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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멘토 고은 시인

후쿠시아 2014. 10. 15. 09:12

고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청춘의 시인 “별 하나가 꿈이 되려면<br>굶주렸을 때 밥 한 숟가락만큼 절실해야죠.”

‘20세기 세계문학사상 최대의 기획’이라는 [만인보(萬人譜)]의 고은. 1958년 등단한 이래 53년간 시, 소설, 평론 등의 저서를 150권 이상 세상에 내놓았고, 국내외 문학상 15개, 훈장 2개를 수상했으며, 세계 25개 국어로 번역서가 출간된 작가.

하지만 시인 고은의 청춘은 절망에 가까웠다. 수차례의 자살 시도가 있었고, 10년간 승려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소년 시절 품었던 꿈을 놓지 않았고, 시대의 언어가 되고자 소망한 대로 어느덧 세계의 시인이 되었다. 고은은 팔순의 나이에도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청춘이라고 고백하며 ‘그래도 품어야 할 우리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 고은 인터뷰 영상>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 앞에 “나는 어리석은 쪽을 택하고 싶었고, 어리석은 쪽이 훨씬 진실하다고 생각해요.”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10대에서 30대까지 스스로 네 번이나 죽음을 선택했다고 하셨는데요.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우리 세대의 절반 가까이가 죽었습니다. 남쪽과 북쪽을 통틀어 500만 명 이상이 단 3년 만에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그때 내가 10대 후반이었는데, 너무나 많은 죽음을 봤어요. 좌익이 점령했을 때는 우익이 죽었고, 우익이 돌아오자 좌익이 죽었죠.내 고향에서만도 이 죽음의 재앙이 세 번 되풀이되었어요. 군인들이 와서 시체를 파내서 옮기라고 했는데, 그 작업을 하고 나면 보름 동안 씻고 또 씻어도 시체 냄새가 몸에서 없어지지 않았어요. 살아남아 기쁜 게 아니라 죽음이 내게 눌어붙어 있었지요.

죽음이라는 게 뭡니까? 삶이 없어지는 허무 아닙니까. 나의 초기 세계를 허무주의라고 이야기하는데, 유럽의 허무주의나 노장사상의 허무같이 대단한 게 아니에요. 삶에서 그냥 무(無)와 만난 거지요. 같이 뛰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고, 세상의 의미 있는 것들이 전부 의미를 잃는 것. 거기에 시인의 꿈같은 게 차지할 자리가 있을 리 없었어요.

곧이어 정신착란이 왔고, 집을 뛰쳐나갔다가 잡혀오고 또 떠나고 그랬어요. 그러는 중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요. 이런 얘기는 가능한 한 하지 않기로 했는데 말이지…….

그 과정에서 얻은 지혜가 있다면요?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가슴에 안고 방랑하다가 승려의 길을 택했습니다.

승려가 되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었어요. 길을 나섰다가 만난 떠돌이 스님을 따라간 것뿐이었어요. 한 쇠붙이가 자석에 들러붙은 셈이지. 시간이 흐른 뒤 그 스님의 스승인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밥 안 먹었지? 배고프겠다." 그러시고는 밥을 주시더니 "문자가 너무 많다. 버려야 한다." 하셨죠. 그때부터 선(禪)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전쟁과 고향의 비극이 만든 외상(外傷)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서서히 치유되어갔어요.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과 같은 지혜를 얻은 건 아니에요. 내 생각에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지혜는 이 우주 안에 없습니다. 저기 높은 곳에 지혜가 있고 나는 어리석으니까 그 지혜를 섭취해야 한다, 이따위 지혜를 나는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가 후회하고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오류를 범하면서 지혜를 만들어 내는 거지요. 살아가면서 지혜가 하나씩 들러붙는 거예요. 오랜 세월이 흘러 조가비에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지혜는 후회에요.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후회와 잘못에서 나오는 성찰이지요. 그래서 나는 어리석은 쪽을 택하고 싶고, 어리석은 쪽이 훨씬 진실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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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속을 했고, 그때부터 지독한 불면증을 10년 동안이나 겪었습니다.

승려 생활을 하면서 시를 조금씩 썼는데, 그 가운데 ‘폐결핵’이라는 시를 친구가 막 생겨난 시인협회에 보냈어요. 그 시가 조지훈의 천거를 받게 되어 1958년 등단했지요. 지금은 시인의 길과 종교의 길을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지만, 그때는 그게 허용이 안 될 때였어요. 강화도 마니산에 올라가 밤을 새며 고민하며 통곡을 했지요. 그러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예술의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했어요.

예전에 효봉 스님이 나를 보면서 '너는 여기 오래 못 있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스님이 나를 세상에 내보려고 하나 보다 싶어서 원통해하며 혼자 엉엉 울었는데, 그 말이 맞았던 겁니다. 아무 준비 없이 세상으로 나왔어요.

10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지만 그것 자체가 나를 완성시킬 수는 없었어요. 어느 정도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기간 동안 어떤 하나의 체험을 한 건 사실이지만 진리를 깨친 그런 상태가 아니었죠. 다시 옛날의 죽음이 달라붙기 시작했어요. 떼어지지가 않았어요. 삶이 죽음의 부속품처럼 여겨졌죠. 그때 찾아온 불면증이 10년간 이어졌어요. 잠을 못 잔 상태에서 낮에 사람을 만나니 흐릿한 물체로만 보였고, 인간을 혐오하게 됐어요. 소주를 몇 병 먹어도 그냥 취할 뿐 잠은 오지 않는 가혹한 불면증이었습니다. 또 다시 죽음을 결행하기를 몇 번, 그렇게 힘들게 살아갔죠.

고뇌를 겪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고뇌하는 청춘에게라, 음……, 어떤 삶이나 고통을 가슴에 품고 있지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행복하기만 한 삶을 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낙원이 아니라 고난 위에 서 있어요. 생이 죽음 앞에 있는 것처럼 말이지.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고(苦)의 세계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 나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것에 가책을 느끼지요. '아직까지 살아서 너희들을 바라보고만 있어, 아무것도 감당하지 못한 채.' 그러고는 돌아앉아 가슴 아파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나’라는 말 자체가 ‘너’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본격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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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내내 무교동 술집에서 거의 매일 술을 마실 때였어요. 통행금지에 걸리면 주모에게 통사정해서 거기서 자기도 하고 그랬죠. 1970년 11월 어느 날이었었는데, 술집 바닥에 버려져 있는 신문에 한 노동자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어요. 항상 죽음에는 관심이 많았으니까 눈에 띈 거죠. 본격적으로 그 죽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이 죽음이 뭔가? 내 죽음과 어떻게 다른가? 그런데 전태일의 죽음은 개인의 단순한 생의 포기가 아니었어요. 거대한 사회 현실의 모순이 들어 있었죠.

그전에는 현실 참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을 바보처럼 여기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전태일 이후로 내가 바뀌기 시작했어요.나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그 당시 대학생들, 지식인들을 전부 각성시킨 사건이었죠. 하나의 죽음이 우리 시대 전체에 가혹하게 경종을 울린 거예요.

아무런 이론도 의식의 토대도 없이 그냥 거리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나는 누군가가 열어젖힌 시대의 대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작은 존재였어요. 물론 시대의 언어가 되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꿈은 있었지만.

그러면서10년 이상의 심각한불면증이 없어져 있었어요. 정말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내 몸 안에 있는 깊은 골짜기에 갇혀 있다가 뛰쳐나오면서 그리 되었을 거예요. 잠을 자면서 새로 태어나는 최초성을 다시금 맞이할 수 있었어요.

시를 쓰고 세상과 소통하면서, 힘들고 부끄러웠던 어린 시절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16세기 임진왜란 때 어떤 엄마가 굶주림의 극한에 가자 애기가 병아리로 보여 삶아 먹은 적이 있었어요. 이처럼 엄마의 모성까지 마비시키는 게 굶주림이에요. 우리가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는 건 처절한 굶주림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지요.

어릴 때 고모 등에 업혀 엄마가 바다에서 해초 뜯어오는 걸 매일 기다렸던 기억이 있어요. 해초를 밀기울에 버무려 먹는 게 밥이었죠. 그때 고모한테 '고모 별 따줘. 먹으면 배부르겠다' 그랬어요. 별을 밥으로 만난 거예요. 나중에 시를 쓰게 되면서 사람들이 별을 꿈의 오브제라는 둥 그러면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별을 밥으로 여긴 게 부끄러웠고, 열등감이 마구 느껴졌죠.

그런데 70년대 후반에 오면서 그게 자랑이 된 거예요. 절실함에서 나와야 진정한 꿈 아니겠어요? 별 하나가 꿈이 되려면 굶주렸을 때의 밥 한 숟가락으로 여겨질 만큼 절실한 삶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요.

시인 고은의 가장 큰 자취로, ‘20세기 세계문학사상 최대의 기획’이라고 평가받는 [만인보]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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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0년대를 '노동자(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해 노동자(YH 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으로 닫힌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1970년대 후반 영등포에서 노동학교 교장을 했었는데, 친구들, 선배들을 데려다가 노동자들에게 무료 강의를 하게 했죠.

그러다가 1980년에 내란 음모죄로 잡혀 갔는데, 나처럼 내란에 안 어울리는 사람까지 엮어서 간 거죠. 나야 술이나 한 잔 먹을 줄 알았지 무슨 내란을 하겠어요? 내란음모 외에도 서너 개 법을 함께 적용시켜서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 특별사방으로 데려갔어요.

같이 갔던 문익환 목사는 육군참모 총장 정승화가 갇혔던 방에, 나는 김재규가 갇혔던 방에 들어갔어요. 방이 개미굴처럼 되어있어서 어디에 누가 있는지도 몰라요. 헌병이 지키는데 철장도 없고, 삼십 촉짜리 전구를 끄면 암흑이었어요. 죽을 때 통일을 외칠까, 민주주의를 외칠까, 짧은 시를 읊고 죽을까 그런 걸 생각하며 살아야 했어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 상황이었어요. 책 하나 볼 수 없었고 오줌 싸는 통 하나만 있었지요. 현재의 삶이 박탈되어 버리자, 과거가 현재의 자리를 대신해주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 술을 많이 마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기억났고, 이웃집 아저씨나 건넛마을 누구처럼 과거에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 아무 의미가 없는 과거의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이 내 기억 속으로 들어왔어요.

또 후회가 되는 일도 많이 생각났어요. 할머니한테 좀 더 예쁜 애기가 되어드릴 걸, 할머니가 나를 예뻐할 때 왜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이런 과거의 결핍들이내 속에서 마구 솟아나왔어요.

만약 내가 다시 산다면 이 얼굴들을 재현하고 싶다, 시로 그 얼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어요. 메모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단지 구상을 하는 것 자체가 생에 힘을 줬어요. 항문에서부터 불길이 솟아올라 내장을 거쳐 올라오면서 비굴함은 물러가고 당당해졌어요.

시를 통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화엄 사상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죠. 화엄은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는’ 거예요. 아니, 나는 세계나 네가 먼저 있으므로 내가 있게 되는 것이죠, 관계가 존재의 앞이지요. 가령 혼자 있으면 ‘나’라는 말도 필요가 없지요. ‘나’는 수많은 관계의 산물입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집에 가기 위해 타는 버스를 생각해보세요. 내가 태어나기 전 조상들은 또 어떻습니까? 수많은 우주 갈래에서 온 게 나입니다. 나는 많은 관계의 귀착점이자 무한한 관계가 전개되는 출발점이에요. 어디에 ‘나’만 뚝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요. 그만큼 우리 존재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이에요. 이런 점에서 ‘관계’는 우리 삶의 총칭이에요.

죽음에서 시작한 1950년대의 허무주의와 1970년대 이후 거리에서 찾은 방향성, 이 두 가지를 아울러서 지금은 화엄이 나의 지향점이 되었어요.

[만인보] 역시 내가 꿈꾸는 화엄의 한 표현입니다. [만인보]는 현실을 떠나간 사람들을 재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손을 잡게 하는 작업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누군가와 관계 맺기에 서툰 세대가 아닙니까?

지금은 다른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려야만 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시대이지요. 몇 대 1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학교에서 주입시키는 공부를 하고, 요샛말로 스펙을 쌓는데 세월의 전부를 보내는 이들이 진정한 우정을 쌓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지요.

우정이 뭡니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친구는 '너 대신 내가 대신 죽겠다', 이런 의미라지요. 그러니까 서로의 죽음을 대행해서 먼저 죽어가는 존재가 친구인 거죠. 기가 막힌 의미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는 '네가 없어야 내가 있는 거야', '내가 합격하기 위해서는 네가 떨어져야 해', 이렇게 살아가지요. 이 시대의 사상 담론에서 '우정'이나 '환대'에 대한 이론이 구축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울대에서 몇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너희들에게서는 피 냄새가 난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너희는 중고등학교 때 적어도 몇 명을 죽이고 여기 온 거야. 걔네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너희는 아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경쟁은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다고 끝나지 않아요. 언제 운명이 달라져 죽음을 향해갈지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우정을 나누겠습니까. 잠깐 1950년대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당시 한국 사회의 핵심 정서는 실존주의였어요. 실존주의는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는 것이지요. 이때의 존재는 철저한 단수입니다. 일례로 신문에 활자 하나가 거꾸로 잘못 찍혀 있을 때의 그 비복수성, 예외성을 실존이라고 부를 정도였죠. 전쟁의 폐허 속에 살아남은 젊은이들에게 단독자로서의 실존주의는 참으로 매혹적이었어요.

그러다가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왔고, '나는 반드시 누구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있다'는 연대의 시대로 건너갔지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고독한 단독자'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요. 1950년대로의 회귀인 것이지요. 혼자만의 골짜기에 갇혀서 사는 이들은 타인의 아픔을 보지 않아요. 가령 이라크는 고대 문명이 남아 있는 인류의 보고 아닙니까? 거기에 폭탄이 투여되는 것을 방송에서 보도하면서 '크리스마스이브의 불꽃놀이 같다'는 표현을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잖아요. 풍경으로만 보는 거예요. 폭탄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 문명의 파괴에 대해서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는 무감각한 개체가 되어가는 겁니다.

절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꿈과 희망은 가장 무서운 어둠 속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지금 시대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힘든 현실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요?

이게 우리가 지적하고 규탄하고 그런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실컷 이렇게 살아보는 거지요. 나는 어떤 걸 치를 때는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이 시대를 견뎌내고 죽으면 그 다음에 누군가는 원하는 시대를 살 수도 있는 것이죠.

아마도 21세기 중반쯤 가면 지구의 문화 혁명이 무섭게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는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가치를 찾을 거예요. 인류학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지독한 이기주의에 갇혀 있지만 '아, 이게 아니구나'하면서 무서운 폭발력으로 공동체를 지향하는 날이 올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좀 놔두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든 당대에서 최상의 완벽한 해답을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긴 과정 속에서 한 점을 찍고 있을 뿐이죠. 우주의 티끌로 잠깐 있다가 가는 것이지요.

삶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 속에서 고통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냥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인생을 그렇게 의미 없이 끝내서는 안 되겠지요. 앞서 한내 말은 시대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거나 서로를 질책하지 말라는 말이지, 반성과 노력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인간화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특히 지구 전체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변하고 있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살펴봐야 해요. 인간을 제외한 생태계는 배고플 때 먹을 뿐 그것의 양을 확대해서 소유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소유를 하고 자기 욕망을 연장시키고 확대를 합니다. 바로 이 탐욕이 비인간화의 원인입니다. 미국의 부, 일본의 부, 재벌의 부가 차곡차곡 쌓여 가면 뭐 합니까? 다른 한 편에서는 피 흘리는 빈국과 빈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학생들에게도 자주 "너는 앞으로 너 혼자 잘살지 말고 네가 밀치고 온 사람들에게 보상해야 돼. 타자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해."라고 말합니다.

절망을 딛지 않고서는 희망의 구체성이 없어요. 희망은 혼자 무지개처럼 떠 있는 게 아니고 절망을 토대로 생기는 거죠. 삶이 죽음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힘, 이상, 꿈, 희망은 반대쪽의 가장 무서운 어둠 속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걸 통절하게 느끼며 살아가야 해요.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감성조차 메말라버린 걸까요?

지난 몇 천 년 동안은 시의 시대였지요. 그런데 이제 시가 지겨워진 때가 온 거예요. 그래서나 같은 사람이 시인을 하고 있는 지금은 '시인이라는 것들은 어디 변방에 가서 혼자 울든지 말든지 해라', 이런 시대이지요. 그렇다고 시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조금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1960년대 하수도 시설이 온전치 않았던 시절, 분뇨차가 와서 똥을 빨아들일 때 베토벤의 월광곡을 틀었어요. 그 냄새 나는 속에서 말이지요. 이게 베토벤을 모독하는 걸까요? 오히려 베토벤인지뭔지 아무것도 모르던 서민들이 클래식을 들을 수 있었던 기회였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참혹한 과정을 겪으며 베토벤이 대중화됐어요. 시도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시가 온갖 문화 형식 속에 들어있습니다. 광고 한 구절구절이 시 아닙니까? 김소월의 시도 어디 대중가요에 쓰이고 그러지요. 이렇게 가도 돼요. 요즘 사람들이 시를 자주 안 읽는다고 해서 시가 죽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옛날 우리 시의 조상들이 시를 많이 누렸으니까, 이제쯤은나 같은 시인들이 조금은 쓸쓸하게 구석에서 혼자 시를 읊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희망의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중동 지역에서 6만 년 전의 화석이 나온 적이 있어요. 조사를 해 보니 소년의 유골이었어요. 그런데 그 유골 이마 옆에 히아신스 꽃이 있는 거예요. 6만 년 전의 엄마는 지금의 엄마가 아니었지요. 거의 동물 비슷한 존재였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자식이 죽었을 때 그 옆에 히아신스 꽃 하나를 꺾어 놓아두고는 슬퍼하면서 '지금보다 더 좋은 데로 가거라.' 염원했을 겁니다. 이것 자체가 시에요. 그 마음의 기껏 일부를 활자화한 것이 오늘의 시랍니다. 시는 인간 누구에게나 다 있는 거예요. 자기 안에 이토록 아름다운 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군산북중학교 교사 시절_한국전쟁 때 고은은 군산항 부두에서 검수원을 했다. 이 시절 고은은 부두에 정박해 둔 배와 부두 사이에 나 있는 틈으로 몸을 던져 최초의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일본인 항해사에 의해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1951년) 
			한편, 고은은 같은 해 군산북중학교 국어 및 미술교사를 하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을 하지 못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교사를 할 수 있었다. (1951년)

인터뷰이 소개

  • 고은
    1933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1958년 등단한 이래 시, 소설, 평론을 포함한 150권 이상의 저작을 발표했고, 세계 25개 언어로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전쟁 이후 수차례의 자살 시도와 승려의 삶을 거쳐 시대의 언어가 되고자 하였고, 어느덧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다. 팔순의 나이에도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청춘의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