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은 어디 있는가
/ 법정 스님
여기저기서 꽃이 피었다가 지더니
이제는 온 산천이 신록으로 눈이 부시다.
나무마다 달리 제 빛깔을 풀어 펼쳐내는 그 여린 속 얼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록은 그대로가 꽃이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찬란한 화원이다.
내 오두막 둘레는 아직 꽃 소식이 없다.
얼마 전까지도 눈이 내려 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있다.
5월 초순쯤에야 벼랑 위에 진달래가 피어날 것이다.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가 시리다.
최근 한 잡지사에서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대담을 해 달라는 청이 있었다.
산과 들에 새잎이 눈부신 이 생명의 계절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그 조화에 한몫을 거드는 일이 될 것이다.
행복의 기준이라니,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단 말인가.
만약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다면
그건 진짜 행복일 수 없다.
수 많은 사람이 저마다 다른 환경과 상황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기준[틀]으로 행복을 잴 수 없다는 말이다.
내 식으로 표현한다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로 물어야 한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꽃향기처럼 들려오는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면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철이 바뀔 때마다 꽃과 잎과 열매를,
바람이 숲을 스치고 지나가듯이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어느새 꽃이 피고 잎이 펼쳐지고
열매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과 밖이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가 되면
모든 현상은 곧 우리 내면의 그림자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두 개의 화분 곁으로 다가가서
‘잘 잤는가.’라고 문안 인사를 건넨다.
지난 입춘날(2월 14일)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꽃시장에 들려 바이올렛 화분을 하나 사왔다.
단돈 천5백 원에.
그때는 정갈하게 핀 세 송이 꽃이 눈을 끌었다.
화분 중에서도 가장 작은 화분이었다.
4월 초에 다시 그 꽃시장에 들러
같은 화분을 하나 더 사왔다.
나야 성미가 괴팍해서
전부터 홀로 떨어져 살기를 좋아하지만
화분은 달랑 혼자서 지니는 것이 외롭고 적적할 것 같아
친구를 하나 데려온 것이다.
가지런히 놓아둔 화분에서는
서로가 겨루듯 활기차게 스무 송이도 더 넘는 꽃들을
저마다 피워내고 있다.
가끔 물 비료 원액에 물을 타서 주고
잎에는 분무기로 물을 뿜어준다.
처음에는 모르고 잎에도 물 비료를 뿌려주었는데
얼룩이 생기는 걸로 보아 식성이 다른 것 같았다.
이 두 개의 화초를 가까이서 보살펴주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살아있는 것을 가까이 두고 마음을 기울이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이런 걸 행복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가슴은 이렇게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서 밀물처럼 차오른다.
한밤중에 종종 겪는 일인데,
엊그제도 자다가 기침이 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낮 동안 미루어 두었던 방 안 일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는 사이에 기침은 멎는다.
정신이 아주 맑고 투명해진다.
촛불을 끄고 벽에 기댄 채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있으면
아, 말고 투명한 이 자리가 바로 정토(淨土)요,
별천지(別天地)이다.
이 밖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가슴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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