김사미, 효심의난, 만적의난등)
전시과 제도
문무 관리에게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이었다.
전 : 농사지을 논과 밭 시 : 땔감을 얻을수 있는 산
무신정변이후 지방관리들의 횡포로 수확량의 10분의1을 조세로 내는 것을 여러가지 명목을
거쳐 이중 삼중으로 조세를 부과 농민이 몰락하였으며, 권문세족들은 자손들에게 불법적으로
세습 권세가의 토지가 늘어났으며 또 이들은 세금을 내지않아 신진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마저
없어지고 나라 살림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야기 한국 역사 5-1
% 고려왕
왕건 - 혜종 - 정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정종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공양왕 - 우왕 - 창왕
1. 무신집권의 교체
1170 1179 1183 1196 1219 1249 1257 1268 1270(2) 1270(5)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인)준 임연 임유무
중방 도방 중방 교정도감 정방
<우리 역사 이야기 / 조성오 / 돌베개>
2. 농민, 천민의 항쟁이 고려 사회에 미친 영향
1) 농민들이 자신들을 짓누르는 사회 현실과 사회 구조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했다.
(탐관오리나 토호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공격을 가한 반면, 왕이나 중앙 정부는 직접적인
공격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2) 농민군의 투쟁이 고립 분산적 산발적->지배층으로 하여금 적지 않은 양보를 하게 하였다.
3) 항쟁이후 변화
ㄱ. 향.소 부곡 (천민거주 지역)이 줄어들었다. (노비와 같은 많은 천민들이 투쟁을 통해
양인의 신분을 획득)
ㄴ. 솔거노비에서 외거노비로 전환 (노예적 존재 ? 농노적 존재)
ㄷ. 민중의 사회적 각성 촉진 : 몽고 침략군 아래서 민족의 자주권 수호하는 힘의 원천
3. 우리 역사상 식민지 3번
1) 1910 ~ 1945 일본지배
2) 1945 ~ 1948 미군정 지배
3) 몽고(원나라) 침입 :
1231년 (고종18년)에서 1259년 (고종46년)에 걸침.
1차: 1231년 -> 몽고 사신 피살
2차: 강화도 천도(고려 개경 환도)
--대구 부인사 고려초조대장경 불탐. 살리타이 처인성에서 사살(승려 김윤후)
3차: 1235년 -- 경상도 지역침범
1236년 -- 전라도 지역침범
1237 ~ 1238년 경주 침입--황룡사 불탐
4차: 1247년--개경환도와 국왕 친조가 되지 않아서
5차: 1254년
6~7차: 1255 ~ 59년
ㄱ. 원종(고종 아들) ->-> 원에 구원요청 ->->1274 삼별초 진압
(다루가치 총독부)
‘진압하는 자’
강화도에서 개경천도
ㄴ. 충렬왕~공양왕: 고려가 원의 식민지가 되었으므로 왕의 시호에 붙이는 ‘종’ 자를 쓸 수
없었다. (원은 공민왕때 망하지만 친원파는 고려 말까지도 세력을 잡고 있음)
ㄷ.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 7왕은 원나라 황족 사위이다.
% 충선왕은 고려왕이면서 심양왕. 고려왕을 충숙왕에게 넘기면서 심양왕도 조카 왕고에게
넘김(갈등: 고려왕과 심양왕간에 알력은 고려 조정의 내부 분열을 일으켜 입성논의등이 제기
되는 등 나라의 독립성을 상실할 정도의 위기였는데 이는 원의 이이제이 정책에 말려든 결과
이다.
Cf) 신라가 당에게 병력을 요청하고, 자발적으로 당을 받든데 비해 고려는 40여 년간 항쟁
하다가 힘에서 밀려 무릎을 꿇었다.
% 만주관할권 : 역사적으로 보면 심양왕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라 할 만주를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영토화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원나라의 공식적인 위임을 받은터라 자연스럽게 만주는
한반도와 한 몸이 되었을 터인데 아쉽다(만주는 원. 명에게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고 이 지역에
사는 민족의 반란을 걱정했다.) 고려보다 원에 애정과 충성을 가졌던 몽골 지배 시대 고려왕과
심양왕은 의지도 없고 기개도 없었다. 청나라 황실의 고향인 만주는 이후 봉금령이 시행되면서
성역화되어 중국인, 조선인의 이주가 금지되어 우리 민족과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한국사 X파일 / 다림 / 남경태)
% 삼별초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친 이름인데 그 출발은 고려 무신정권기의 최우의
사병이었다. 당시는 최씨 집권기였으므로 단순한 사병의 성격을 넘어 전투와 경찰, 형옥의
임무를 지니는 사법기관의 임무도 수행했다. 고려의 정기 군대보다 용감해서 고려 권신들은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애썼다.삼별초가 봉기한 이유는 개경환도를 반대하면서부터이고,삼별초
의 명부를 압수 당하자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 노영희의 지도 아래 군사를 일으켜 저항한
것이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가 석축으로 용장성을 쌓고 실질적인 해상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나 고려에는 고립되었으나 일본은 진도정부와 손잡을 수 밖에 없었다. 원나라는 일본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전투집단
이라는 점 이외에 고려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 김영사>
*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국서
1) 국서 <대일본교섭문서>가 동경대학 사료편찬소에서 발견, 이우성 교수가 국내 소개.
2) 1271년 가마쿠라 막부를 거쳐 경도의 일본 조정에 전달한 12개조.
3) 1268년 고려 조정 사신 반부가 가져온 국서와 다른 내용
- ‘가죽이나 털옷을 입은 북방 미개족’이라고 비판
- 원의 연호를 쓰지 않음
- 문화자존의 의식 : 강화도에서 몽고의 야만적 습속에 동화되기 싫어 진도로 천도했으니
진도정부가 우월한 고려 문명과 문화를 지키려 함이다.
- 고려가 삼한을 통합한 대국임을 밝힘
4)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 : 일본의 표류민을 일본으로 보호 환송시킴
% 원나라의 일본 정벌
1. 원종 15년(1274) 6월에 완비했는데 원종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충렬왕 즉위년인 그 해 10월
---- 대마도, 이키 두 섬을 정복하고 본토 상륙했다가 태풍으로 치명타 입음.
2. 충렬왕 6년(1280) 2차 원정 ---- 태풍(신풍 : 카미카제)으로 실패
이야기 한국 역사 5-2 - 고려 후기사회의 동요 -
뜻 못 편 개혁정치 와 저무는 오백년
25대 충렬왕
* 원의 내정 간섭 강화
짐->고, 태자->세자, 선지(임금의 뜻을 널리 선포함)->왕지, 조.종 사용 금지->왕
중서문화성, 상서성->첨의부, 문화시중->첨의중찬, 추밀원->밀직사, 어사대->감찰사
상서(6부의 장관)->판서
* 몽고 공주(제국대장공주)와 결혼
* 공물, 공녀를 원나라에 바치고, 몽고 풍습이 널리 퍼지기 시작
26대 충선왕
* 충렬왕과 제국 공주의 아들
*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나 제국 공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자로 책봉
* 아버지와 불화
* 개혁 의지 1. 고려인의 긍지와 기상
2. 친원파 제거
3.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 축출
4. 인재 등용
5. 세도가에게 빼앗긴 토지를 원 주인에게 환원
* 개혁 반대 세력과 계국대장 공주의 음모로 왕위에서 물러남
* 다시 복귀하였으나 개혁 반대에 부딪혀 정치에 뜻을 잃는다.
* 의의 1. 개혁 시도는 고려의 자주 정신을 일깨우는 역할
2. 원에 만권당을 만들어 고려와 원의 문화 교류
3. 학문에 대한 열기를 높여 이제현, 이색, 정몽주, 이승인, 정도전 등의 학자 배출
27대 충숙왕
* 상왕의 월권으로 정치 의지 약화
* 심양왕 왕고의 왕위 찬탈 음모
31대 공민왕
* 원과 명의 교체 시기로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
1. 몽고의 풍습(변발, 호복) 금지
2. 정방 폐지
3. 신진사대부 등용
: 문벌을 바탕으로 벼슬길에 오른 권문 세족들의 횡포와 부패가 극에 달하자 서서히 순수한
실력으로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들이 등장. 이들은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기본 사상으로 한다.
4. 부원배 처단( 예: 기 황후의 아우 기철) - 부원배 : 친원파
몽고와의 전쟁 시작부터 몽고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권문 세족이라는 특권층을 형성.
고려가 원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을 등에 업고 개인적 이익을 취함
5. 정동행성(원나라의 고려 내정 간섭 기관) 폐쇄
6. 원나라식의 제도, 연호 사용 금지
7 친명 반원 정책
8. 영토 회복 운동 -쌍성 총관부 폐지 - 이성계 역사에 등장
-서북은 압록강 건너, 동북은 북청까지 영토 확장
9 노국 공주의 죽음으로 개혁의지를 상실했으며 뿌리 깊은 권문
세족들의 견제로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재위 23년 45세의 나이로
홍윤, 최만생에게 시해를 당한다.
32대 우왕
* 이성계 -고향 : 전주
- 고조 할아버지 때에 지방관과의 불화로 함경도 덕원으로 이주
- 동북 지방의 쌍성총관부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하던 이자춘의 둘째 아들
- 공민왕의 친명 반원 정책으로 동북의 쌍성총관부 공격 당시 협력 -> 역사에 등장
- 아버지의 뒤를 이어 23세에 동북면 병마사가 됨. (1357년 공민왕 9년)
- 요동의 도녕부 점령(1369년)
요동의 중심지 요양 점령(1370년, 11월)
강릉, 덕원 등지의 왜구 소탕(1372년, 6월)
뛰어난 정치력, 민생안정, 군사훈련, 반란군 진압, 홍건족 토벌, 원의 나하추 격퇴
- 고려 북방 수비의 중요인물로 자리잡음
- 임금이 될 꿈
* 위화도 회군
- 이성계는 친명파인 신진 사대부로 처음부터 요동 정벌을 반대.
- 반대의 이유 -> 4불가지론( p176)
-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서는 역사적 전환점
최영(1316년) 이성계(1335년)
순수한 무인관료 국가에서 동원시킨 군대를 지휘 자신의 통치지역과 사적 군사기반을
하는 관료적 지휘관 무인문벌 가지고 있음
힘의 근거 고려 왕조 충성을 맹세 독자적 세력기반,상황에 따른 선택 가능
신친원파 원과 전술적 제휴 후 명을 공격 친명파
북방진출을 꾀한다.
(친원파 : 원에대한 무조건적 굴종)
요동정벌 주장 요동정벌 반대
33대 창왕
* 조민수에 의해 추대
* 이성계의 뜻과는 달랐으므로 결국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몰아 ‘이씨’에 의한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주장
34대 공양왕
* 이성계 토지제도 개혁
: 공양왕 2년(1390) 9월, 나라의 땅보다 넓은 토지를 소유한 권문
세족의 토지대장 소각. 1391년 과전법 제정
* 권문세족이 몰락하고 신진사대부가 주도권을 장악
* 1392년 4월 4일 이방원이 선지교에서 정몽주 피살
* 이성계는 끝까지 정몽주를 죽이지 않고 설득하려 했으므로 아들 이방원을 질책
# 정몽주 :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이성계와 같은 노선을 걸었으나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어명을
어긴 이성계를 역적으로 규정. ‘단심가’로 자신의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킴
온건개혁파 신흥사대부 : 고려 왕실은 존속시키고 부분적 개혁 주장
(이성계 : 역성혁명파 신흥 사대부. 고려 왕실, 권문세족 모두 제거. 새 왕조 수립 주장)
* 공양왕은 신하인 이성계와 동맹을 맺어 스스로 지위를 낮추고 사실상 왕권을 포기
* 1392년 고려 멸망(34대 475년) ->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이성계 왕으로 즉위
토론
위화도 회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 민족의 자주성과 북진의 대업을 포기하고 우리나라를 영원한 소국으로 남겨 놓았는가?
- 시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현실적인 현명한 선택이었는가?
- 결과만을 중요시 하는 현 시대상은 ‘새 왕조 성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반역조차도 정당화
시킨 이성계의 조선왕조로부터 비롯되었는가?
고려의 문화와 생활
청자
* 신라말 선종의 도입과 함께 승려들이 참선할 때 졸지않기 위해 차를 애용, 찻잔으로 청자사용.
* 초기 : 맑은 비색의 순청자 사용, 주로 문벌귀족이 애용했으며 특권의식의 상징이었다.
* 무신난 이후 : 상감청자. 순청자의 아름다운 비색에 좀더 독창적이고 고려화된 문양과 기법
사용 - 나전 기법의 발달로 가능
무신 집권 세력이 애용
강화도 피신 시절이 전성기로 자신들의 안전만을 도모하며 강화도에서 여유있는 생활을 누렸던
최씨 무신 집권세력의 생활도구
*고려 말기 : 분청사기
왜구의 침입으로 청자의 가마가 문을 닫게 되자 신진 사대부들이 도공들을 지원하여 새로운
그릇을 굽게한다.신진 사대부의 기상을 대변하듯 힘이 넘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표현
공예 : 나전칠기 , 장신구 발달
글씨 : 유신, 탄연, 최우
그림 : 왕실과 귀족의 취미 생활
이녕<예성강도>, 공민왕<천산대렵도>,
불화 :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미술
섬세함과 화려함의 극치
대부분 친원 세력인 권문 세족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그들의 개인용 사찰에 걸기
위한 것으로 현세의 부귀와 내세의 극락왕생 기원
금속활자의 발명
* 최윤의 <상정고금예문> : 최초의 금속활자 책(고종 21년 1234년)
현재는 전하지 않으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기록, 예의에 관한 책으로 왕실용 책
* <직지심경> :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우왕3년 1377년)
프랑스에서 발견, 승려들을 위한 책
* <청량답순종심요법문> : 충렬왕 23년 또는 24년에 인쇄, 국내에서 발견
문학
* 패관 문학 : 최씨 정권 이후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문학으로 한문으로 전설, 설화로 이루어져
있다.이인로<파한집>, 이규보<백운소설>, 최자<보한집>, 이제현<역옹패설>
* 국문학 향가 -> 장가체가요(정과정곡, 가시리, 청산별곡) -> 경기체가(한림별곡)
* 역사서 : 일연<삼국유사>, 이규보<동명왕편>, 이승휴<제왕운기>, 각훈<해동고승전>
문익점
* 공민왕 12년(1363년)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며 그 때 반출금지 품목
이었던 목화씨 열개를 얻어 붓대에 넣어 가지고 온다. 그 중 1대가 성장하여 전국에 목화가
퍼지게 된다. 원나라 승려 홍원에게 직조술을 배워 옷감을 만들 수 있게 되고 고려의 의생활에
큰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참고 도서
- 고려 이야기 (민영. 창작과 비평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박현. 두산동아)
- 미술로 보는 우리 역사 (전국역사교사모임. 푸른나무)
이야기 한국 역사 6-1 - 조선왕조의 창업과 발전 -
조선의 건국
이성계(태조) - 공양왕 4년. 배극렴. 개경 수창궁
왕자의 난
1차 왕자의 난 : 정도전 <-> 사대부( 방원, 이숙번, 하륜 )
결과 - 세자 방석 방번의 죽음
영안대군 방과 세자 - 정종
- 방원의 세력 커짐(민심 얻음)
2차 왕자의 난 : 넷째 왕자 회안대군 방간 = 박포 <-> 방원
결과 - 방간 - 귀양
박포 - 죽음
방원 - 왕세자 책봉 - 태종
- 왕의 권력, 위엄 기틀 제도
백성을 잘 다스림 ( 신문고, 노비변정도감 )
- 1404년 10월 태조에게 인정
* 이성계의 과제
1. 민심 돌리기 - 고려 충신 자신에게 오게 하기
2. 불안정한 조정 기반, 질서 찾기 - 세자 책봉(방석 <= 정도전) * 개국공신의 힘(사대부)
3. 친명정책 - 명나라의 지지로 세력 확장(이름 조선으로, 이름 단으로)
4. 유교적인 이상 정치 - 조선경국대전, 경제육전 <-> 불교억제
중앙집권적 정치기구의 정비
1.정치제도
* 도평의사사 - 개국공신 -합좌기관 - 귀족정치 - 의정부 - 조정회의
* 문화부
* 3사 - 권력의 치우침 방지 - 홍문관 - 집현전 - 학식, 문장
사헌부 - 감찰기관
사간원 - 독재방지
* 중추원 - 군사관계업무 - 3군부
* 6조 - 실무 - 권한강화 - 호조 - 호구조사. 세금, 백성동태 파악
예조 - 예법, 음악, 제사
병조 - 무관
형조 - 법률, 노비
공조 - 관개시설관리, 산림, 광산
이조 - 인사권
의정부 전달, 6조직계제, 왕의직접 참여
* 승정원 - 왕의 비서실
* 의금부
* 지방제도 - 8도 - 부.목.군.현 - 6방
수령(목민관) - 임기제
향청 - 풍속. 감시
관찰사(감사)
2. 문화
* 불교탄압 - 도첩제
* 유교권장 - 충. 효, 인쇄술 발달
* 외교 - 친명정책
3. 경제
* 무역소
* 상업의 발달 - 화폐의 발달(세금) - 저화, 조선통보, 전폐
시전 - 6의전 - 어용상 - 장시
수공업, 상업 발달 - 천민, 상인 신분 상승
전문적인 사영수공업 발달
* 호패법 - 16세 남자, 신분증서, 백성움직임
* 농본정책 - 농민 -기술개발 -지위향상
부역의무
호패법 - 안정
자영농민
* 토지 - 농장 - 양반관료 - 권력강화
종류 - 사원전, 학전, 공신전, 군전, 내수사전 - 세습
과전법 - 직전법(세조) - 녹봉(명종)
18과 - 대를 물리지 않는다.
* 방화시설
* 개천도감
4. 신분제
신분제 사회
* 양반 - 한계 - 상업, 농업, 공업 천시. 기술관 양반 천시. 문무반 차별
특전 - 군사, 부역의무 없음
과거 - 중앙관료정치
사대부계층 - 문관 -동반
무관 - 서반
18등급품계
* 중인
* 상민 - 양민 - 사회기층구성원 - 농민(농본정책), 상인, 장인(갖바치)
전조 - 공물 - 10/1
부역 - 군역, 요역 (노동력)
* 천민 - 노비 - 종류 - 관노비(선상노비, 신공노비).
사노비(솔거노비, 외거노비)
매매 - 상속 - 세습
무당 - 광대 - 백정
천민거주지 없어짐 - 고려시대보다 나아짐
5. 군사
군사제도 개혁
* 사병 - 삼군 - 5위도총부 - 5위 - 중앙군
지방군 - 도 - 병영, 수영
진 - 정영수성군,
노동부대영진군
* 봉수제 - 평상시 1, 적 2, 성에가까이 3, 싸움
6. 교육
과거제 - 유학(사서오경) - 4부학당, 향교 - 성균관
양반의 독점 - 경제적 여유
방법 - 문과 - 문관 - 생진과(소과) - 생원과, 진사과
문과(대과) - 초시 - 복시 - 장원급제
무과 - 활쏘기 외 - 병서 - 3단계 - 선달
양반관료의 체계화 - 무관채용의 길
잡과 - 중인계급 - 율과 - 기술
음양과 - 관상감(천문)
의과 - 전의감
역과 - 사역원
이야기 한국 역사 6-2 - 조선시대 전기 : 세종 - 세조 -
1. 세종대의 번영
1) 양녕 대군의 진심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제) 효령대군(보) 충녕대군(도) 성년대군(종)
양녕대군의 해괴망측한 행위를 두고 볼 수 없다며 태종 18년(1418년)에 세자를 바꾸어 왕위를
물려줌.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넓은 도량과 백성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성군 세종대왕을
탄생시킴.
2) 황희 정승
고려말 공민왕 12년(1363)에 태어나 우왕15년(1389)에 27세의 나이로 급제. 고려 멸망후 72
명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감. 거기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기 위해서 다시 조정으로 나왔다.
공명정대하고 모나지 않은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소와 농부에 얽힌 일화에 감명을 받고 글
공부와 정신 수양에 힘썼다. 세자 책봉때 반대한 일로 파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세종때
다시 조정에 와서 주요 관직을 거치다가 세종 13년(1431)에 영의정이 되어 18년간 국정을
이끌었다. 국가 기틀을 잡고자 <경제육전>을 수정 보완, 국방과 예법을 정비, 문화 진흥을
주도하였다. 저서는 <방촌집>이 있다.
3) 슬기로운 임금님(해동 요순)
태종이 상왕이 되고 1418년에 왕위에 오른다. 1년후 왜구들의 본거지인 쓰시마섬을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해서 왜구를 정벌함. 평화시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집현전 - 재능있고 행실이 올바른 문신들을 두고 학문을 연구하게 함. 전임학사 20명이 경연
(왕이 공부하는 곳) 서연(세자가 공부하는 곳)에 나갔다.
- 학자 :권도,남수문,유의손,박팽년,최항,하희지,정인지,신숙주,변계량,성삼문,어효첨,설순등
- 사가 독서제 운영
- 집현전에서 한 일:왕과 세자의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학술연구,서적 편찬과 저술,문서 작성등
#도첩제 실시 - 추천 제도로 숨어있는 인물을 찾아서 썼다.
# 전제 상정소 설치 -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의 안정을 꾀함.
공신전 지급을 하지 않음. 공전의 확대로 나라 재정이 늘어남.
#의창제도 - 빈민구제, 사회 사업 차원에서 춘궁기에 빌려주고 가을에 돌려받음.
4) 학문의 발달
훈민정음:한자음의 혼란을 막고 통일음을 위해 지어진 낫봉과 송렴의 <홍무정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항, 박팽년, 신숙주 등이 운서 연구를 해서 새 한자음을 제정하여 <동국정운>을
엮었다. 소리 나는대로 적은 표음 문자로 한글을 만들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에
“백성을 편하게 하기위해 만든다”라고 했다.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최항이
힘을 기울여서 만들게 되었다.세종은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적을 수 있고 배우기 쉬운 글자
를 새로이 만들기 위하여 궁중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
였다.그리하여 1443년에 모음 11자,자음 17자 등 모두 28자로 구성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 뒤 세종은 훈민정음을 널리 알리기에 힘써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많은 책을
엮거나 번역하게 하여 배포하였으며 지위가 낮은 관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하게 하였다.
편찬사업
역사:태종 때에 <태조실록>이 편찬되었고, 조선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의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오늘날의 <조선 왕조 실록>은 날짜별로 그 날의 주요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므로 조선 시대 연구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그밖에 고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찬한 <동국통감>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도 편찬되었다.
지리:지리서로서는 세종 때 <경상도 지리지> <팔도 지리지>등이 간행되었고 성종 때에는 이를
보완한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여 각 도시의 지리, 역사, 정치, 경제, 풍물 등을 자세히 수록
하였다.지도로는 태종 때에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도>와 전국 지도인 <팔도지도> 세조 때에는
과학 기구를 이용한 최초의 전국 실측 지도인 <동국지도>.가 제작되었다.
법전:법전의 개편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 마침내 15세기 말 서거정 등이 지금까지의 모든 법령을
정리, 보완하여 <경국대전>을 펴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보완되었으나 그 기본 골격은
변하지 않았다.
예절:국가 의식의 규범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국조오례의>를 간행하였고 삼강의 윤리 덕목을
국민에게 교화시키고 장려하는 의도에서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과학 기술
농업:<농사직설>은 세종의 명에 의해 정초, 변계문 등이 농부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의 농사 기술이 이론적으로 정리
되어 있다.그 밖에도 세조 때 <사시찬요> <농산축목서> 성종때에 <금양잡록> 등이 편찬 되어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사법을 제시하였다.
천문, 역법:천체 관측을 위해서는 건극초부터 서운관을 설치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관상감으로
명칭을 바꾸고 천문, 지리, 역법, 기상 등을 종합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한편 1442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국 각지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강우량을 측정하여 농업에 도움을 주었는데
이것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세조 때에는 인지의가 제작되어 양전 사업과
지도 제작 등에 이용되었다.또 세종 대에는 이천, 장영실 등에 의하여 천문 관측 기구인
강의와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혼천의가 제작되었으며 시간 측정을 위한 해시계(앙부일귀)와
물시계(자격루)도 제작되었다.
의학:세종 때에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이 편찬되었다.
인쇄술:태종 때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계미자라는 구리 활자를 만들었으며 세종 때에는
활자를 개량하여 납으로 갑인자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서적이 대량으로 간행되어
교육 진흥을 촉진시키고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법과 무기:국방 강화 정책과 관련되어 각종 병서가 간행되었다. <진도>와 <병장도설>
<동국병감>이 편찬되었다.고려 말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화약 무기의 제조 기술은 더욱
개량되어 성능이 뛰어난 화포가 만들어지고 로켓포와 비슷한 화차가 제조되기도 하였다.
병선 제조 기술도 개량되어 태종 때에는 뛰어난 전투선인 거북선이 제작되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2. 세종의 왕도 정치
세종때는 왕의 권한과 신하들의 권한이 균형을 이루며 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왕은 신하의
의견을 존중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었다. 세종은 유교는 윤리와 도덕 정치질서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불교를 통해서 참다운 삶을 깨달아 가려고 했다.
<석보상절> 석가의 공덕을 그린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만약 세종이 유신들과 더불어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썼다면 훈민정음이 설자리를 잃었을 수도 있다.세종의 참모습은
유교와 불교를 함께 받아들인 넓은 도량에 있었다. 어질고 과단성이 있는 성격이 32년간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능은 광주 대모산에서 예종때 경기도 여주군 신륵사
근처로 옮겼다. 능호는 영릉이고 묘호는 세종이다.
3. 세조의 왕권 강화
1) 계유정난:세자로 책봉된지 30년만에 왕이 된 5대 문종이 3대를 섬겨온 황희의 죽음 후 건강
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세종의 제사를 치르고 건강이 나빠져 돌아감. 즉위 2년만에 12세의
세자가 6대 임금인 단종이 되었다.영의정 황보인,우의정 김종서,좌의정 정분이 국사를 도
맡았다. 수양대군이 대사헌 기건과 권람, 한명회 등과 김종서를 없애고 황보인, 이양 민신이
숨지고, 안평대군, 이우직도 귀양을 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결과 -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되고 좌의정에 정인지, 우의정에 한확이 앉음. 단종3년에 옥새를
넘기고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었다. 7대 임금 세조가 됨.
2) 여섯 충신의 의로운 죽음: 단종 복위사건으로 많은 이가 죽게 된다. 병자원옥 -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기 위한 비밀이 김질 정창손에 의해 세조에게 알려지고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유성원, 이개, 하위지는 사육신이 되었다. 생육신은 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조여, 성담수,
원호등이 있다. 특히 김시습은 시대를 잘못탄 천재였다. <금오신화>를 지었다.
3) 세종의 위업을 이어:세조3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는다.
단종도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시체를 엄홍도라는 사람이 관을 묻었다.세조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치부로 인해서 심적으로 괴로움을 백성들을 위해서 민본주의 사상을 지닌
세종의 뜻을 이어 철저한 왕도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세조를 도운 집현전 학자는 훈구파
(관학파)들이었다. 신숙주, 정인지, 최항, 양성지, 정창손,서거정,노사신 등이 세조와 성종을
도와 정치적 문화적 상당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야기 한국 역사 7-1
* 사림의 등장과 사화
1. 훈구파(관학파) - 15C 정치 주도 세력
고려말 권문세족 -> 부패 -> 불만의 소리가 커짐
신흥 사대부 등장 1)역성 혁명파 : 정도전, 하륜 - 왕자의 난 공신. 계유정난 공신
2)온건 개혁파 : 정몽주, 길재 - 사림파
- 역성 혁명파의 한 갈래로 고려말 권문제족의 전횡에 분개 혁명에 나섰지만 새 왕조가 들어
서면서 정치, 경제적 특권속에서 고려말 권문세족과 똑같은 형태를 보임.
- 성리학의 정치 이념을 정착
- 사회 개혁과 국가 운영의 기초를 다짐
- 왕권강화. 중앙 집권 체제 정비. 한명회, 정인지, 신숙주, 권람, 서거정 등
2. 사림파 -16C 이후 사회 주도
- 온건 개혁파 정몽주와 길재의 태도를 계승한 학파로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의거 왕조의
개창 비판.
- 고향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향촌 자치 - 사학을 통해 육성
- 훈구파의 전황과 부패에 임금과 백성들이 준노할 때 이들의 지지를 얻으며 성종때 중앙
정계로 진출
-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김일손
- 사림파는 중앙 정계에서 대부분 삼사에 진출해 훈구파의 비리를 날카롭게 비판 -> 훈구파의
반격 -> 사화를 일으킴
-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상태는 자칫 왕권을 누를 수도 있던 훈구파의 세력을 견제하게 되어
성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도움을 주었다.
* 사화 (사림이 화를 입는다는 뜻)
1. 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 4 )
- 발단 :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글 <조의 제문>을 사초에 기록한 것(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
- 결과 : 유자광, 이극돈이 주도하여 임금께 고발
사림파 김종직을 부관참시. 김일손 처형, 김굉필 유배
2.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 10 )
- 발단 : 폐비 윤씨 사건을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고함.
- 결과 : 임사홍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사림파를 대거 희생. 윤필상,
김굉필 등이 처형.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 부관참시
-> 이 사건으로 사림 세력은 연산군이 폐위 될때까지 중앙 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함.
3. 기묘사화 1519년 (중종 14 )
- 발단 : 조광조 일파가 중종반정 공신들의 훈작을 삭탈하려하자 기존 정치 세력이 반격 =>
위훈 삭제 사건(남곤, 심정, 홍경주) => 훈구파들도 조공조가 왕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졌다고 모함(주초위왕)
- 결과 : 조공조를 비롯 김정, 기준, 김식등 많은 선비가 희생됨
4. 을사사화 1545년 (명종 원년)
-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대립
- 윤임과 윤원형은 왕위계승 문제를놓고 중종 말무터 맞섰다.
중종 1) 단경왕후 신씨(신수근의 딸) => 폐위
2) 장경왕후 윤씨 -> 세자 호(외삼촌 : 윤임) - 인종
3) 문정왕후 윤씨 -> 경원대군(외삼촌 : 윤원형) -명종
- 명종이 즉위하자 윤임 일파 제거
- 을사사화 이후 사림파는 산림에 은거 학문에 전념하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파 학자들이
정치를 주도.
* 사림파가 수차에 걸친 탄압을 극복하고, 재기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이라는 확고한 정치
이념과 공통의 스승을 모시는 학통으로 연결된 조직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사림이
훈구파와 맞서 싸울 땐 하나의 정치 세력이자 동지였지만 훈구파를 물리치고 집권당이 되자
갈라지게 된다. 이 결과 사림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다.
* 붕당정치
- 당쟁의 시작
이조정랑 : 사림이 갈라지게 된 계기는 이조정랑이란 관직을 누가 차지 할 것인가에서부터
비롯, 5품의 중간 관직으로 지금의 내무부나 총무부의 과장쯤
조선의 임용관리 권한 => 이조에 인사권이 있음 =>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리 추천권 => 이조정랑
이조정랑직에 대한 인사권
재임중 특별한 사고가 없는한 정승까지 승진할 수 있는 출세가 보장된 자리.
* 전임 이조정랑의 추천을 받은 김효원을 심의겸이 반대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젊은 시절 외척 윤원형의 식객으로써 지조 없는 인물
이라 비난. 결국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고 후임으로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이 들어
오자 왕실의 외척이란 이유로 김효원이 공격.결국 신진 사림은 김효원의 동인으로, 노장
사대부는 심의겸을 지지하게됨.
* 선조때 주도권을 잡은 사림은 정치에 참여하는 수는 늘어나는데 비해 관직의 수는 고정.
이렇듯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 투쟁이 벌어지면서 자연스레 붕당이 생겨났다.
* 붕당의 기능
1. 긍정적 : 정치 활성화와 정치 참여폭 확대, 정치 세력간 상호 비판과 견제 기능
2. 부정적 : 국리민복 외면. 자기 당파의 이익 우선. 학벌, 문벌,
지연 관련 => 국가 사회 발전에 지장. 왕권약화 초래.
< 선조 때의 정치 구도 >
사림
|
--------------------
| |
동인 서인
|
------------
| |
남인 북인
- 선조 7년 (1574) 사림. 동, 서인으로 분열
- 선조 17년(1584) 동,서인 융합 힘쓰던 이이 사망
- 선조 23년(1591) 광해군 세자 건저 문제로 서인 실각,동인, 정철 치죄 문제로 남북인으로 분열.
- 선조 24년(1592) 임진왜란, 의병장 다수 배출한 북인 대거 진출, 광해군 세자로 책봉
- 선조 41년(1608) 선조, 광해군에게 양위, 소북 유영경 광해군 즉위 저지하다 실패.
* 조선 중기의 영의정 이준경은 동, 서인이 분당되기 전(4년) 사망하기 직전에 “지금 벼슬아치
들이 이런저런 명분으로 붕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 나중에 반드시
나라의 고치기 힘든 환란이 될 것입니다.” 라 예언. 이는 이이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며 끝내
현실화 되었다. 이에 이이는 이를 부정해 이준경을 비판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동,서인의
화합을 위해 노력.이이가 죽은 후 선조는 동인을 등용 ( 영의정 노수신의 영향 )
=> 성혼, 박순, 정철, 박응남, 윤두수------ 서인들을 탄핵
이이가 죽은 후 수세에 몰린 서인들 가운데 동인으로 당적을 옮기는 이들이 생김.
* 동인의 선두 주자가 되었던 정여립은 스승인 이이를 비난하나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되고
세간의 비난이 겹쳐 낙향한 후 대동계를 조직, 역모를 꽤하다 실패.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죽어갔으며 서인이 다시 집권. 그러나 세자 건저 문제로 광해군을 주장하다 선조의 미움을
사 서인 세력이 다시 실각. (1591년)
* 15C 말부터 조선 사회는 지주제가 더욱 진전이 되고 상품의 유통 경제가 발달하여 변화를
겪는다. 이에 따라 공물이 상납과 군역의 포납에 따른 폐단이 점점 커져 농민들의 부담이
커지고 몰락한 농민이 고향을 등지게 된다. 16C 또한 15C 말부터 지주제가 더욱 발전.
토지가 지주의 손에 집중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공물의 방납,군역의 포납으로 그 폐해는
점점 커져 몰락한 농민이 도적으로 난립을 하며 국가에서는 관군을 파견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이게 된다. ( 임꺽정 )
* 성리학:우리 나라에서는 고려말 안향이 성리학을 도입한 이래 조선시대 국가 통치와 사회
기강의 근본 이념이 되었고 많은 인재외 성과를 낳았다.조선초 정도전,권근등이 국가 제도와
이념을 마련하는데 기본 사상이었고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는 사림은 개혁
정치를 단행하려 사화를 맞기도 했다.그 뒤 이황,이이의 등장은 사상적으로 조선 성리학을
심화, 발전 시켰다.
1. 이황 :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심화 발전
이 -==> 도심 기-==> 인심
사단 칠정
- 이는 주가 되고 기는 종이 되며, 이는 존귀, 기는 비천하여 이와 기의 존재의 가치를 차별
- 영남 학파를 중심으로 계승. 유성룡, 조목, 김성일, 이익, 정약용 등 남인 실학자에 영향을 줌
- 일본 성리학에 영향
2. 이이 : 관념적인 도덕 세계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동시에 존중, 일원론적 이기 이원론 주장.
만물의 본원이나 인간의 심성문제에서 이와기, 본연지성과 기질기성, 사단과 칠정, 선과악을
분리해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조화 속에서 그 구조를 일원적으로 해명.
-> 김장생. 송시열. 한원진등으로 계승 ( 기호학파 )
* 조광조의 개혁정치: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지향하며 왕도 정치의 실현 추구.
1. 정치 : 현량과 실시 -> 훌륭한 인재 천거, 관리로 채용(사림등용)
2. 경제 : 공납제 폐단 시정
3. 사회 : 불교, 도교의 행사 폐지 (소격서), 소학 교육 강화, 향약을 전국에 시행
-> 훈구 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때 희생
* 조선 전기의 문화
세종
음악 : 박연 - 음악을 정리
성현 - <악학궤볌> (성종)
정조전 - <신도가>
정인지 - <용비어천가>
설화문학 : 서거정<필원잡기>,
어숙권<패관잡기>,
성현<용재총화>
회화 : 강희안, 안견, 최경, 이상좌 (중종)
서예 :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 (선조)
미술 : 백자 - 밑바닥이 넓어져 안정감이 있고 실용적 => 양반 사대부의 성격
성종 - 정치, 역사, 문학, 지리, 음악등 여러 편찬 사업이 활발히 진행
<경국대전> 조선 왕국을 다스리는 기틀
<동국통감> 종합적 역사책
<삼국사절요> 삼국시대 역사책
<동국여지승람> 인문지리서
<농사직설> <식료찬요> <강목신증>
참고자료 <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
< 한국 역사 이야기 >
이야기 한국 역사 7-2
* 조선 시대 당파 분립상
선조 초 선조 말 광해군 인조 숙종
동인 --- 남인 ------------------------------- 청남 --- 남인
|_ 탁남 _|
|- 대북 --- 육부 -|
북인 --| |- 골북 |--------------------- 북인
| |_ 중북 |
| |
|_ 소북 --- 청소북 |
|_ 탁소북 _|
서인 ----------------------------|--- 훈서 --- 소서
| |_ 노서 -|
| | -----노론
|___ 청서 --- 산당 | |_ 소론
한당 _|
당파들간의 싸움이 집중적으로 부각된 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당쟁(붕당
지쟁에서 爭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조어)’ 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일본인
들이었다.붕당은 중앙정계에 진출한 관료들이 출신 지역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동일한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끼리,정책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데서 출발하였다.그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이러이러한 집단을 이룰 수는 있지만, 일단 관직에 있는 한 국왕의 전제 권력이 인정
되는 사회에서는 붕당이란 존재는 사실상 금기에 해당된다. 이들이 집단을 이룬다는 건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할 위험요소가 있기 때문이다.실제 종종 있었던 정변은 이러한
집단을 기본으로 삼아 가능했고 조선 초만 하더라도 붕당을 만드는 것은 사형으로 처벌될 수
있는 범죄 행위였다. 붕당의 원조가 출현한 것은 중종때 조광조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세 번의 반정(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를 벌임)
1.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계유정란
2. 연산군을 쫒아 낸 중종 반정
3.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 반정
2, 3의 경우, 모반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서 권력이 약하다. 그래서 재야에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약점을 보완하는 일이라 생각하였다.왕의 후원을 받으며 신진 관료로 진출한
사림과 반정 공신 등의 기득권 층으로 정치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기득권 층의
승리로 士禍가 일어난다. 사림은 꾸준히 중앙으로 진출해서 붕당을 형성한다.
* 임진왜란(1592. 왜군의 조선 침략) ------- 정유재란(1597)
1. 원인
-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전쟁이후 남아나는 무력을 외부로 방출
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총기와 화약을 공급하던 상인 세력의
부추김도 한 몫 한다.)
- 일본이 명. 조선 사이에서 겪고 있던 국제 무역상의 난제를 해결하려고 일으킨 침략 전쟁이다.
2. 결과
- 국가 재정고갈,농민의 과중한 부담,전쟁으로 격심한 피해 (토지 170만결->54만결 축소)
- 사림들이 향존사회를 이끌며 의병을 주도해 나갔고, 전세를 역전시킬 힘이 생김 => 양반
사회가 임진왜란 이후 지배층으로 자리 매김
- 비변사 권한이 강화되고 의정부 권한이 약화됨
- 호적과 양안(토지대장)이 소실되고, 노비문서가 불타 노비층 파악이 어렵게 되었고 납속책이
시행되면서 신분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함
- 일본군이 가지고 왔던 조총에 비해 대포를 위주로 한 전술로 싸우는 해전에는 대포가 더
위력적이다.
- 문화재 소실 : 경복궁, 경주 불국사, 사찰, 실록, 서적과 예술품
정치제도의 변화 - 비변사 체제로 전환
군사 제도
- 중앙군 : 5위 -> 5군영(훈련도감 중심)
- 지방군 : 제승방략 -> 진관체제
- 직업군인(장번급료병) 출현
경제 : 재정 파탄(농경지 황폐 선조때 37결), 대동법 실시(공납 폐단 시정)
사회 : 신분제 동요(공명첩, 납속으로 신분 승격)
문화 : 문화재 소실(경복궁, 불국사, 사고 소실)
대외 관계 : 여진족의 흥기(후금과 외교문제 빌생)
3. 선조
- 조선을 구한 것은 조선의 장수가 아니라 명나라라는 논리를 갖고 있던 인물이다.
- 파천을 결정한 것, 요동내부(망명)설을 관철하려 했으나 명나라에서 거절하였다.(명은 왜와
조선이 결탁하여 쳐들어온다고 생각했다)
- 신위론은 요동내부의 걸림돌이었던 국왕의 직무를 세자에게 양위하고, 전쟁터를 벗어나
안전지대인 요동으로 도망가기 위한 계획이었다.
- 전쟁영웅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를 제거 대상으로 찍음(자신과 대비된 행위로)
- 환도 후에도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고, 강제로 군수용이란 명목으로
재산을 빼앗고 부역을 강화한다.
4. <선조실록> 과 <선조수정실록>
- 광해군 때 편찬한 <선조실록>은 총제관 이항복이 북인 기자헌으로 교체되면서 북인의 당파적
시각이 많이 들어가 북인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다른 당인은 부정적으로 서술함.
-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이런 문제점을 들어 수정실록을 편찬할 필요성을 제기
하였는데 이식이 상소를 올려 당위성을 주장함.
-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순신 = 충신, 원균 = 역적으로 쓰여졌다. 왜냐하면 인조반정은 형식상
서. 남인의 연합정권이었다. 인조반정 후 영상이 남인인 이원익, 남인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은 이순신은 남인으로 분류하고 북인이 집권했던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5.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
1) 거북선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13(1413)년 2월
2) 거북선은 왜선을 격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3) 거북선은 사실상 이순신의 창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 임난 당시 사람들로부터 거북선을 이순신의 발명품으로 여기는 것
- <선조수정실록>에 “이순신은 전쟁에 앞서 전투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광해군14(1622) 비변사가 이순신이 만든대로 거북선을 만들 것을 주청하자 “빨리 이순신의
거북선을 만들며 무기를 수리하고 사졸들을 훈련시켜 착실히 변란에 대비하기를 한결같이
순신이 한 것과 같이 하라”라고 말하였다.
- 인조17(1639) 최명길은 임금에게 “경기 수사에게 거북선을 제조하여 시험해 보도록 하려
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창제한 것입니다.”라고 고한다.
* 의병의 봉기 : 임진왜란을 극복한 동력 중 가장 큰 것은 의병항쟁이다.의병의 지도층은 당시
향촌의 지배 세력이었던 사림들이다. 의병장에 대한 신임과 향촌에서의 지도력이 있어 민중
들의 신뢰를 이끌어 냈다. 농민들이 의병을 선택한 이유는 전쟁에서 군대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굶지도 않았으며, 관군과 달리 질 싸움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약간의 공만 있어도 자발
적인 것이기 때문에 커다란 포상을 받았다.
* 인조반정(1623)
- 서인 당색의 문신과 무장, 유생들이 군사를 동원하는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하고
선조의 손자이며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 1623년 3월 13일 이귀, 김유,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 서인들이 600 ~ 700명의 군사를
홍제원에 모아 서울로 진격
- 반정의 정당성 : 광해군의 廢母殺弟 행위를 패륜행위로 규정하고,중립외교를 극렬히 비난.
- 반정을 비판하는 이유 : 임진왜란의 피해를 잘 극복하고 왕권 강화되어 정치 질서가 바로
잡혔으며, 후금에 대해서도 세련되고 융통성 있는 정책을 폈다는 점.(광해군 때 대동법,
은광의 개발, 주전, 용전론 등의 개혁정책들을 시행)
* 이괄의 난(1624)
- 인조 반정 때 김류가 망설이고 있을 때 대장이 되어 반란군을 수습하는 등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등공신 밖에 못한 데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변방으로 가게 되자
사전에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 통설
- 1624년 문회, 허통, 이우는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기자헌, 이시언, 한명련등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문. 무신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전혀 사전 계획도 없었고, 반란을 일으킬 명분도
없었다. 외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터진 것이다.
- 반란 이후 - 국내의 반란으로 처음 국왕이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
-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깊은 불신감
->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 강홍립 휘하에 들면서 조선정세를
알림 => 1627년 정묘호란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 정묘호란 : 1627년 후금이 조선 침략, 화의를 맺고 돌아감 =>형제관계
2. 병자호란 : 1636년 12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청 태종이 친히 출병
3. 삼전도(서울시 송파구)의 치욕 :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태종 앞에서 삼궤구복함
* 조약 : 청을 임금으로 섬길 것, 명에 대한 사대를 끊을 것
조선왕의 장남, 차남,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낼 것
청의 요청시 명을 정벌할 군사, 예물을 바칠 것
조선은 성과 요새를 짓지 않을 것, 매년 한번 세폐를 바칠 것
4. 척화 : 청과 싸우자(반청) -> 반정에 대한 명분-------------김상헌
주화 : ------------------최명길
* 김상헌 - 최명길이 쓴 항복서를 찢어버린 일화가 유명
- 남한산성에서 나와 안동으로 감 (신하로서 임금을 잘못 모셨다)
* 최명길 - 청의 별동대를 막고 국왕과 신하를 남한산성으로 가게 함
- 청의 횡포와 굴욕을 참고 피해를 줄임
- 임경업을 명에 파견, 한동안 우호관계 지속
정몽주 -------- 사제관계
| ………….영향
길 재
|
김숙자
|
김종직
-------------------|-----------------
| | |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
:……………………………………………: |
: -----------------------
: | |
이언적 김안국 조광조
: |
이 황 이 이
----|------- ----|------
| | | |
유성룡 김성일 정 엽 김장생
이야기 한국 역사 8-1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
1. 위대한 북벌의 꿈
2. 사회경제의 발전
3. 사회체제의 동요
효종(17) ------- 인재등용, 임금권한 강화, 군사제도 정비(조선사회 안정기반)
=> 북벌의 꿈 실현(8년동안의 포로생활의 원한)
* 효종 : 국가의 치욕(명분) + 북벌강행(실천)
* 서인 : 정치적 입지 강화. 명나라에 대한 복수
* 민중들 생활 궁핍 -> 생활안정에 대한 비판
숙종 ---------- 1. 사회체제 전반의 정비 및 복구 마무리
^ 2. 환국정치(외척, 부인, 정치에 이용)
| -> 왕권 강화 목적
| 3. 후기 상업 발달에 영향
|
백성 : 전쟁에 대한 두려움, 생활고 (민심 어지러움) (천민의 반란 조직화)
* 대동법 실시 -> 세입 일원화 완성
* 양전사업 추진
* 상업활동 지원(화폐주조 -> 상평통보)
* 도성 수리 공사
* 영토 문제 -> 4군 설치 -> 옛땅 회복 운동
청나라와 협상
일본 -> 울릉도 귀속 확립
* 명분의리론 -> 대보단, 사육신 복원, 노산군 복위(단종)
* 서원사우 건립
울릉도. 독도 문제
* 역사 - 삼국 - 512 - 신라거칠부 - 우산국
고려말 - 왜구 - 노략질
조선 - 태종 - 공도정책 - 성주민 보호, 일본과 문제
* 안용복 - 일, 도쿠가와 - 통역 - 납치 - 백기주, 죽도침범죄
* 어장 가치
* 정리 - 1699 - 최종 외교문서 - 우리땅
1876 - 일제 침략 - 지금도 문제
붕당 정치
*학파 중심(비판, 견제)
조선 정치의 특색 - 유교정치 -> 정치토의에 입각한 정책
사대부 -> 학문 + 이상
정치범 -> 처벌관대
-> 왜곡 ->세도정치(처음) -> 서로 존중, 친밀한 관계
효종 -> 예송논쟁----- 학설논쟁 -> 인신공격
-> 일당전제화(당파싸움의 폐단)
-> 붕당정치 파탄
* 예송논쟁
1. 효종 계모인 조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나 ?
(서인 : 송시열 -> 1년)
2. 윤선도의 상소 : 송시열에 대한 인신 공격, 효종 계승에 대한 수상한 저의
3. 조대비 며느리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나(남인)
* 숙종 -> 인경왕후(서인) -> 인현왕후
-> 장희빈(남인) -> 남인득세(민암)
-> 서인득세(장희빈 쫓김)
사회, 경제의 발전
1.수취제도 - 배경 -양란 - 토지제도 분란
해결 - 경작지 확보 - 개간 산업 - 개간지 - 소유지
문제 - 국가수입 감소 - 농민 부담 증가
전세개혁
2.균역법 - 배경 -병농일치 - 군사력 약화 - 농민생활 어려움
변화 - 중앙 5위 -지방(진관)
훈련도감
5군영(향군) - 속오군
모병제 - 군포 -부작용 - 황구첨정, 백골징포,족징, 인징
의미 - 국방의 미균등
방법 - 호포론 - 신분구분 없음
군포 - 군포 + 결작미 외
민란 발생
4. 대동법 - 배경 - 방납 - 농민 - 상업, 광산 노동자, 도적떼
발전 - 공납미 - 1608 - 1708 안정
조세의 급납화 - 상품화폐경제 촉진
방법 - 쌀. 과세기준 - 토지결수
양반 반대. 서민층 - 지주
5. 농업 - 개량농법 - 생산량 증가
- 농업 생산의 다양화 - 상업적 농업
이양법 - 1인당 경작면적
직파법
저수지 - 비료생산
농민지위 상승 - 농민층 분화
6. 상업 - 대동법 영향
도고(도매상인) - 상권 독점 - 은행 - 위탁
장시 - 6의전
공인 - 한성시전, 지방장시(난전), 전국적 사업망
무역업 - 개시무역 - 정부통제
후시무역 - 사무역 - 책문후시 - 밀무역
화폐발달 - 상평통보
7. 수공업 - 장인세
지역 - 농촌 - 전업
도시
종류 - 자립 - 전업수공업자, 부업수공업자
관 - 관영, 민영 사영
8. 광업 - 세방법 - 원정세 - 잡세 - 자본주의 방향
별장제 - 실점수세제 - 거대화
역사 - 민간참여 - 실정수세제, 잠채
금은 - 관 - 명(세공)
9. 결과 - 신분제 붕괴 - 농민 - 경영형 부농
양반 - 분해현상
노비 - 양인 - 납속
서얼 - 중인 - 실무관직, 문학운동
순조 1년 - 노비 해방 - 고종 23년 - 신분세습법 폐지
여성신분 - 만덕
이야기 한국 역사 8-2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
영조
- 탕평책
*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정책.
* 노론(을사처분) ->소론(정이환국) ->노론 ->노론, 소론(민지원, 이광좌, 기유처분, 쌍거호대)
*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 금지
* 탕평과 실시
* 동색금혼패 : 같은 당파의 집안은 혼인을 금함 -> 당파싸움이 줄고, 왕권 강화.
- 학문 장려 : <자성편><속오례의><속대전><소학훈의><속병장도설><해동악장><동국문헌비고>
- 국문학의 발달: <춘향전> <훈민정음운해> <삼운성휘> <해동가요> <일동장유가>
- 농업의 발달에 노력 - 저수지, 수리 시설
- 균역법 실시 : 국방의 의무 대신 내는 세금으로 포목 2필을 1필로 줄임, 농민들의 세금 감면
- 금주령 - 영조 34년(1756) 7월 2일
이유.: 곡식의 낭비. 백성들의 건강, 일을 게을리함
- 가난한 백성에게는 너그러운 왕 - 유세교의 경우
- 형벌 - 압슬, 자형, 낙형을 없앰.
- 사도세자의 죽음 - 장헌 세자, 후궁 영빈 이씨의 아들.
1. 영리한 세자 - 임금의 “덕”에 대한 질문 - 영조의 의심
2. 영조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들이 세자 주위에 모임
3. 숙의 문씨와 정순왕후의 모함 - 영조의 잦은 질책 - 세자의 이상한 행동
4. 세자의 방탕한 생활
5. 영조38년(1762) 5월 나경언의 투서 - 장헌세자와 소론파의 역적모의에 대해
6. 세자 측근들 용서 간청 -> 영조의 노여움, 숙의 문씨파의 처형 종용
-> 휘령전에서 자결 요구 -> 폐서인 -> 뒤주에 가두어 죽임 ->사도 세자(아들의 죽음
후회 - 나라를 위해서 한일)
- 재위 기간중 산업, 학문등 발달, 형벌 감량등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지만 사도세자의 사건이
오점으로 남는다.
정조
- 시파(사도세자를 동정)와 벽파의 싸움이 본격화 -> 벽파 제거 -> 시파인 홍국영에 의해
“세도 정치”가 시작됨(정조가 정치에 뜻을 잃고 대부분의 국정을 자기를 도왔던 홍국영에게
맡기면서 이루어짐)
- 규장각 설치(1776) - 인재를 등용하여 외척, 내관들의 역모와 횡포에 대항하기 위함
- 외규장각 설치(1781) - 강화도 강화행궁에 설치하여 왕실의 보물,
서책을 보관했으나 병인양요로 프랑스인들에게 도난 당함.
- 서자 출신 등용 (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
순조
- 1800년 11세의 나이로 즉위 - 정순왕후 수렴청정
- 경주 김씨(정순왕후), 안동김씨(순조의 왕비), 반남박씨(순조의 어머니 가순궁박씨)의 대립
->정순왕후 사망으로 경주김씨(벽파)가 제거됨 -> 안동김씨(시파)에 의한 세도 정치 시작
세도 정치 -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로 중종조에 조광조등의 사림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
-> 정조때 홍국영에 의해서 변질 :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
-> 천주교 탄압을 계기로 당파에 의한 당쟁의 시대가 종식되고 집권자 일족만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 정권 형성.
-> 안동 김씨 : 순조, 헌종, 철종의 60년에 걸친 세도 정치
->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종식.
- 세도 정치의 폐해: 벼슬을 사고 파는 일이 성행하여 삼정이 문란해짐(벼슬을 사는데 드는
돈을 농민들에게 부담시켰기 때문에)
1. 전정 : 토지세(땅의 넓이, 비옥도, 풍,흉년)로 임란후 급격히 증가했으며 나중에는 황무지,
존재하지 않는 땅에도 세금을 메김.
2. 군정 : 군역을 배 1필로 대신하는 제도. 어린애, 죽은 사람에게도 징수, 당사자 대신 친척
이나 이웃에게 징수
3. 환곡 :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돌려 받는 제도. 고리대금업으로
전락, 강제로 빌려주고 거둬들임.
- 끊임없는 재난 :가뭄,홍수,가뭄(순조 9,10,11년),물난리(순조17년,1817), 전염병(콜레라,
1821년)
결과 : 농민 - 소작농, 도둑, 거지로 전락 - 농민반란
농민항쟁
->순조시대 - 황해도 곡산의 농민반란, 홍경래의 난(평안도 농민반란),제주도민의 난(양제해)
->철종시대 - 진주민란(철종13년,1862, 2월), 경상도의 개령,단성,함양,선산,성주,밀양,거창
(3월) 전라도의 익산,함평,회덕,순천,부안,금구,장흥(4월), 충청도의 공주,은진,
연산,청주,회인(5월)
=>내부적으로는 참고만 있던 농민들이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외부적으로는
이양선의 출현, 천주교의 전래 등으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박문수(숙종 17년,1691 ~ 영조 3년,1756) : 불의를 뿌리 뽑은 암행어사의 상징으로 33세에
과거에 급제해 영조3년(1727) 지방의 수령들이 환곡을 올바로 실행하는가를 감시하는 직책인
감진어사로 임명
대동여지도
- 철종 12년(1861) 김정호가 완성.
- <청구도> : 순조 34년(1834) <대동여지도> 전에 만든 지도로 경선,위선을 사용,고을의 경계,
산, 강, 나루, 성곽의 정확한 위치 표시.
- <청구도>에 표시 못한 산, 강, 도로, 제방, 역사적 사적까지 표시
- 제작목적 : 외침과 내란 대비, 조세, 농사등의 나라 경영에 이용.
지방의 풍속과 민정을 살핌.
- 대원군에게 외면 당함.
- 청일 전쟁 때 일본군의 군수 물자 수송과 군사작전에 사용된다.
실학
- 나라 안팎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데 대해 서얼, 남인 출신등이 주자학을 비난, 정치,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등장.
- 다양한 학문 연구( 정치, 경제, 군사, 지리, 농학, 자연과학등)
- 학문이 현실 개선에 이바지 해야 한다고 주장
- 옛 성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모순이나 불합리를 대상으로 실증
적인 연구를 한다.
- 영조, 정조, 순조 시대에 절정을 이룸
- 실학의 학파
중농파,경제치용학파, 성호학파 : 성리학을 반성하고 재검토하여 변화된 현실에 맞게 적용,
사회개혁의 방향을 제시->토지제도의 개혁이 중심
중상파, 이용후생파, 북학파 : 성리학 거부->상공업 발전이 개혁의 중심
- 영조시대
- 토지, 행정제도의 개혁과 연구
- 이수광(실학의 선구자), 유형원(실학의 학문적 체계를 갖춤), 이익(실학을 하나의 학파로
끌어올림), 한백겸, 김육, 안정복
- <지봉유설> <동국지리지> <반계수록> <성호사설> <동사강목> <색경>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고사신서> 등
-정조시대
- 청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고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는 청의 문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
- 상업, 수공업의 발전 주장.
- 대도시에서의 일상 생활 개선
- 놀고 먹는 양반들 비난
- 박제가<북학의>, 박지원<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호질>, 홍대용<연기>,
이덕무 <입연기>
-정약용
- 영조38년(1762) 6월16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귀농-약용(15세에 결혼,관명으로 바꿈),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나 1800년 정조가 사망한 후 노론 벽파에 의해 남인 시파 제거
방법으로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지고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은 신유사옥 때 체포,
- 헌종 2년(1836)에 사망.
- 가장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실학의 집대성자이다.
-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재검토에서 시작.
- 귀양살이 시절 의학, 농학, 정치, 경제등 연구.
- 거중기 발명 - 정조 16년(1792), 수원성 축조 당시 사용.
- 천주교는 학문으로 접근했음.
- <경세유표>정치조직, <목민심서>지방행정 개선책, <흠흠신서>형벌,
<강계고><대동수경>지리, <마과회통>의학
- 실학이 남지 못한 이유 : 조선후기는 지배층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로웠던 서민층에 의해
조선 이전의 문화가 되살아나고 있었으며, 실학자들도 그 부분을 수용하여 우리 문화의
되살림을 연구, 계승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거기에 외래 문화를 수용해 완성도 높은
사회개혁을 이루려 했다. 그러므로 실학은 우리 역사 속의 우리 문화로 주체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 실학자들의 대부분이 천주교인으로 여전히 주도적 세력이었던 성리학파의 눈치를 보며,
탄압을 받는 위치에 있어 학문적으로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2. 창조적인 사회적 대안으로 자리잡기 이전에 유럽의 문물이 먼저 밀려 들어와 연구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다.
천주교
- 16세기 중국에 전래 -> 사신들에 의해 17세기 조선에 소개
- 초기 : <사학>이라하여 서양문물(학문)로 받아들임. 장례의식 문제등 전통적 유교사상에는
위배되었으나 또다른 학문으로 생각, 심한탄압은 없었다.
-순조 즉위 -> 천주교 박해 시작
-신유사옥 : 순조 1년(1801) 정순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으로 "서학 금지 교서”
“오가작통법(치안유지법)”등
천주교 탄압 시작. - 주문모의 죽음
황사영 백서 사건
서양세력의 침투 경계
-천주교 탄압의 실제적 의미 : 신유박해는 정치적 숙청이다.
명분 : 인륜을 무시하는 사교를 뿌리뽑아 나라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
실제 : 노론 벽파들이 정적인 남인 시파와 진보적 사상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
-> 신유박해 후 실제로 남인 시파는 완전히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 순조 31년(1831) 조선 교구 창설
- 기해사옥 - 헌종 5년 (1839) 순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김씨에 의해 다시 탄압.
천주교의 뿌리를 뽑기 위함.
헌종 11년 10월 -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이 조선에
들어왔으나 헌종 12년 9월 15일 새남터에서 사형당함.
동학
- 철종 11년(1860) 4월, 최제우에 의해서 만들어짐.
- 외래문화를 바탕으로한 서학에 대항하는 것으로 동방의 도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짐
- 유교, 불교, 선교, 무속, 천주교의 원리가 모두 들어가 있다.
- 평등 사상 주장 - “사람이 곧 하늘이다.”
- 철종 14년(1863) 11월, “서학과 다름없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나라를 망친다”
는 죄목으로 최제우가 체포되어 고종 1년(1864) 3월 처형당함.
- 은밀히 민중들 사이에서 퍼져 민족 종교로 발돋움하며,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문화
조선전기 ; 양반 중심의 문화
조선후기 ; 18세기 상품유통경제의 발달로 평민, 중인, 천민등에 의한 문학, 예술
->서민 문화 (판소리, 탈춤, 민요, 민화등)
이야기 한국역사 9 - 1 근대화의 길
* 1860년대 나라 안팎의 사정
1) 3대 60년에 걸친 세도정치로 왕권 약화.
2) 동학과 천주교의 교세 확장
3) 서양세력의 침략 위협
* 대원군의등장
-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의 넷째 아들로 조선26대 고종의 아버지.
- 철종때 안동김씨가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종친에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미친척 구걸하면서, 상갓집개,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 시정인과 어울려 서민생활을 체험하며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었고 마음속으로
야망을 키우면서 왕실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익종비)의 조카인 조성하, 조영하와 친분을
맺고 조대비에 접근,둘째아들 명복을 조대비의 양자로 들여 익종왕의 후사를 계승하도록
묵계.
- 1863년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가 국새를 쥐고 중진회의를 소집,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
으로 하여금 익종의 후사를 잇게하고 조대비가 섭정권을 갖음
- 이로써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쥐게됨
*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1. 세도정치를 없앰 -> 안동김씨 축출
2. 고른 인재등용 -> 문벌, 당파, 신분을 초월한 인재 등용.
3. 서원정리 -> 전국 650여개에서 47개만 남게됨.유생들의 무위도식,파벌조성,건축,수리등의
명목으로 지방관헌과 부호들로부터 막대한 돈 염출, 당쟁조성등의 폐단.
4. 군포 -> 호포 : 양반들도 강제로 세부담
5. 환곡제도 -> 사창제도 : 관리들의 부정 불법을 엄벌
6. 비변사 폐지, 의정부 부활 -> 삼군부를 두고 군정 분리를 통한 국방강화
7. 사회악습개량 -> 복식의 간소화, 사치를 금함
8. 경복궁 중건
->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왕권강화의 상징으로 경복궁 중건을 단행하나 경비 염출을
위해 단행한 여러 가지 조치가 백성들의 원성을 자아내고 민심이 그를 떠나게 했다.
@ 당백전 ; 기존의 엽전 1백배의 가치를 갖는 화폐를 남발 중건비용에 충당,
화폐가치가 폭락 화폐체제가 대혼란에 빠지게됨
@ 문세 ; 4대문에 드나드는 우마차나 물품에 대한 통행세
@ 원납전 ; 돈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내는 일종의 헌금
@ 부역동원
대원군의 과감한 개혁 정치는 오랜만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하나 계속되는 큰 공사로 세금은
높아졌고 백성들은 부역에 시달리고 당백전이 발행되면서 물가는 치솟아 결국 백성들만
힘들게 되고 민심이 그를 떠나게 된다.
9. 천주교 박해 : 대원군은 불우한 시절 남인들과 사귀었고, 러시아의 무력 침공 가능성이
우려될 즈음 남인 천주교 신자 남종삼이 " 조선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영국, 프랑스의 연합
으로 러시아를 막아 줄테니 조선에서 천주교를 믿게해 달라" 고 제의.대원군은 조정대신들의
강력한 유교적 반대에 부딪히고, 실각을 모면키 위해 천주교 박해를 감행. 대원군은 국제
정세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고 국내정치의 수준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 -> 대원군의 국제,
국내 정치면에서의 한계
10. 통상수교 거부정책
11. 척화비 건립 -> 서양오랑케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화해를 주장
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자손 만대에 경계시킨다.
* 서양세력과 충돌
1. 병인양요 ;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일어난 사건.
1) 배경: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의 힘을 얻어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주고
천주교를 인정하라는 교섭이 실패. 이로인해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인 8쳔여명이
새남터에서 처형됨.
-> 살아남은 리델 신부와 김영희등 교인이 청으로 탈출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보고
2) 경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침입,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패한 뒤 철수하면서
외규장각을 불태워 버리고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도서와 문화재들을 약탈, 현재
프랑스의 여러 도서관에 흩어져 보관.
2. 신미양요 ; 1871년 고종 8년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1) 배경:미국은 산업화에 성공한 뒤 18세기 말부터 상품시장을 확보하려고 동양에 진출,
1886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사건에 대해 따지기 위해 왔다하나 본질적으로는 이를
계기로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고자 조선원정을 계획.
2) 경과:미국은 덕진진과 토지진 점령. 이재현이 이끄는 조선수비대는 광성진에서 미국의
상륙을 저지했지만 350명의 전사자를 내며 패함. 하나 수비대장 이장령이 5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습을 감행, 미국측을 가까스로 몰아냄.
3) 결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나 대원군의
정치생명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경복궁의 중건과 서양세력의 잦은 침입으로 국가 경제는 파탄으로 치닫고, 대원군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극에 달했다.
3. 오페르트의 도굴사건
병인박해때 살아남은 프랑스 신수 페롱신부는 유태계 독일상인 오페르트와 함께 차이나 호를
타고 충청도 홍주군 행남도에 닻을 내림. 이들의 목적은 각자 다름.
페롱신부 : 남연군 묘지 발굴후 부장품으로 천주교의 승인을 얻으려 했음.
오페르트 : 부장품에 대한 욕심
-> 천주교 교인에 대한 무차별 대량 보복, 조선 민중들의 서양인에 대한 배척 고조
대원군의 통상수교 강화의 계기
* 정감록
안팎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백성들 사이에 "이씨조선은 망하고 정씨의 세상이 된다."
는 <정감록>에 쓰여진 말이 유행하게 됨.
- 정덕기의 난
- 이필제의 난 - 진주민란의 주동자.
* 대원군의 하야
- 장성한 고종의 친정의욕을 민비가 고취시키면서 세력을 넓혀감.
- 1868년 완화군 사건이후 민비와 사이가 멀어지게된 대원군이 민비의 아들이 대원군의 산삼
처방으로 죽게 되자 극도로 갈라지게됨
- 민비는 양오빠 민승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실각한 안동김씨와 손을 잡음.
- 조영하, 조성하, 대원군의 형 이최응, 장남 이재면까지 엉입
- 민비는 최익현을 통해 퇴진상소를 올리게하였고 대원군의 궁궐 출입문을 폐쇄시킴
- 1880년에는 개화파가 형성되어 - 고종의 친정 선포.
* 통상 개화론의 대두
19세기 후반 봉건사회가 무너져가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판을칠 즈음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을
구하고자 여러 가지 사상이 대두된다. 개화사상, 위정척사사상, 동학사상이 대표적사상이다.
개화사상
- 1860년을 전후하여 중인과 양반 출신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실학파의 북학론을
이어받음
개화운동 전개
- 부국강병하려면 통상 개화해야 한다는 주장
- 박규수,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김옥균, 박영교,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등
* 일본의 침략과 운양호 사건
1854년 미국 페리제독에 의한 미일 통상조약이후 일본은 급격한 사회변혁을 겪으면서 제국
주의 경향을 띠었으며 차츰 정한론이 일기 시작되었다.대원군 집권시절 조선의 접근이 여의치
않아 부산 동래에서만 활동하던 일본이 대원군의 위세가 기울 즈음 통상외교를 시도, 통상
외교에 대한 답이 늦어지자 1875년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에 입항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 이에 포병이 포격을가하자 일본함대는 일제히 포격개시, 초지진을 산산히 무너뜨리고
물러남.다음날 다시 영종도 점령, 약탈을 자행함. 하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아무 조취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 왜관의 일본인들은 더 활개를 치고 다녔고 운양호 사건의
책임을 묻기위해 군함 춘일호가 부산에 들어왔다.
- 강화도 조약
운양호 사건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던 민비조정은 일본의 춘일호 등장에 긴장을 하고 통역관
오경석을 보내어 일본의 의도를 묻게한다. 회담이 이루어 지고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는 일본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한 내용이다. 개화파들은 강화도 조약을 자주적으로 체결하려 노력
했으나 조선조정의 무능력 때문에 여의치않았다.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더할나위 없는 발판을 마련해 준 셈이다.
<참고문헌>
새롭게 읽는 명성왕후 - 유홍종
이야기 한국근대사 - 이현희
근대로 가는 길 - 김정환
이야기 한국역사 9 - 2
1.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 고종 13년(1876)
-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 : 12개 조항
- 1차 수신사 김기수 파견(강화도 조약의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기 위해)
* 고종 17년(1880)
- 2차 수신사 김홍집 파견(주일 청국 참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갖고 옴)
- 통리기무아문(개화 정책 추진 기구)을 설치
* 고종 18년(1881)
- 신사유람단(군사, 교육, 공업, 시설 등을 둘러보고 나라를 튼튼히 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이 목적)을 조직해서 일본에 보냄
- 영선사(신식 무기의 제조와 사용방법을 배우기 위함이 목적)를 청에 파견
- 별기군(신식 군사 훈련) 설치
- 이재선 사건 : 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사건(발각)
* 고종 19년(1882)
- 임오군란 : 민씨 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심화된 모습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군인의 항쟁
-> 실패(대원군 정권 장악)
-> 대원군은 일본, 청의 제국주의의 내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 정책에 의지하여
사태를 수습 하려다 청에 납치
-> 민씨 정권이 들어섬(청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복종)
-> 제물포 조약(일본 측의 요구를 다 받아들임
-> 서구 여러 나라와도 조약 체결
* 고종 20년(1883)
- 수신사 파견
- 기무처, 감성청, 박문국, 우정국, 치도국, 순경부 창설
-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 정식 국기로 선포
2.개화당의 3일 천하
* 고종 21년(1884)
- 갑신정변 : 개화당이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킴
1) 바라보는 시각
-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 근대 국민국가를 추구한 변혁
- 일본이 조종한 결과 친일 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일어난 타율적인 쿠데타
- 정변 이후 자주적인 개화를 담당할 주도세력이 거의 정계에서 배제됨으로써 자주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외세의 반복된 침탈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책임론적 시각
2) 주동인물
- 급진 개화파(수구파와 청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무력 동원하여 투쟁)
: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역관 오경석 + 의관 유대치의 영향으로 양반 자제들 중 개화세력
@ 무력 혁명을 결정한 이유
a. 수구파의 위협과 탄압
b. 청.불 전쟁에서 청이 연패를 거듭함으로써 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 약화
c. 러시아 남하 등 한반도 정세의 위기
- 온건 개화파(현재의 정권을 점진적으로 개량하여 개혁) :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3) 진행 과정
-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거사 돌입
- 별궁 방화 실패
- 우정국 옆집에 방화
- 민영익 부상
- 고종, 민비 설득(청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거짓 고함)해서 경우궁으로 옮김
- 개화파와 일본군 왕궁 호위
- 창덕궁으로 옮김, ' 정강' 발표(p.151)
- 청군 개입(민씨, 지원요청)과 일본군 철수
- 3일 동안 정권 장악, 실패(오적: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4) 실패원인
- 청의 무력간섭과 일본의 배신
- 개화파의 역량부족 :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
- 정세 판단에 실수를 범한 점
5) 의의
- 근대화와 부국강병, 민족자주권의 수호를 목표로 전개된 진보적 운동이었으며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
* 고종 21년(1884)
- 한성조약(갑신정변의 사후 수습책으로 조일 체결)
- 천진(텐진)조약 : 청. 일본
3. 동학 농민 전쟁(1894)
: 삼례 집회-상소운동과 벽보투쟁운동-보은. 원평집회를 걸쳐 종교적 테두리를
벗어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의식을 결집시켰고, 후에 무장봉기에 나섰다.
1) 시대 상황
-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우리 농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 지주들은 쌀을 팔아 이익을 얻어 땅을 사들이고, 지방관리의 착취와 일본상인들의
수탈이 심해짐. 1862년 진주 중심으로 민란이 시작되어 1890년에는 전국적인 현상.
- 1892년 '교조 신원 운동'(이단으로 규정된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일어난 운동)
공개적으로 전개
- 집회가 주로 동학이 주도한 모임이지만 이중에는 동학을 통해 맺힌 한을 풀려는 자들이
대거 참여(국가 관리들, 지주, 상인들의 착취에 시달림 받던 소외 계층이 동학의 변혁
사상에 호응하여 집회에 참석)
-> '포교 공인'이라는 종교적 구호는 사라지고 '외세 척결'이라는 정치적 투쟁 구호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종교적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실질적인 현실 변혁을 통해
국가 민중을 구제한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2) 주동 인물
* 최제우 -> 북접 - 최시형 - 보은집회
-> 남접 - 서장옥 - 원평집회
@ 전봉준(1854~1895); 본관 천안, 자는 명숙, 호는 해몽. 녹두장군
- 고부 민란(1894. 1) : 군수 조병갑의 부정과 비리, 수탈에 저항하는 항쟁
- 황토현 전투 -> 관군 패배로 청나라에 원병 요청(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들어옴)
- 장성 전투
- 전주화약(전주성에서 화해의 약속-1894. 5)이후 농민군 해체
- 고향으로 돌아가 집강소(농민의 자치 기관)설치 : 최고 책임자를 집강이라 하고, 성찰(질서,
치안 유지), 동몽(교육담당), 집사(재정관련 업무), 서기가 있다.
- 상황; 정부에서 청과 일본군에게 철수 요청, 일본은 '갑오개혁'추진하며 농민군을 토벌하려 함
-> 일본 상대로 다시 봉기 ->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패배(1894. 11)
- 농민 전쟁 실패
3) 의의
- 민중들의 항쟁을 결집하여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 '만민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념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진보적 성격이라 볼수 있다.
- 반봉전, 반침략 전쟁을 일으킨 점은 자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농민군에 봉기를 호소한 사발통문
- 조선 시대에는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 거사의 명분을 적은 '통문'이라는 것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통의 통문은 오른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써 넣게
되어 있었으나, '사발통문'은 사발을 뒤집어 놓고 거사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원을
그리면서 써 넣게 되어 있었다. 이는 거사가 실패하더라도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하는 동시에 모두가 연대 책임을 진다는 단결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야기 한국역사 10 - 1
* 1894년
청일전쟁 : 동학 농민 전쟁 후 청나라는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일본은 정치개혁이란 명목으로
민비를 내쫓고 대원군에게 정치를 맡겨 대신을 바꾸고 청나라와 단절을 꾀하게 하였다.그리고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함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이로써 조선이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는 끝이나고 일본의 지배하에 서서히 놓이게 된다.
--> 시모노세끼회담 : 청나라의 조선 지배권 포기를 통해 일본은 만주 침략의 발판, 조선침탈
갑오경장 :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하고 정치, 경제, 행정, 사회면
에서 개혁을 실시 개혁의 내용은 근대적 성격을 띄는 듯하지만 일본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 1895년
을미사변 : 민비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배척하게 되자 일본 공사 미우라는 민비를 살해한다.
춘생문 사건
단발령
을미의병 : 반일 의병투쟁 : 일본화에 반하여 농민군, 유생, 양심적 봉건 관리가 모여 대대적인
의병 활동이 일어남 -> 봉건적 사고방식에 의해 해산 -> 농민 의병 -> 활빈당
* 1896년
아관파천 : 일본 침략에 반대하며 러시아 공사관에 고종이 피신하여 1년 동안 정사 처리한다.
일본 침략에 반대하여 일본 침략 정책인 개화정책을 이루지 못하게 하지만 국가적인 수치이다.
시베리아 간선 철도 부설 (1893) 러시아 극동 진출 본격화
-> 삼국간섭 -> (러일의 각축장)을미사변
협정 ( 항만교환론. 38도선경계 : 한반도 분할론, 한반도 중립화론 )
독립신문 : 한글인쇄(한글판, 영어판)로 백성들을 깨우침
개화의식 고취, 근대민주주의 사상을 심어 줌으로 애국계몽운동고취
외부 : 열강의 이권침탈, 식민지 예속화
내부 : 개혁실패, 조정무능비판, 자주권 상실
독립협회 :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 단체 - 도시지역 국한, 적극적 투쟁방식이 아님
개화파 고급 관료
목적 : 나라독립과 자강개혁
활동 : 독립문, 독립공원 세우기 - 독립의 의지 알리기
젊은이 교육 (강연회, 토론회) 효과적인 의사 표현으로 민주주의
행동성향 익힘, 1896년말 회원 2000명
* 1897년
대한제국 : 대외적인 완전 자주 독립 선언
* 1898년
만민공동회 : 정치모임 (조선 관민이 모여 나라 일 토론)
내용 : 정치를 바로 잡고 외세 물리침, 국왕의 관리 임용권 제한
근대적 조세 사법제도 확립
의의 : 자주독립의 기초, 과도적 의회정치
황국협회 - 보부상 중심
* 1899년
독립협회 해산
러일 전쟁 : 승리 (일본)
러시아의 남하정책 (영국, 미국이 일본 지원)
일본의 조선에서의 지배권 굳히기
* 1904년
러시아 떠남
강점 1단계 : 한일 의정서
강점 2단계 : 1차 한일협약
포츠머스 조약
강점 3단계 : 을사보호조약(한일협상조약 1905) - 통감통치 (외교권 박탈)
을사5적
강점 4단계 : 한일신협약 - 정미 7조약
합방촉진성명 ( 제국주의적 침략
군사적 강압
자력으로 이길 수 없음 )
한일 합방
* 일본의 독도 침탈
이야기 한국 역사 10 - 2 국권 회복의 길
애국 계몽운동의 시작
- 사상 기반 ; 사회 진화론(적자생존, 약육강식)
- 목표 1. 민족의 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
2.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통해 부국강병 이룩
- 참여 ; 개화파,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대한제국의 관료, 유교 지식인
상공업자, 부농층.
- 시작 ;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한반도 침략 인식. 근대화 운동 -> 국권 회복 운동
- 계몽주의자들의 착오 ; 사회 진화론은 제국주의 논리
강경파 - 강자 논리 수용 - 일제에 항거
온건파 - 약자 논리 수용 - 타협주의, 개량주의
정치 사회 결사 운동
1. 보안회(1904)
2. 헌정연구회(1905)
3. 대한자강회(1906) .
4. 대한협회(1907) -> 변질 : 1908년 회장(김가진), 부회장(오세창)
일본의 실체를 알지못함. 식민통치에 이용당함.
문화사업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의 대중적 확산
1. 사립학교 설립(보성, 양정, 숙명, 진명 등)
2. 언론(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소년)
(국외: 공립신보,합성신보, 해조신문, 대동공보, 권업신문)
3. 출판(사립학교의 애국 교과서, 서적 - 광문사, 박문사)
민족의식을 일깨운 국학운동
* 국권을 지키려는 국민의 자각 ->국사, 국어 연구 ->민족교육운동
: 역사교과서, 외국의 건국사, 흥망사, 위인전, 한국인 영웅전 저술, 국문연구
국채보상운동
* 국채보상운동이란?
1904. 8. 한일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된후 일본에 차관을 들여올 것을 강요 당함. 강압적
차관으로 인해 국권이 유린되고 예속과 약탈이 심해질 것을 우려하여 애국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나라빚 갚기운동’이 전개되었다. 언론의 도움으로 크게 확산.
* 실패의 원인
1. 일제의 탄압과 이간 책동
2. 참가세력이 조직적으로 통일되지 못함
3. 지도층의 지도력 부족
4. 보상방안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못함
* 의의 :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빼앗으려던 시기에 민중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고 항일의식을 북돋아 주었다.
헤이그로 향한 특사
-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이준, 이상설, 이위종) 파견
- 목적 :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알려 도움을 청한다.
- 경과 : 을사 5조약으로 외교군을 상실했으므로 회의 참석을 거절당함
- 결과 : 일본의 침략야욕 더욱 고조됨
1907.7.20. 광무황제는 융희황제(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줌.
비밀결사조직 신민회(1907. 4. 안창호)
- 구성원 : <대한매일신보>중심의 계몽운동가, 상동교회의 중심 인물, 구한말 군인출신
인사, 평안도 일대의 상인과 실업가 집단, 미주하와이 지역의 공립협회 인사
- 목표 1) 국민에게 민족 의식과 독립 사상을 고취할 것
2) 동지를 발견, 단합하고 국민 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3) 교육 기관을 각지에 설치하고 청소년 교육을 진흥할 것
4) 각종의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무력을 증진할 것
- 구체적 방법
1) 계몽운동 전개 : 표면적 방법으로 신교육 보급, 열악한 토착산업 육성.
2) 독립전쟁대비 : 실질적방법으로 국외에 무관 학교 설립, 독립군기지 및 독립군 창건.
신민회의 구국활동
청년 학우회, 대성학교, 자기회사, 태극서관
국외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
- 신민회의 독립전쟁 전략
: 국외에 독립군 기지 창건 ->무관학교 설립, 독립군 양성 ->국내에 진격 ->독립전쟁
반일 의병 전쟁
의병 항쟁
- 1907년 융희황제 즉위후 일본은 한일신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추진
- 박승환의 자결로 군인들 봉기, 해산된 군인들 의병에 참여, 의병투쟁 가속화
- ’13도창의대’결성, 연합의병을 만들어 한성으로 진격
- 실패 : 다른 도의 부대와의 합류 차질, 총대장 이인영의 부재, 무기의 열세
<남한대토벌 작전> 1909.9.1 ~ 10.30
가장치열하게 항쟁했던 전라도 지역의 의병 토벌작전
1907.8부터 계속되던 의병토벌 작전의 마무리
- 의병들의 거취
* 국외 - 연해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3도의군 조직 -> 국내로 진격
-> 일본의 대러시아 외교 -> 무장해제, 감금 -> 독립군으로 전환
* 국내 - 광산노동자, 화전민, 농민으로 복귀 -> 유격전 -> 채응언 의병장의
순국 이후 투쟁은 막을 내림.
<홍범도> - 고종5년(1868) 8.27. 평남 평양 출신, 가난한 농부의 아들
-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당시(14세) 군대에 지원(나팔수)
- 부패한 장교와 싸우고 탈영. 신계사에서 승려로 지내며 반일감정을 키움
- 철령전투 : 홍범도의 최초의 의병 전투
- 홍범도, 김수협, 유인석의 의병부대가 함께 항쟁 -> 패배
- 혼자서 의병투쟁 계속
- 개마고원에서 산포수의 표연대장이 되어 본격적인 의병운동
- 후치령, 삼수성, 갑산읍, 운승리 세곡, 전투에서 승리
- 일본의 의병 탄압강화로 러시아령으로 망명. 13도 창의대에 참여
의열투쟁
<정명운, 장인환> - 스티븐스 처단의거(1908. 3.23. 페리부두에서 저격)
@ 스티븐스 :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보호국'으로
삼도록 외교적 역할. 광무항제의 강제 퇴위, 정미 7조약 체결에 관여. 조선을
모독하는 발언
* 의의 1)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한민족이 환영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던
일제의 침략성 폭로.
2) 조선 백성들의 국권 회복의 의지를 보여줌.
3) 조선인의 애국심 각성의 계기가 되어 이후 항일 의열투쟁에 큰 영향.
<안중근> - 이토 히로부미 저격
@ 이토 히로부미 : 초대 통감. 일본의 조선 강제 병탄에 큰 역할. '기유각서' 체결
-> 무력에 의한 투쟁 주장
-> 1909.9.26 하얼빈에서 이토 저격, 체포
-> 재판에서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
-> 1910.3.26 여순감옥에서 사형당함.
* 의의 : 청나라와 일본 사람들은 물론 다른나라에까지 대한제국의 살아있는 혼을
뚜렷이 보여줌.
<일진회>
- 대한제국 말에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그 실현에 앞선 친일단체(1904~10)
- 송병준이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윤시병, 유학주등과 유신회를 조직했다가 20일
일진회로 고침.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 일진회 통합
- 강령 : 국정개혁(4대 강령), 취지 : 독립 추구 ->표리부동한 상투적 구호
- 1904년 일진회선언서 ‘ 일본의 지도보호를 받기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된다.’
- 러일전쟁중 수송,정탐,노역등 수행(일군을 북진),경의선철도 부설 공사, 고종의 양위 강요
- 자위단 조직 ->의병토벌, 의병을 폭도로 매도.
이토 저격사건 ->사죄단, 동아찬영회조직
- 합방성명서 ‘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 앙국은 합방되어야 한다.’
-> 의병들 일진회 회원 공격, 국민신보 습격,
- 병합후 일제에 의해 해산
<송병준 1858~1925?> - 함경남도 장진 출신(서북,관북 정계진출 어려움)
- 민영환의 식객, 일본인 상인과교제, 김옥균의 동지, 민비의 총애
- 김홍집 내각이 들어선후 체포령 -> 일본으로 망명
- 1904년 러일전쟁중 일본군 통역관으로 귀국, 일진회 조직
- 1906년 헤이그 특사 사건때 광무황제 앙위 운동
- 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을 지냄
- 한일합병 청원서 제출
- 합병후 자작작위 수여,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백작작위
<이완용 1858~1925> - 당대 권력가 민씨집안의 사위인 이호준의 양자
- 수구파(척사파) -> 개화파(친미파, 미국을 다녀온 후)
친러파 -> 친일파
- 독립협회 초기 창립총회 위원장, 협조적 태도
- 을사 5조약에 찬성, 을사 5적의 우두머리
“지난날의 모든 조약이 일방적으로 강요에 못이겨 체결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나라는 늘 그
조약의 글자 수정을 못하여 후회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운 조약은 서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직 불가라고만 말해서는 안된다. 조약문 중에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서 제정해야하니
3조에 있는 통감밑의 외교, 두 글자를 명언하지 않아 훗날 폐가 있을 듯하다. 외교권은 우리
나라 실력이 충실할 적에 반환될 것이니 연한을 정할 필요도 없다.”
“나는 친일파다. 어차피 넘어갈 나라이니 일본과 손잡고 희생을 줄여야 한다.”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p75)
- 헤이그특사 사건때 송병준과 함께 광무황제 양위 강요
-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정미 7적)
-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합방후 백작 작위. 조선총독부 고문에 취임
- ‘일선의 융화’주장
- 1919. 3.1운동때 독립투쟁 비난, 3차에 걸친 경고문 발표
- 1920년 후작이 되어 죽을때까지 일본에 충성
==>직업적 친일파 : 개인의 영달과 재산 갈취를 위해 친일 부역배 또는 매국노가 되는 것.
->한일합병조약 체결(1910. 8. 22) 후 대한제국 ->조선. 통감부 ->조선총독부
10월 1일 데라우치 통감이 초대총독으로 임명
1) 대한제국의 내각을 없앰
2) 76명의 왕족, 정부대신들을 귀족으로 임명, 효자, 열녀상, 죄수 방면
3) 전국에 헌병대 배치 -> 경찰의 감시 강화
4) 모든 민간인 정치단체 해산, 신문 폐간
<읽고 나서>
이번 단원에서는 우리 근대사에 명멸했던 몇 명의 인물에 중점을 두고 보았습니다.역사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긴이도 있고, 치욕적인 이름을 남긴이도 있습니다.근대로 들어선 역사를
접하고 보니 단순히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그 지식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달하고픈 욕심
만으로 끝낼 수는 없음이 느껴집니다.우리가 역사 공부를 이토록 열심히 함은 역사를 스쳐간
그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보면서 우리 부모들이 먼저 올바른 정신과 삶의 자세를 배우고,
그런후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가장 명예롭고 의로운 길을
택할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 역사문제 연구소 편/ 역사비평사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 우리누리 지음 / 소담
이야기 한국역사 11 - 1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항일 투쟁
1905년: 을사5조약 체결
1906년: 통감부 설치-외교권 대행
1907년: 정미 7조약
1910년: 한일병합- 힌국신민화 침략의 완성
★무단 통치시기(1910-19)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마련키 위해 전재적인 군국통치체제.
1.통감부-조선총독부
-조선총독은 일본 국왕직속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군수 통수권부여.
2.헌병경찰제도
-헌병이 경찰 및 군사 경찰업무까지 담당
-조선인의 생활을 철저히 탄압
105인사건: 민족지도자의 집결체였던 신민회 말살목적으로 조작된사건. 안명근이 테라
우치 암살기도 사건을 계기로 양기탁, 이승훈, 김구등 항일 사상을 가진사람을 투옥.
3.식민지 노예교육
-조선인의 우민화(愚民化), 언어통일
-「조선교육령」: 식민지 수탈을 위한 조선인을 하층일본인으로 키우려 함.
4.역사왜곡과 문화재 약탈
-1916년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공포 (한민족의 문화재를 약탈하기 위한편법).
학술조사 명목으로 각지역의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적과 출토품등을 도굴 파괴.
-박은식의 「한국통사」:일제의 왜곡된 한국 역사교육과 침략성을 폭로.
-식민지 사관정리 : 일본이 고대로부터 한반도 남방을 식민지로 경영
→‘임나 일본부설’‘정체성론’‘봉건사회결여론’‘타율성론’.
5.식민지 종교정책
조선의 모든 종교에 일본의 신도 정신을 불어 넣어 한민족의 정신을천황제의
위엄앞에 복종시키려함.
6.산업수탈
-1908년 동양척식 주식회사:한반도를 착취하기 위해 세운 특수 국책회사
-1908년「산림령」
-1912년「토지 조사령」실시→전국토지의 40%약탈(한반도 지배비용으로 사용)
:임야소유자들에게 지적과 면적도를 첨부하여 신고하게함.
⇒ 총독부소유 (일본인들이 한반도 산림을 맘대로함.)
-1912년「회사령」:조선총독의 허가 없이 회사를 맘대로 설립할 수 없게함.
⇒민족자본의 성장억제, 한국을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한 원료공급지 및
상품판매시장으로 만들려는 목적.
-1915년 「조선광업령」
광업독점권 강화(전체광산의 80%소유, 한국인0.3%소유)
「조선어업령」:황실 및 개인어장강탈.
※한국인의 산업이 일제에 종속됨에 따라 민족의 존립자체가 말살되는 상황에 당면하게
되었고 무단통치로 인해 독립운동은 더욱더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됨.
안팎에서의 민족의 저항 : 일본 헌병과 군대의 무자비한 탄압속에서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은
지하조직속으로 옮겨 활발히 이어졌다.
※비밀 결사 조직
대한독립의군부:의병계열
민단조합:유생
기성볼단:계몽운동계열
조선국권회복단:국외운동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군에게 군자금 지원
대한광복회:공화국 건설 목표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고 군자금 지원-1918년 관련자 체포.
조선국민회:평양에 재학생과 교사중심⇒1918년해체
⇒3.1운동 학생동원, 독립선언서 보급,지하신문제작
※민족을 살리는 교육 : 총독부의 민족교육탄압으로 사립학교는 문을 닫게됨
개량학교:민족교육의 장이 됨
만주
-서전 서숙: 이상설이 북간도 용정에 세운 국외에 세운 최초의 민족교육학교.
근대 학문 독립군 양성학교.
-명동서숙: 민족교육 군사교육 양장과 양봉법.
-간민교육회(간민회):민족교육운동
-신흥강습소: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
⇒일제는 1907년 통감부간도 임시 파출소를 세워 만주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음
-동제사: 신규식이 세움.임시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의 공식단체로 독립운동은 물론
조선인들의 직장알선, 중국학교 입학주선.
러시아
-대한청년교육회
-승무학교
-야학
-한족회중앙총회(1917): 1914년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일본 동맹관계→러시아
지역에서 조선인들의 민족운동불허
≒1918년 일제는 시베리아 점령후 조선인민단 조직→조선인 사회분열
미국
공립협회((1905년):대한인-국민회
=어려운 이민생활속에서도 군사훈련을 받으며 일제와의 결전을 준비.
※주시경
-한글연구와 보급을 통해 일제에 저항.
-한글연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움
-저서
1908년 국어문전음학
1910년국어 문법
1914년말의 소리
※박은식
-역사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민족적인 역사서집필-한민족의 각성을 촉구, 겨레의 얼을 지키도록하는데 영향
-만주애서 신규식 홍명회등과 동제회단체만듬-애국교육을 맡음
-강우규 의거 계획
-저서 : 대동고대론사,한국통사,안중근 의사전
※신채호
-새로운 학문을 통해 한민족을 눈뜨게 하려고 한 학자,언론인.
-일제의 민족사관을 부정하고 역사적 사실을 통해 민족사관을 세우려 노력.
-저서 :조선 상고사.
3.1 민족 해방운동의 태동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후 폭압적이고 착취적인 식민주의 제국주의→정의와
평화,인도주의와 민족주의
-1917년 러시아 제국주의→볼세비키정권.
-미국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발표
-대한인국민회는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본내기로 결의했으나좌절 →일본에 있는 유학생 독립운동가에게 큰용기를 줌.
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중이던 한국인 남녀 학생들이 도쿄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
“2.8 독립선언서는 한일 합방이 한국민에 뜻에 반하는 것인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니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땐 우리민족이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을 선언.”
∵2.8독립선언은 국내의 민족지도자 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의 계기가 됨.
3.1운동
-손병희를 대표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인사고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이 3월1일 오후2시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경찰에 통보 자진체포.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광무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많은 군중과 합세하여 평화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감.
-총독부는 평화적시위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이 학살 부상 투옥됨.
민족대표47명 내란죄구속.
∵의의: 대내적으로 우리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내고 온민족이 항쟁에 참여하여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유관순
-1903년 3월15일충남천안 목천에서 태어남.
-1914년 천안 아우애장터에서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
-일본헌병의 가혹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당당히 조선의 독립을 주장.
-1920년 잔혹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남.
-일제에 대항하여 끈질기고 강인한 저항정신을 보여줌.
이야기 한국 역사 11 - 2
1. 기만적인 문화 통치
1) 무단 정치 -> 문화 정치
-무관뿐 아니라 문관 출신도 총독취임 가능 => 문관 출신 총독은 한 사람도 없었다.
-헌병 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바꾸고 관리와 교원의 제목, 대검을 폐지
=>특고 형사, 사복 순사, 밀정을 만들어 조선인 생활 감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정치단체를 제외한 결사의 자유 허용
=>동아일보, 조선일보/개벽, 신천지, 신생활, 창조, 폐허, 백조, 문예운동
-조선인의 관리임용과 처우 개선 =>직원 707명중 10명이 조선인
-교육 개선 =>일본의 학제에 맞추어 바꾸고, 식민노예교육, 동화교육강화,
실업중심의 교육
∴폭력과 회유를 교묘히 배합한 문화정치는 전민족적 항일의지가 분출하는
상황에서 일제가 고안해 낸 교활한 식민통치방식이었다.(민족분열정책)
2)토지조사사업, 회사령 -> 산미증식 계획과 회사령철폐
: 조선의 수요 증가 대비, 농가 경제의 향상, 일본 제국 식량문제 해결
1차(1920 ~ 25), 2차(1926 ~ 1934)
※관동대지진 : 지진을 핑계 삼은 관동대학살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1)정부수립운동
-블라디보스톡, 상해, 한성정부에 각각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단일화에
합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민주 공화제)수립
2) 활동시기
①1919 ~ 1921 세계대전이후 국제적으로 혁명운동 고양
ㄱ.인물: 외교독립론자(이승만), 실력양성론자(안창호),
독립전쟁론자(이동휘), 초기 사회주의자들
ㄴ.활동 - 독립신문 발행
-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대표 파견
- 연통제 실시: 상해에 위치한 임정의 국내, 간도지방과 연락망
- 대한민국 임시헌장
-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사건
②1921 ~ 1940 임시정부 침체기
: 독립전쟁론자 탈퇴, 실력양성론자 탈퇴, 외교론자인 이승만 하와이로 활동 무대 옮김
③1940 ~ 1945 활발한 재기 움직임
- 태평양 전쟁
한국국민당세력(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
- 한국독립당결성 + 민족혁명당(김원봉)
- 중국 국민당정부의 재정지원
- 광복군 창설: 일제가 패망하는 시기에 일본군의 맞상대로 하는 독립전쟁
계획을 수립했다는 점
3. 독립군의 빛나는 투쟁
※북·서간도, 연해주가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무대이었던 점
- 지역에 다수의 한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되었고, 우리나라 국경과 가깝다.
▶봉오동전투(1920.6)
-대한 독립군을 이끈 홍범도 부대가 최진동 부대와 함께 봉오동까지 추격한
일본군을 매복작전으로 섬멸한 전투
▶훈춘사건(간도사건, 1920.10.2)
일제가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불태우도록 한 다음 이를 독립군
행위로 몰아 붙인 것으로서 일제가 월경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사건
▶청산리전투(1920.10.20)
북로군정서 김좌진 부대가 삼도구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맞이해서 싸운 이후 이도구와
삼도구의 지역에서 10.26까지 전개된 1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
->일본군의 간도 출병이후 독립군과 일본군과 대결 전투 중 최대 규모, 최대의 전과를 올린
전투
▶경신참변(1920.10 ~ 1921.5)
- 독립군 '소탕'을 핑계로 비전투원 동포에 대한 무차별 학살
▶자유시사변(흑하사변, 1921.6)
-대한 독립군단(1921.4)을 결성하여 소련 시베리아 자유시 알렉세이예프스크 로이동 중
독립군 내부의 군사 지휘권을 둘러싼 독립군 부대 상호간에 무장 충돌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4. 조국 해방을 향하여
1) 독립군의 새로운 편성
- 참의부(동만주 일대)
- 정의부(남만주 일대) - 국민부 - 조선혁명군
- 신민부(북만주 일대) - 혁신의회 - 한국독립군
2) 의열단의 결성과 투쟁
- 의열단(1919.11):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의 우두머리,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일제 탐정, 반민족적 토호 열신 등 암살.
- 살벌한 식민지 통치 아래서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국내외의 조선 사람들에게
항일 투쟁의 의욕을 고취
∴민족 해방 운동의 성장은 컸지만 각각의 운동이 분산적으로 통일적인 지휘나 전략기술 없이
수행되어 연합조직이 형성되지 못한 점, 국내의 민중과 연결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 농민
(원산총파업), 노동자(암태도 소작쟁의, 북률면 소작쟁의, 용천 소작쟁의), 학생(광주 학생
항일운동)의 민족운동이 일어남
이야기 한국역사 12 - 1
1. 조선독립의 대열에 선 농민들
① 원인: 1911년 - 1918년, '산미 증산 계획'으로 농민들은 생존권의 위협
② 농민들 단결의 필요 : 소작인 조합, 소작인상조회, 농민 공제회, 소작인 동맹
③ 한 일 소작쟁의 : 농민들 스스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지킴
④ 구체적 사례 : 암태도 소작 쟁의 p17 - p24
2. 노동자들이 적극적 규모의 조직을 만들다.
① 대상 : 소작농 ⇒ 막노동꾼, 지게꾼, 공장노동자
② 목적 : 식민지체제와 자본가로부터 권리 지키기
③ 발전 단계 : →(친목단체성향) 항구도시 대도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
→(계몽적차원) '조선노동공제회의'<= 지식인층이 이끄는 본격적 노동조합
<= 의의:노동강습소,야학, 노동단체로 발전
→조선 노동 동맹 : 기존 직업별 노동단체합침, 노동자간의 유대강화
→조선노동총동맹 : 연대투쟁의 중요성 인식, 노동, 소작쟁의 해결
: 농민단체와 합침(농민:지주 일제의 탄압
노동자:투쟁경험을 배우기 위해)
→25 : 분리
→27, 조선노동총동맹 창립 : 독자적 노동총동맹,노동자간의 유대강화,파업
투쟁강화,생존권 확보에 필요한 요구
3. 공산주의 운동시작
① 대외 : 1917년, 10월 혁명의 영향 - 러시아한인 활기(민족운동)
1918년 하바로브스키에서 한인회의
-자유종 발간, 군사학교설립, 전쟁과제국주의 반대사업
1919년 : 임시정부와 통합 참여
1920년 상해에서 한인공산당 조직
1921년→ 이르쿠츠쿠파 : 고려공산당조직
→ 상해파 : 국내 사회혁명당과 연합 : 민족해방중시
국내 : 1919년 : 지식인민족주의자 : 민족해방목표
1922년 : 국내 무산계급운동사상 : 청년,노동 농민 운동으로 성장
1923년 : 전국규모, 프롤레타리아중심, 사회혁명
1924년 : 조선청년 총동맹
② 조선 공산당 창당
1925년 : 조선공산당; 화요회,북풍회<= 코민테른 승인
→ 일본 제국주의 완전 타도 (비밀투쟁)
제2차 공산당조직재건 (사회주의 + 비타협적민족주의) → 6.10만세운동주도
1928년 : 3차 조선공산당
4차 조선 공산당 - 혁명노선을 분명히 함
↑→ 지식인,학생중심, 대중 운동 단체 활동을 효과적으로 이끔.
③ 6.10 만세운동 ↖ 일반 민중에게 혁명적 시련을 줌. 실패,동맹 휴학
↖ 융희황제 사망, 국장이용 시위 계획, 천도교 구파와 공동시위
4. 식민지 대중의 창구 언론과 출판
①언론과 출판 : 문화정책 : 조선인 생각과 동태 파악
1921년, 무명회, '언론 자유의 신장과 회원의 권익 보호'
1930년 모두 해체
②신문화 운동
5. 민족 해방 운동의 고양
① 신간회(1927년) ;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의 성격으로 항일 투쟁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통합
→ 강연회,노동야학,교양강좌
→ 1929년,광주학생운동 ⇒조선학생의 강한 애국심과자주독립정신
→ 1929년 해체
②근우회 : 여성해방운동 : 봉건적유물,현대적 모순,불합리성타파,<= 여학교 (신교육,기독교)
③노동자들의 총단결⇒ 원산총파업(p65) 지도자들의 판단 착오로 실패⇒계속운동
↕ → 치안유지법
④김구의 애국단(31년) 이봉창, 윤봉길
이야기 한국 역사 12 - 2
민족의 수난
국외 러시아 한인들의 강제 이주 : 한인들에 대한 오지추방 계획 - 소비에트 정부
국내
1.신사참배 강요
신사참배 - 일본국민 ; 전쟁을 치러내기 위한 정신적 결속
한민족 ; 독립의식 제거(정신적으로 억제)
거부항쟁 - 기독교계통 학교의 교사, 학생, 학부모 중심
2.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에 의한 수난
1) 전시동원체제
국내위기(대공황,식민통치위협)→대륙침략→식민정책의 변화 (농산물약탈→군수품생산)
2) 전쟁의 총알받이-국가총동원법(1938), 국민징용령(1939), 육군특별지원병제도(1938),
징병제(1943)
3) 정신대와 위안부 ; 여자정신대 근무령(1944.8.23) -군수공장. 종군위안부
민족말살을 위한 정책
1. 창씨개명 - 한민족의 전통문화 말살, 조선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인과 같다는 구실
2. 민족분열책(민족지도층의 와해)
신간회 해산 → 민족지도층 변질 → 민중이 항일운동의 주체로 등장
*친일파 - 친일파로 전향한 민족지도층인사(이광수,최남선,최린 ⇔ 한용운) 직업적 친일파
:일본숭배, 전쟁협력, 국방헌금, 황민화. 해방후 친일파에 대한 심판 → 현재
3. 친일문학
문학 - 시대의 반영 -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 양성, 민족문학말살
프롤레타리아 문학, 농촌계몽 소설
→ 순수문학(구인회;사회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못하는 소극적 인물들)
→ 황민화 문학(최재서,이광수,주요한 ⇔ 윤동주,이원록,이병기)
4. 언론탄압
언론의영향력 중시 → 언론탄압 → 세계정세 파악 불가능 → 민족정신말살 →식민통치순응
1930년대 이후
항일신문(신문 압수로 인한 경제적타격의 두려움)
→생활개선, 식민통치의 고통 외면
동아일보, 조선일보 → 1940년 폐간 → 매일신보(한민족의 여론 통제)
5. 말과 글의 탄압
일선동근동조설(일본과 조선은 한뿌리, 한조상) → 민족동화,언어동화,문화동화
→ 일본어강요 → 조선어 과목 폐지(1938. 조선교육령)
1)조선어학회
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1931)→조선어학회사건(1942)→한글학회
한글보급(문맹타파), 우리말통일(표준말보급), 한글맞춤법보급
2)진단학회(역사연구)
취지 ; 조선문화의 개척, 발전,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목적 ; 조선과 그 인근 자역의 문화 연구
일제패망의 길
중일전쟁(1937) → 태평양 전쟁(1941)→ 미국 자극
본국 ; 대정익찬회 - 반대세력 제거
조선 ; 사상범예방구금령 - 상상범이었던 사람은 무조건 구속시킬수 있다.
외부 ; 대동아공영권 - 일본의 주도하에 아시아가 뭉쳐 번영과 발전을 이룬다.
해방후를 위한 민족국가 설립 준비
1. 해외
*만주지역
항일유격대→동북항일연군(중국과연합)->북만주로 이동(소련국경 근처)
*연해주지역 →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만주,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기반 붕괴
→ 중국관내로 이동 → 중경시대(한국독립당),미주(재미한국연합위원회)
→ 임시정부에 참여 → 민족국가 설립 준비
1) 임시정부(좌우연합 정부)
1941년 일본, 1945년 독일에 선전포고 ⇒ 얄타회담에서 한민족의 독립 논의
*광복군 - 연합군으로 참전
이유 : 전쟁이 끝난 후 국제무대에서의 조선민족의 발언권행사
*학도병 독립군에 참여
2)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대→조선의용대화북시대→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북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창설 - 화북 조선 독립동맹 예하의 무장조직
2. 국내 조선건국동맹(1944. 8)
구성 ;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각계각층
이념보다는 조국해방에 대한 의지와 애국적 사상이 기준
3. 독립운동 세력의 합작 추진
1940년대 독립운동 전선 ⇒ 연합을 위해 노력 ⇒ 일제패망으로 중단
의의 :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서로 힘을 합쳐 일제에 맞서려 했다.
조국해방의 길목에서- 일본의 패망후 전승국의 위치를 확보하기위해 노력
전후 우리의 국제적 지위 상승을 위해
이야기 한국역사 13 - 1
해방과 국토분단
-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 (미.영.중)-최초로 조선독립 약속
-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 (미.영.소.중)-조선독립 확인
- 2차대전 연합국 승리후 조선을 전승국으로 인정치않음⇒소련, 미국이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일본군을 항복 받기위한 명분으로)
♧남한
*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여운영, 부위원장:안재홍
-민족국가 건립목적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연합→인민공화국
-우익인사참여 거부
-해방직후 국가기구 역할
* 미군정시대
-총독부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음.
-한국을 패전국으로 대우 한반도 직접통치 주장
-조선인의 자주적인 건국운동 인정치않음
-건국준비위원회 좌파세력으로 분류 인정치 않음
-한국민주당 계열 인물등용(우파세력)-송진우로부터 이승만을 추천받음
좌파 ;일제잔재청산, 토지개혁, 산업개혁주장 →노동자, 농민의 권력투쟁 →우파 친일파로매도.
우파 ;개혁반대, 체제유지(기득권) →지주 자본가 지식인→좌파를 공산주의로 매도
*좌우합작시도
-자주적인 노력으로 불안전한 민족문제해결, 정치적단결(여운영, 김규식)
-좌우합작 7원책이 서로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결렬됨
♧북한
-소련점령군의 지원으로 김일성 정권장악. 모스크바3상회의와 신탁통치
-1945년 12월 미,영,소,중은 한국의 통일 임시정부수립, 신탁통치합의
-좌우익지도층:합의내용중 신탁통치부분에만 관심→단정수립, 민족분열계기
통일정부수립 노력
* 4김회담
-1948년 4.30 평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공동성명서 채택
=>남한; 단선, 단정수립 발표
북한;조선인민최고회의 창설 -인민공화국 선포⇒남북분단, 남북대결
대한민국의 탄생
*제주 4.3사건
-1948년 단독정부에 반대한 제주도민의 항거
-부산 주둔군대 파견, 강경 토벌작전으로 제주도민 3만여명사망(해방이후 최대 비극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48. 5.10: 제주도 제외, 남한전역 총선거실시(독립촉성국민회.한민당참여)
-5.30: 제헌국회개원. 의장-이승만, 부의장-신익희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2.12: 대한민국 합법정부 승인
*여순사건
-1948년 10.15 여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제주도민 진압명령 거부
-1225명 사망 실종
*1949년 6월26일 김구 저격 사건
해방후
-미국: 이승만을 통해 남한 반공기지건설
-이승만: 한민당과 친일파의 기득권보장⇒권력장악
-친일파,극우세력: 통일정권에서 자신들의 설자리가 없음⇒반공분단세력인 이승만 이용
*반민특위
-1948. 9.22: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1948. 10.23: 반민족행위 특벌조사위원회 설치
-1949. 2.2: 본격활동
반민특위 → 친일파검거(구속 친일파 전원석방)
정부와 국회의 대립:이승만→반민특위 지원, 특별경찰대 해산
반민특위활동 6개월만에 와해
친일파→국가보안법 제정→반민특위 국회의원구속
※민족정기를 바로 잡을수 있는 기회를 놓침
*원조경제와 귀속재산처리
미국의 무상원조:한국경제의 의존성 ,독재성, 소비성증대
차관방식:경제침체
귀속재산 처리법:이승만 정권의 각종특혜조치로 신흥재벌형성. 특권층에 치우침
농지계혁법:지주의 땅을 거두어 소작인에게 5년에 땅값을 갚는 방식⇒다시 소작인으로 전락
비극의 6.25
*폭풍전야
-정부와 야당의 극심한 대립
-1948~49년 미,소군대 철수
-1949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축출
-1950년 미국무장관이 한국의 방위책임을 지지않겠다고 선언
-북한의 소련군의 무기지원과 졍제성장
-1950년3월 소련 수상 스탈린에게 남침보고
*북한군의 남침
-1950 6.25 일요일 새벽 4시 남침
-6.27 새벽3시 이승만 서울피난
-6.28 오전11:30 서울함락
-7.1 이승만 대전 떠남
-7.20 대전 함락
-8.17 대구 -부산
-9월초 공산군 대구에서 폐배
-9.15 유엔군 인천에 상륙(7만5천 병력. 261척 함정)
-9.29 맥아더, 이승만 서울 수복
-10.19 평양 함락
-10.19 압록강변 초산 점령
-10.29 중공인민의용군 12만명 지원
-12월말 공산군 38도선 이남으로 몰려옴
-1951 1.4 서울 점령
-2.18 국군과 유엔군 서울 되찾음
-6.23 유엔안전보장이사회-휴전협상제의
-1953 7.21 휴전협정 체결
*전쟁의 후유증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
-국토의 황폐화
-이산가족 발생
◎ 이승만이 현대사에 남긴 악의 유산
1)분단 책임
2)친일파 중용-친일파중심 정권구성. 반민특위 강제 해체
3)한국전쟁
4)독립운동가 탄압-항일 민족운동 세력 소외 계층화
5)헌법 유린
6)정치군인 육성
7)부정부패
8)매판 경제
9)양민 학살
10)극우반공
11)언론 탄압
12)정치 보복
이야기 한국 역사 13 - 2
▶전후 복구와 민주주의의 수난
1.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 당선
* 거창사건(1951.2.11) : 공비 토벌을 위해 창설된 육군 제11사단의 9연대 병력이 경남 거창군
신원면 주민들을 국민학교에 수용한 후, 군. 경. 지방유지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5백여 명을
집단학살하고 불태운 사건
* 국민방위군 사건(1951.3) : 6.25전쟁 중인 1950.12.21 공포된 국민 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제2
국민병에 해당하는 17~40세의 남자들이 이에 편입되었는데, 전선이 후퇴하게 되자 방위군도
후방으로 집단 이송되었다. 한데 이 과정에서 방위군 간부들이 막대한 물자를 착복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보급부족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1천명이 훨씬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2. 계엄령 선포, 발췌개헌안 통과----------2대 대통령 당선
3. 민주당(1955.9.17) 등장 - 신익희 당수로 야당 결집
4. 4사5입에 의한 3선 개헌---------------3대 대통령 당선
5. 고령인 이승만 사후의 정권 유지와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 조병옥의
죽음 -------------------4대 대통령 당선
※ 역사적 정당성과 지지기반이 약했던 이승만 정권은 애초부터 재집권할 가능성이 없는 정권
이었다. 정통성이 약한 정권이 억지로 장기 집권하려면 부득이 독재화 할 수밖에 없다. 정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느라 정치적 폭거를 감행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기만적이고 강압
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19(1960)
1. 원인
- 3.15 부정선거와 그 이전의 이승만정권의 행태와 억압에 대해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폭발
- 경제적인 요인: 소비재 공업 중심의 대외 의존적인 독점기업이 발달하고 그 결과 농업, 노동,
중소기업 문제 등에 부조리가 쌓이게 됨
- 국제 정치적인 요인: 경제 공황으로 인한 미국의 정책변화
2. 전개 과정
- 1960.3.4월 항쟁에서 학생(중고생)등이 주역이 되었다는 점
- 대구에서 고교생 시위(학원의 정치 도구화에 반대)
-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 김주열시체 발견→2차 항쟁
- 고려대생 정치깡패에 구타 → 서울시내 대규모 시위
- 교수단 시위 → 4.26 이승만 하야
3. 의의
- 낡은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이상을 지향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을 혁명이라고 할 때 4.19는
이런 정의에 부합한다(역사속의 역사 읽기/풀빛)
-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짓밟던 부정한 정치권력을 퇴진시킨 한국 역사 최초의 민주
혁명→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이 과제
- 정권은 교체되었으나 지배계급까지는 교체되지 않은 정치적 변혁이었을 뿐, 사회 혁명을
수반한 역사적 의미의 혁명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면 4.19는
'혁명'이라기보다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 (20세기 우리역사/강만길)
※ 이승만 정권 (국내 지주 세력과 친일 세력)
↓
허정 과도 정권 (이승만 하와이 망명)
↓
장면 정권 (독재 세력청산에 철저하지 못하고, 친일파 숙청작업도 못함→4.19주체세력의 평화적
민족 통일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
↓
박정희 군사 쿠데타 (미군의 묵인과 협조)
▶5.16 군사쿠데타(1961.5.16)
- 군부 내 권력 지향 세력의 끈질긴 책동과 4.19 후 평화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는데 불안
해진 미국 쪽의 묵인 내지 방조, 장면 정권의 방어능력 부족 등이 원인이 되어 성공. 2년 7개
월간 군정 시작. 이후 30년간 군사정권유지
- 박정희 5대 대통령 당선(1963.12.17)
※박정희 정권
- 자립경제와 조국근대화를 외치며 경제 개발을 목표로 삼는다.
- 한일협정 체결: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3각 안보체제를 구축하려던 미국 쪽 요구에 쫒기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으로서 그 정통성의 취약점을 감추기위해 서둘러 시작한 경제
개발자금을 조달하는데 쫒기던 박정권이 35년에 걸친 민족적 희생이 확인되지도, 정당하게
보상받지도 못한 졸속 협정을 체결하고 만다.
- 베트남 파병: 미국의 지원 약속과 전쟁 과정에서 생기는 각종 공사 일자리로 한국 경제를
일으키려는 생각에서
- 6대 대통령 - 7대 대통령 - 8대 대통령 - 9대 대통령
- 10.26사건으로 18년간 유지된 군사 독재정권이 무너짐
경제체제
이승만 : 원조 경제체제, 자본과 원료를 대외 의존하는 소비재 중심
박정희 : 외자도입 경제체제, 일부 재벌이 독점, 소비재 중심
=> 1960년 수출지향적 공업화로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착취), 70년대 심한 인플레이션, 지속적인
국제수지 악화, 경기침체가 노동운동 격화
▶7.4 남북 공동 성명(1972.7.4)
- 서로의 체제를 고집하여 왔던 남과 북 양측의 통일 문제에 관한 최초의 합의
- 통일원칙
①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말고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함
②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함
③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며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의의: 1950년대 이승만 정권과 1960년대 박정희 군사 정권아래서 이적론으로 탄압받던 평화
통일론이, 같은 군사정권 아래서 겉으로나마 일단 정부 쪽의 통일 방법론으로 정착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남북의 대등 통일을 전제로 한 성명이었고, 20년 후의 '남북
합의서'에도 그 정신은 이어져 남북정부들이 대등한 처지에서 통일을 약속하게 된 것
▶10월유신(1972.10)
- 장기 집권을 위한 폭력적인 개헌 조치며,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정치체제
-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한다'는 주장으로 국회 해산, 정치활동 금지
- 새 헌법: 대통령 3권 통수, 임기 6년, 중임 제한의 철폐, 통일 주체 국민회의 설치, 국회의원
3분의 1의 대통령 지명 등
- 8대, 9대 대통령 당선
※박정희 정권 -> 최규하 대통령 -> 전두환 -> 노태우
10.26 12.12 쿠데타
▶반독재 민주화 운동
-YH무역 여성노동자 시위
-부마 민주 항쟁
-광주 5월 민중 항쟁
-6.10 민주 항쟁
12.12 쿠데타 - 1979.12.12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감행한 군사 쿠데타.
10.26 사건 이후 사태 추이에 불안해하던 차에 정승화가 수도권 지역의 주요 지휘권을 개편
하자 전두환 등이 육군 참모 총장 공관이 있는 한남동과 삼각지, 경복궁 일대에서 총격을 벌인
끝에 12.12 저녁 7시경 정승화를 김재규 내란 방조죄로 체포한 사건.
출처 : 山海카페
글쓴이 : 山海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