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춘향전[ 春香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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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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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조선조 사회에서 가장 미천한 기생 춘향과 양반의 아들 이도령이 당시의 엄격했던 사회적 계급의식을 초월하여 벌이는, 대표적인 고전 사랑의 서사시이다.
조선조 인조대왕 때에 전라도 남원 부사 이등이 한 아들을 두었으니 이름이 이영이었다. 그가 16세가 되자 풍채가 수려하고 문장이 뛰어나 칭찬이 자자했다.
어느 날 책방에서 학문에 힘쓰다 봄날을 맞아 마음이 들떠서 방자를 불러 고을에서 경치 좋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방자가 대답하기를 남원 광한루(廣寒樓) 경치가 그 중 으뜸이라 하자 이도령은 방자를 앞세워 광한루 구경을 갔다.
이때에 기생 춘향(春香)이 댕기 따고 대단치마를 입고서는 흥에 겨워 그네를 타는데 몸을 날려 올라 한번 굴러 공중에 솟구쳐 도화 늘어진 가지 톡톡 차니 꽃잎이 떨어졌다.
도령이 경치를 구경하며 문득 잊은 글귀 생각하다 어떤 미인이 그네 타는 모습을 보고 방자에게 물었다."저 건너 저것이 무엇인고. 선녀가 하강하였나 보다."
이에 방자는 딴청을 피우다 대답했다. "그녀는 다름 아니라 본읍 기생 월매(月梅)의 딸 춘향이로소이다." 하고 대답하자 이도령은 방자에게 춘향을 불러오라 일렀다. 방자가 가서 춘향을 불러 춘향이 광한루 아래 문안을 아뢰고 당상에 오르게 하여 예를 갖추니 도령이 나이와 이름을 묻자 춘향이 아리따운 소리로 나이는 16세요, 이름은 춘향이라고 아뢰었다.
이에 춘향의 모습에 반한 이도령이 말했다. "네 이팔이 나의 사사 십육과 정동갑이라. 어찌 반갑지 않으리오. 네 형용이 이름과 같구나. 절묘하고 어여쁘다. 썩은 나무에 앉은 부엉이 같고 줄에 앉은 초록 제비로다. 너를 부른 뜻은 다름 아니니 나도 서울에서 삼월춘풍 화류시 주사청루에 진취하고 절세가인 결연하여 세월을 소견하였거니와 금일 너를 보매 세간 인물이 아니로다. 정신이 황홀하여 불승탕정이라 탁문군(卓文君)의 거문고에 월노승을 맺어두고 백년가약을 누릴까 부름이라."
이에 춘향이 대답하였다."소녀 비록 기생집의 여자이오나 마음은 북극천문에 턱을 걸어 남의 첩이 되지 않기로 맹세하였사오니 도련님의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이도령이 다시 말했다. "비록 육례는 갖추지 못하나 혼인은 착실한 혼인이 될 것이니 잔말 말고 허락하여라." 춘향이 여쭈오되, "만일 허락한 후 사또께옵서 필경 갈리시면 도련님은 올라가고 관대가 성취하여 금슬지락으로 세월을 보낼 적에 날 같은 천첩이야 생각할까. 속절없는 이내 일신 개밥에 도토리 되리니 아무리 하여도 이 말씀 이행치 못할 소이다."
"만일 불행하여 사또께서 경직으로 올라가실 터이면 너를 설마 버리고 갈쏘냐." "그러할진대 후일 상고차로 약속 증서를 써 주십시오."이에 도령이 '모년 모일 불망기라. 우연히 광한루에 올랐다가 천생배필을 만나니 백년가약을 맺기로 언약하니 후에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든 이 문서를 보여주고 소송을 하라.' 춘향이 불망기를 접어 비단주머니에 넣은 후에 "이 산너머 한 모롱이 지나가면 벽오동 섰는 곳이 소녀의 집이로소이다."
도령이 춘향을 홀연 보낸 후에 책방으로 돌아와 정신이 산란하여 진정할 길 없는지라. 마지못하여 서책을 보려고 펼쳐놓은즉, 글자마다 춘향이요 글귀마다 춘향이라. 서책을 아니 읽으면 사또 불호령이 떨어질까 염려하여 동헌 퇴청하기를 기다려 몸을 숨겨 가만히 성을 넘어 방자놈 따라 춘향의 집을 찾아가더라. 방자 문에서 춘향 어미를 부르니 춘향 어미 나와본즉 책방 도련님이어늘, 가장 놀라는 체하며 이른 말이, 이 어인 일이뇨. 사또께서 아시면 우리 모녀 다 죽을 것이니 돌아가라. 이도령 하는 말이, 관계치 아니하니 바삐 들어가자 한다. 춘향의 모 마지못해 이도령을 들여 불로초로 빚은 술에 좋은 술을 내오니 이리 소리하며 즐기다가 날이 새면 몸을 빼어 돌아오고 어두우면 조용히 날아가서 자취 없이 다니기를 여러 날이 되었더니 이때 남원 부사 선정 베풂을 임금이 아시고 품계를 높여 호조 판서를 제수 하시고 패초하는 문첩이 내려오니 부사 택일 발행할 새 영을 불러 이르되, 너는 내행을 모시고 먼저 올라가라 하니 도령이 이 말 들으매 낙담상혼하여 목이 메어 겨우 대답하고 내아에 들어가 치행제구를 차리는 체하고 바로 춘향의 집으로 가니 춘향이 목이 메어 울며 두 손으로 가슴을 치며 하는 말이,"이 설움 어이할꼬. 이별이야 평생 처음이요, 다 하건마는 우리같이 설운 이별 또 어디 있을손가. 답답한 이 슬픔을 어이하리." 하며 훌쩍훌쩍 울었다.
그리고 비단주머니를 열고 면경(面鏡)을 주며 왈, 장부의 어엇한 마음 이 면경과 같아서 변치 않으리라 하니 춘향이 역시 옥지환(玉指環)을 벗어내어 도련님 주며 왈, 계집의 높은 절개는 이 옥지환과 같을지라. 천만년이 지나도 옥빛이야 변하리까하여 춘향과 눈물로 이별하고 서울을 향할 새 돌아보고 또 돌아보니 한 산 넘어 오리(五里) 되고 한 물 건너 십리 되매 춘향의 형용이 묘연한지라 할 수 없어 장탄식하며 올라갔다.
구관 사또 올라가고 신관 사또 육방관속 현신 받은 후에 이방 불러 분부하되,"본읍에 예쁜 기생이 있느냐" 물으니 이방이 "기생 춘향이 있으나 관아에 딸린 기생의 명부에는 없다"고 하며 구관 사또 자제와 언약이 된 사실을 고하고 춘향이 수절한다 하자 신관 사또 노해서 어린 자식들이 첩을 얻자니 말이 되느냐면서 도임 후에 우선 기생 점고부터 받는지라.
춘향의 이름이 기생 안에 없으니 어인 일이냐 물으니 이방이 춘향은 수절한다 하니 아따, 수절이 어이 있는가 바삐 가서 잡아들이라 하니 관노 사령들이 우당퉁탕 바삐 가서 대문을 박차며 춘향을 잡아 불러들여 물었다.
"네 본읍 기생으로 신관 도임 초에 현신 아니하기를 잘했느냐""소녀는 구관 사또 자제 도련님을 모시는 고로 대령치 못하였나이다.""무에야! 너 같은 기생이 수절이라니! 잔말 말고 오늘부터 수청 하라." 하니 춘향이 말했다."만 번 죽어도 그것은 못하옵니다."
이에 신관이 크게 화를 내어 춘향을 결박하여 형틀에 앉힌 후 집장에게 분부하여 대매의 허락하도록 매우 쳐라 하니 군노 등이 주장 곤장 도리깨 다 버리고 형장을 눈 위에 번뜻 들어 후려치며 이제도 분부 거역할쏘냐 춘향이 아뢰되, 사또께서 나의 일신을 토막내어 저미거나 오리거나 하실지라도 목은 한양 성내에 보내어주심을 바라나이다. 신관이, 말이 저런 요악한 년 한 매에 승복하게 하라 하니 점장이 한 번 치고 두 번 치니 백옥 같은 다리에 유혈이 낭자하니 인사불성 하여 죽은 듯한지라 분부하여 하옥시켰다.
이때 서울로 올라간 이도령은 주야로 학업에 힘써 태평과에 장원을 하니 임금은 이도령에게 삼도어사를 제수 하였다. 이에 사은하고 행색을 새 칠푼짜리 헌 파립에 헌 망건 박쪼가리 관자 달고 물렛줄로 당졸하고 헌 도포에 오푼짜리 무명 동다회를 양지머리에 잔뜩 눌러 띠고, 전주성 안에 들어 여기저기 탐문하고 바라보니 한철 농부들이 일하고 있다.
이어 한 농부에게 "이 고을 원님 정사 어떠하며 민폐나 없으며 또 호색하여 춘향을 수청 들였단 말이 옳은지" 하고 묻자 농부 화를 내어 하는 말이, "철석같이 수절하는 춘향이 수청 아니 든다고 형을 가해 옥에 가두었으니 구관의 아들인지 개아들인지 한번 떠난 후에 종무소식 하니 그런 쇠자식이 어디 있으리오."하고 말했다.
이에 어사가 다시 길을 가다 주막에 들르니 한 노인이 한가로이 흥얼거리고 있자 다시 물었다. "이보시오 노인장, 본관이 호색하여 기생 춘향을 작첩하여 호강한단 말이 사실이오?" 하고 묻자 노인이 화를 내면서 "송백 같이 곧은 절개를 가진 춘향에게 누명을 씌우지 마소. 원님이 음탕하여 춘향이 수청 아니 든다고 엄형하여 옥귀신을 만드는데 구관의 아들인지 난정의 아들인지 그런 계집은 버려두고 찾질 아니하니 그런 개아들이 어디 있으리오."하거늘 이 말을 들은 후 춘향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일각이 여삼추였다.
급히 남원 성중에 들어가 탐문하면서 춘향의 집을 찾아가니 행랑채는 쓰러지고 안채는 기울어져 서까래 나발 불고 마당은 개똥판이 되었으니 춘향 어미 탕관에 죽을 쑤며 탄식하거늘 어사 춘향 어미를 부르니 대답하되, 뉘라서 이 심란중에 부르는고 하며 보다가 거지는 눈이 없어 동냥 달라 왔는가. 어사 웃으며 또 부르니 자세히 보다 얼굴은 도련님이 분명하나 의복은 상거지라. 다시 급히 춘향 어미와 함께 춘향을 보러 가니 칼머리를 쓰고 있던 춘향이 어사의 음성을 알아듣고 하소연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서방님 날 살려주오. 명일은 사또 생일이라, 필경 일이 있으리니 칼머리나 들어주오."이에 어사 대답하기를 "어찌하든 염려 말라."
하고 춘향 어미를 따라가 밤을 지새고 이튿날 밝은 낮에 관문 밖에 가서 탐문하니 과연 본관의 생일이라. 포진 범백이 이루 말할 수 없더라. 어사 문 밖에서 기웃기웃 하다가 문 군사 소피하러 간 사이에 돌입하여 청상에 올라 하는 말이, 내 마침 지나다 오늘날 성찬 음식이나 얻어먹을까 하노라하니 본관은 미안히 여기고 운문 영장은 웃고 하는 말이 또한 예사라. 좌석에 참례함이 무방하다했다. 이윽고 분부하여 음식이 들어올 제 통인에게 분부하여 술상을 저 양반께 드려라. 하니 통인놈이 부어드리니 어사 받지 않고 "내 가만히 본즉 어떤 데는 기생년으로 술을 드리고 어떤 데는 이 모양으로 얼렁뚱땅하니 어쩐 일이뇨. 대저 술이란 권주가 없으면 무미하니 기생 중 묘한 년으로 하나 보내오."
본관이 듣고 이르되, 고객(苦客)이로다. 내 운봉의 말을 듣고 고약한 꼴을 본다하고 운봉은 웃고 기생에게 분부하여 아무 년이나 가보아라. 하니 한 년이 마지못하여 가며 하는 말이, "아니꼬워라. 권주가 없으면 술이 목구멍에 넘어 들어가지 아니하나."하고 술을 부어드리며 억지로 권주가를 불러준다. 노래가 끝나자 어사가 술상을 받아보니 개다리 헌 소반에 이면이 한 접시요, 경계다리 하나 놓고 양지차돌 곁들였네. 어사 두 다리로 상을 박차 엎지르고 일어서 그 엎지른 것을 긁어모아 소매에 뭉치어서 좌상을 향하여 뿌리니 본관의 얼굴에 튀었는지라 상을 찡그리고 하는 말이 인사불성이로고하며 운봉을 탓했다. 어사 하는 말이,
"나도 부모 덕에 글자인지 배웠더니 이런 잔치에 그저 감이 무엄하니 운을 부르면 글귀나 짓고 감이 어떠하뇨."좌중 논란이 분분하다가 기름 고(膏) 높을 고(高) 둘 내고 지필묵을 주니 어사 거침없이 글귀를 짓더라. 일렀으되, 그 글 뜻이 금잔의 아름다운 술은 일천 사람의 피요, 옥접시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이 흘러 떨어질 제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더라란 말이었다.
이 글은 대저 사또를 원망하고 백성을 위함이라 암행어사인지 수상히 여긴 운봉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 먼저 간다고 나가고 나자 이내 어사가 역졸에게 분부하여 마패로 삼문 두드리며 암행어사 출두라 하니 일읍이 진동하여 부서지니 해금 저 피리 장구 거문고 등물이라. 각읍 수령들이 쥐 숨듯 달아날 제 임실 현감은 갓을 옆으로 쓰며 이 갓구멍을 누가 막았는고 하며 전주 형관은 말을 거꾸로 타며 이 말 목이 근본이 없느냐 아무커나 바삐 가자 하고 원님은 강똥 싸고 이방은 기절하고 각 지방의 이방 등은 오줌 싸고 내동헌에도 물똥을 싼다 하니 원님이 떨며 왈, 우리 집안은 똥으로 말한다 할 제 어사 남원 부사를 파직시키고 관가의 창고를 봉해 잠근 후 공사를 처결할 새, 관속의 신상은 대분본하라. 하고 죄수 춘향을 올리라 하니 옥쇄장이 춘향을 압령하여 들어올 제 춘향이 울며 하는 말이, 우리 서방님더러 칼머리나 들어달라 하였더니, 오늘은 사생간 결단이 날 것이어늘 어디 가서 이 경상을 아니 보는고.
하고 크게 슬피 울었다. 그러자 형방이 이르되, "어사 사또께서 분부를 내려 오늘부터 너를 수청들이라 하시니 그대로 거행하라."그러나 춘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녀 전등 사또 자제 도련님과 백년가약 하였기로 분부 시행 못하겠삽네다."
그러자 어사가 직접 물었다."너 같은 천기로 무슨 수절이냐. 바삐 거행하라.""소녀를 만단을 내실지라도 마음은 변치 못하리로소이다."어사가 웃으며 "너 같은 절개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하고 말하면서 기생들을 분부하여 춘향의 쓴 칼을 이로 물어뜯어 벗긴 후 "네 나를 보라."
춘향이 마지못하여 살펴보니 의심 없는 낭군이라. 뛰어올라가며 어사의 소매를 잡고 울며 목이 메어 말을 못하거늘, 어사 옥수를 잡고 만단으로 위로했다. 이때 춘향의 어미 미음을 가지고 오거늘, 관속들이 치하하니 춘향 어미 이른 말이, 그 어인 말인고하며 삼문 틈으로 디밀어보다가 어사가 바로 옛날 이도령인 것을 알자 뛰어나와 손뼉치며, 얼싸 좋을 시고, 지화자 좋을 시고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다음날 어사가 크게 잔치를 배설하고 춘향과 다시 만나 즐거움을 누리다가 공사를 처결하고 춘향 모녀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임금에게 전후 사정을 아뢴바, 임금이 이를 크게 칭찬하여 "천기로 수절함은 천고에 없는 일이로다" 하고 정렬부인을 내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