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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3 신춘문예 시(詩)들

후쿠시아 2013. 11. 21. 14:30

가난한 오늘 
                                   - 이병국 /동아일보 2013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극야의 새벽

 

                                                                  김재길/조선일보 2013 신춘문예 시조 당선


얼붙은 칠흑 새벽 빗발 선 별자리들
붉은 피 묻어나는 눈보라에 몸을 묻고
연착된 열차 기다리며 지평선에 잠든다.

 

황도(黃道)의 뼈를 따라 하늘길이 결빙된다
오로라 황록 꽃은 어디쯤에 피는 걸까
사람도 그 시간 속엔 낡아빠진 문명일 뿐.

 

난산하는 포유류들 사납게 울부짖고
새들의 언 날개가 분분히 부서진다
빙하가 두꺼워지다 찬 생살이 터질 때.

 

제 눈알 갉아먹으며 벌레가 눈을 뜬다
우주의 모서리를 바퀴로 굴리면서
한 줌의 빛을 들고서 연금술사가 찾아온다.

 

황천의 검은 장막 활짝 걷고 문 열어라
무저갱 깊은 바닥 쿵쿵쿵 쿵 울리면서
안맹이 번쩍 눈 뜨듯 부활하라 새벽이여.

 

 

 

 

손톱 깎는 날

                                                      김재현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출처 : Lodoco Hall
글쓴이 : lodoc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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